과학과 종교는 공존할 수 없다?

지난 2월 23일 영국의 여러 매체들이 ‘세기의 논쟁’이라고 소개한 진화론과 창조론에 관한 토론회가 열렸다. 로이터통신은 이번 토론회를 무신론과 유신론의 ‘헤비급 타이틀전’이라고 표현했다. 진화론의 대표 선수는 다윈주의자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였고, 상대는 로완 윌리엄스(Rowan Williams) 캔터베리 대주교였다. 도킨스는 일찍이 ‘이기적 유전자(Selfish Gene)’라는 책으로 세계적 명성을 얻었고, 근자에는 ‘만들어진 신(God Delusion)’이란 책에서 “신이란 헛된 망상에 불과하다”고 주장해 종교계의 ‘공공의 적’이 되길 자청한 옥스퍼드 대학의 생물학자다. 윌리엄스 대주교는 영국 성공회의 최고성직자이며 신학자로서도 높은 명성을 지니고 있다.
   
   최근 영국 법원이 지방의회에서 개회 전 기도를 올리는 관례를 불법으로 결정한 것을 두고 논란이 일자 옥스퍼드대가 이번 공개 토론을 기획한 것이었다. 토론의 주제는 ‘인간의 본성과 그 궁극적 기원에 관한 질문’으로 정해졌고, 사회자는 브리티시 아카데미 회장을 역임한 앤서니 케니 경(卿)이었다. 토론장인 옥스퍼드대 셀도니언 극장에는 성직자와 과학자를 비롯해 다양한 배경을 가진 청중으로 가득 찼다. 토론 중에 박수나 야유를 보낼 수 없도록 금지됐지만, 현대의 과학과 종교 진영을 대표하는 두 지성이 보여주는 날카로운 질문과 위트, 번뜩이는 대답으로 인해 청중은 경탄과 웃음소리로 호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음의 옥스퍼드대 사이트(podcasts.ox.ac.uk/nature-human-beings-and-question-their-ultimate-origin-video)나, 캔터베리 대주교의 홈페이지(www.archbishopofcanterbury.org/)로 들어가면 토론회 영상을 볼 수 있다.
   
   
   창조론과 진화론 논쟁의 역사적 맥락
   
   창조론과 진화론에 관한 논쟁은 실로 역사적인 논쟁이다. 이번 토론회는 주제, 인물, 장소 등 여러 면에서 약 150년 전에 벌어진 진화론과 창조론 간 논쟁을 연상케 했다. 과학과 종교의 역사에 전설처럼 전해지는 그 유명한 ‘헉슬리-윌버포스 논쟁’ 말이다. 당시 양 진영의 대표 선수는 진화론자인 토머스 헉슬리(Thomas Huxely)와 창조론자인 새뮤얼 윌버포스(Samuel Wilberforce)였다. 헉슬리는 ‘다윈의 불독’이라는 별명을 얻을 만큼 다윈의 진화론을 지키는 데 열성적이었다. 옥스퍼드 교구의 부주교였던 윌버포스는 명석한 두뇌와 유창한 화술로 영국과학진흥협회를 이끌었으며 종교계뿐만 아니라 과학계에서도 지대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참고로 노예제 폐지에 앞장섰던 이는 윌리엄 윌버포스 주교로 이와 다른 인물이다.) 이 대결은 다윈의 ‘종의 기원’이 출간된 지 1년 후인 1860년, 옥스퍼드대가 새로 건립한 자연사박물관 내 영국과학진흥협회 발표장에서 벌어졌다.
   
