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녀, 2010

임상수 감독

이정재, 전도연, 윤여정, 서우 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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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 대해 어떻게 평을 해야하나? 일단 이 영화를 선택하게 된 계기가 (우리나라) 상류층과 하류층간의 관계상을 어떻게 담아내고 있는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대부분 드라마를 통해서도 이러한 모습들이 많이 비쳐지긴 했으나 영화로 비쳐지는 모습은 어떠할지, 더군다나 2010년 최신작이기 때문에 가장 최근의 모습이 투영되지 않았을까 내심 기대하는 마음으로 영화를 보았다.

이제는 어린아이들 조차 알만큼 상식이 되어버린 허울뿐인 '만인평등주의' 사상. 겉으로는 모든 사람들이 평등하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여전히 계급이 존재하는 오늘 날의 사회. 예전에 드라마 <발리에서 생긴 일>에서 등장했던 '그람시의 옥중수고' 책에서도 요즘 사회에 계급이 없어졌다고는 하나 실제로 없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언급한다.

사실 오늘 날 어느 누가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사회에 계급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겠는가. 거의 모두가 알고는 있지만 이러한 사실에 대해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를 뿐이다. 여기에는 '자유시장경제'가 큰 작용을 한다. 모든 이들에게 소위 성공할 수 있는 동등한 기회를 준다는 미명 하에 마치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고 느끼게끔 가르치고, 또 성공하지 못한 것은 전적으로 자신의 노력의 부족이었고, 자신의 책임이라고 역설하면서 실패와 낙오에 순응하도록 유도한다. 하지만 이것의 실상은 눈속임에 불과하다. 정말 평등이라면 동등한 기회와 함께 동일한 환경(조건)이 필요한 것 아닌가. 예를 들어, 올림픽 수영경기에서 동일한 기회 즉, 출전 선수 모두가 200m 자유형 경기를 할 수 있다고 치자. 여기까지는 평등하다. 하지만 선수들마다 조건이 다르다면 예를 들어, 누구는 오리발도 낄 수 있고, 누구는 손과 발에 최신형 고성능 모터를 장착할 수 있고, 또 누구는 아무것도 없이 speedo 전신 수영복에 - 나름 -, 물안경만 착용하고 경기를 하게 된다면, 그 결과는 뻔하지 않은가. 그 와중에도 정말 수영복에 물안경만 착용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악물고 피눈물을 흘리는 자고의 노력으로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어 오리발을 낀 사람을 제치고 입상하는 경우도 간혹가다가 있긴 하지만 말 그대로 '간혹가다'이다. 이것을 놓고 과연 평등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말이다. 이러한 현상은 사회 전반에 모든 영역에 걸쳐 일어나고 있다. 교육도 마찬가지다. 우리나라 교육의 일번지라고 하는 강남 8학군에서 소위 top 5 대학에 입학하는 인원이 전체 인원에서 상당한 비율을 차지한다는 것은 이제는 놀라운 소식이 아니다. 당연하게 받아들여 진다. 한데, 이들이 받는 사교육이 다른 지역에 비해 - 특히 시골에 비하면 - 어마어마하게 차이가 난다는 사실에서 과연 대학 입학의 기회가 평등한가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더군다나 우리나라는 아직까지 대학 간판이 대학 졸업 이후에 사회 생활에서의 성공에 있어서도 매우 중요하지 않은가.

나에게는 잊지 못할 이야기가 있다. 이 이야기는 과거에 내가 학원수업을 받을 