   다윈의 진화론을 지지하는 헉슬리의 발표가 막 끝나고 청중의 박수 소리가 채 가시기 전이었다. 윌버포스 주교는 헉슬리에게 조롱하는 말투로 이렇게 질문을 던졌다. “당신의 주장대로 사람이 원숭이 선조로부터 진화했다고 하자. 당신의 경우는 원숭이 조상이 부계 쪽인가, 아니면 모계 쪽인가?” 좌중의 폭소가 터져 나왔다. 이 질문을 들은 헉슬리는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옆자리의 동료에게 귓속말로 속삭였다. “신께서 오늘 저 늙은이를 내 손안에 주셨구나!” 장내의 웃음기가 가라앉을 때까지 침착하게 기다린 헉슬리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부여한 위대한 선물인 지성을 이런 식으로 진실을 호도하는 데 잘못 사용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라면, 나는 인간 대신 원숭이 조상을 가진 것을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겠다.”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음은 당연했다. 헉슬리의 명백한 한판승이었다. 그 뒤로 1년 동안 영국의 더 타임스에서 지면으로 전개된 두 사람 간의 진화-창조 논쟁 역시 과학자 그룹의 대표인 헉슬리의 승리로 끝났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영국과 유럽의 지식인들의 주류가 진화론으로 기울게 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윌버포스 주교와 창조론자들은 끝내 굴복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윌버포스와 헉슬리의 논쟁이 극적인 장면을 연출한 것은 사실이나 이것이 당시 다윈의 진화론에 대한 교회의 대표적 반응이라고 보아서는 안된다. 진화론이 발표되자 많은 영국의 신학자들과 성직자들은 다윈이 마침내 베일에 싸여 있던 생명의 역사에 작용한 하느님의 섭리, 즉 계속된 창조의 섭리를 밝혀냈다고 환영했다. 그리스도교 신학에서는 성 아우구스티누스 이래로 하느님의 ‘무로부터의 창조(creatio ex nihilo)’ 교리와 더불어 ‘계속된 창조(creatio continua)’ 교리를 인정해왔기 때문에 상당수 신학자들이 다윈이 주장한 진화론을 하느님의 계속된 창조의 결과로 해석할 수도 있었던 것이다. 물론 당시도 아일랜드의 제임스 어셔(James Ussher) 대주교와 같이 성서를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문자주의에 얽매인 성직자들은 하느님의 창조가 기원전 4004년에 일어났다는 주장을 여전히 고집했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이 오늘날까지 생명력을 가지고 전해져 오는 이유는 그들이 당시 신학계의 주류였기 때문이 아니라 그 논리가 단순하기 때문이다.
   
   
   치열한 난타전은 없었다
   

▲ 로완 윌리엄스 캔터베리 대주교 photo 로이터· 뉴시스
헉슬리와 윌버포스 논쟁 이후 150여년이 지나 벌어진 종교와 과학의 토론 분위기는 상호 존중의 분위기 속에서 보다 지적이고 진지했다. 그렇지만 자신들의 주장에는 한 치의 양보도 없었다. 다윈주의에 근거하여 오늘날 가장 전투적으로 과학적 무신론을 전도하고 있는 도킨스는 ‘현대과학의 성취와 진화론의 승리에 따라 종교는 끝장났다’고 주장했다. 그는 다윈의 자연선택 이론이야말로 생물학뿐만 아니라 우주의 모든 현상에도 적용 가능한 진리라고 주장했다. 그는 “진화론에 따르면 인류는 인간이 아닌 조상에서 나온 것이며, 다윈은 우리에게 무에서 모든 것이 창조됐다는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생각에서 벗어날 용기를 주었는데 무엇 때문에 창세기를 21세기 과학에 맞춰 재해석하는 데 시간을 낭비하고, 하느님이라는 혼란스러운 개념 때문에 세상을 복잡하게 봐야 하는가?”라고 질문했다.
   
   윌리엄스는 “하느님을 사랑과 수학의 결합이라고 부르자”며 과학의 잣대로 종교를 판단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응답했다. 그는 “성경의 저자들은 21세기 물리학을 전공한 사람들이 아니며, 21세기 과학의 문제는 21세기 과학으로 풀려고 하지만, 우주에서 인간의 위치를 이해하려면 창세기를 본다”고 말했다. 그 이유는 “성경을 문자주의로 읽어서는 안 되며, 창세기에는 창조자와 인간의 기원에 대한 깊은 진실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라고 설명했다. 또한 “인간의 영혼은 죽는다고 사라지는 게 아니고, 영혼을 지닌 인간은 다른 피조물과 달리 자신과 자신의 목적에 대해 반성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주장했다. 도킨스 교수가 던진 가장 까다로운 질문은 “하느님이 창조주라는데 왜 매일 나쁜 일이 일어나고 인간이 고통을 받아야 하는가?”였을 것이다. 이에 대해 윌리엄스 대주교는 “이는 어려운 문제이나, 하느님이 왜 더 큰 고통을 주지는 않을까도 생각해 봐야 한다”고 대답했다.
   
   150년 전과 같은 극적인 장면이나 치열한 난타전을 고대했던 대중매체의 바람과는 달리 두 토론자는 서로 평행선을 달리는 주장을 펼치면서도 상대방에 대한 예의를 지키며 다소 점잖은 분위기에서 토론을 이어갔다. 토론이 끝난 후 일부 매체들은 세기의 논쟁이 밋밋하게 끝났다고 평하기도 했다. “결정적인 타격은 없었으며 두 토론자가 섀도 복싱의 달인”이라며 실망감을 표현하기도 했다. 어쨌든 둘 다 각자 하고 싶었던 얘기는 다 한 것으로 보인다.
   
   
   신은 폐기돼야 할 망상?
   
   윌리엄스 대주교가 도킨스의 질문에 답변한 어조에 대해 어떤 기독교인들은 만족해하지 않을지 모른다. 보다 확고히 하느님의 존재와 영혼의 이미지에 대해, 그리고 진화론을 부정하고 창조론을 설파해주기를 바라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성공회 신학의 주된 흐름은 비아 메디아(via media)’로 표현되는 중도주의를 존중한다. 어느 편이든 한쪽으로 치우친 극단주의는 그만큼 진리와 멀어질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영국 교회는 역사적 경험을 통해 깨달았다. 아울러 성공회는 올바른 신앙의 기준으로 성경, 전통과 더불어 이성을 인정한다. 즉 매사에 합리적인 판단을 가능하게 해주는 인간의 이성을 신앙의 문제를 판단할 때도 존중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윌리엄스 대주교를 비롯한 많은 신학자들은 진화와 창조를 필연적으로 상충한다고 보려 하지 않고 하느님의 창조 섭리로서 진화를 설명하고자 한다. 이런 점에서 도킨스-윌리엄스 논쟁은 헉슬리-윌버포스의 논쟁보다는 과학을 존중하는 바탕에 서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만큼 보다 지적인 토론을 전개할 수 있었다.
   
   한편 도킨스는 ‘만들어진 신’에서 신이란 개념 역시 자연선택 원리에 따라 만들어진 것으로 인류가 미개하던 시절에, 신이라는 망상을 가진 부족이 그렇지 않은 부족보다 종족 보전에 유리했기 때문에 만들어진 망상이라고 주장한다. 과학의 빛에 의해 거의 모든 것이 밝혀진 오늘날 신이란 망상은 더 이상 필요없으므로 폐기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는 종교를 지성의 반대로 여기면서 종교라는 이름으로 저질러진 인류의 사악한 행위들을 열거한다. 그리고 종교가 사라지면 이 세상의 사악함도 대부분 사라질 것이라며 전 세계적으로 무신론 캠페인을 전개하고 있다. 한발 더 나아가 도킨스는 온건한 신앙조차도 궁극적으로는 광신을 부추긴다고 주장한다. 온건주의적 종교도 결과적으로 극단주의로 연결되기 때문에 아예 종교 자체를 부정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슬람 과격분자들에 의해 자행된 2001년 9·11 테러의 충격은 미국과 서구 사회에 종교 근본주의의 폐해에 대해 깊이 반성하는 계기를 주었다는 점에서 도킨스의 주장에 어느 정도 힘이 실리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도킨스의 주장은 그가 상정하고 있는 신의 이미지가 오늘날 신학자의 입장에서 보면 그야말로 오래되고 낡은 이미지라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 오늘날 세계의 주류 그리스도교 신학계에서 말하는 신은 미켈란젤로의 그림에 등장하는 하얀 수염 휘날리는 할아버지와 같은 모습의 신이 아니다. 도킨스가 신봉하는 진화론을 빌리지 않아도 신에 대한 이해 역시 성찰을 통해 발전되고 확장돼 왔다. 인간과 세계에 대한 인류의 지식과 이해의 폭이 확장됨에 따라 그리스도교의 하느님도 이스라엘 부족만의 수호신이란 좁은 개념에서 벗어났다. 이런 점에서 도킨스의 무신론은 일부 그러한 방식으로 신을 따르는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그다지 위협적이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과학과 종교, 적인가 동지인가?
   

▲ 19세기 영국의 과학자 토머스 헉슬리. ‘다윈의 불독’이라고 불리었다. photo 조선일보 DB
과학과 종교는 절대로 공존할 수 없는 적이라는 통념이 있다. 전해오는 갈릴레이 재판에 관한 이야기는 이러한 관계를 말해주는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그러나 보다 진지한 태도로 과학과 종교의 관계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양자가 반드시 적대적일 필요는 없다고 주장한다. 양자의 관계는 대체로 △갈등 △독립 △대화 △통합이라는 네 가지 유형으로 맺어질 수 있다. 이들 가운데 첫째 유형만이 바로 적대적 관계다. 이러한 관계는 과학 진영의 과학 만능주의 내지는 물질적 환원주의와, 종교 진영의 종교 근본주의 내지는 성서(경전) 문자주의가 만날 때 형성된다. 물질적 환원주의란 일종의 철학적 주장인데 우주의 모든 존재와 현상을 물질로 환원시켜 설명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인간의 정신 작용이나 사랑과 같은 정서적 느낌조차도 결국 물리화학적 작용에 기인한다는 주장이다. 다른 한편 문자주의란 성경이나 경전을 읽을 때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고 따라야 한다는 입장이다. 성경은 문자 그대로 하느님의 진리이기 때문에 과학적 설명도 이것과 부합될 때만 인정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양쪽 진영에서 각자 이러한 입장을 고수한다면 과학과 종교는 분명 상호 충돌하는 적대적 관계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모든 과학자가 과학 만능주의나 물질적 환원주의를 고수하지 않으며, 마찬가지로 모든 종교인이 근본주의를 고집하거나 문자주의적으로 경전을 읽지는 않는다. 보다 유연한 입장에서 상호 대화의 가능성을 열어둘 때 과학과 종교는 서로 만나 대화할 여지가 만들어진다. 돌이켜보면 인류는 수천 년간 종교적 전통을 통해 문화를 형성하고 지혜와 윤리를 전수해 왔으며 올바른 삶의 길을 추구해 왔다. 아울러 근대과학의 눈부신 성취에 힘입어 우리를 둘러싼 우주와 생명의 신비를 이해하게 됐고 궁극적 진리를 향한 발걸음을 내디뎌 왔다. 양자가 각각 다른 차원과 방법론을 사용하고 있지만 인간의 삶과 우주의 궁극적 진리를 추구한다는 점에서는 동지인 것이다.
   
   만사가 그렇듯이 종교 역시 인류 공동체 속에서 긍정적인 역할을 할 수도 있고 부정적인 역할을 할 수도 있다. 이는 과학도 마찬가지다. 인간과 생명을 위한 이기의 도구일 수도 있고 파괴의 도구일 수도 있다. 원자력은 암환자에게 생명을 연장해주는 방사선 치료로 사용될 수도 있지만, 동시에 핵무기로 사용되거나 핵발전소 사고로 인해 인류를 파멸로 몰아넣는 끔찍한 도구가 될 수도 있다. 그 판단은 역사적이고 통전(統全)적인 맥락에서 과학이나 종교가 인간의 자유와 해방과 진리와 참된 삶, 그리고 생명의 아름다움을 꽃피우도록 기여했는지 여부로 판단할 일이다. 거듭 말하자면 모든 종교, 혹은 과학은 이상적이지도 않고 사악하지만도 않다. 모든 철학과 과학과 사상이 그렇듯이 좋은 놈이 있는가 하면 나쁜 놈도 있고 이상한 놈도 있다.
   
김기석
   
   성공회대 교수·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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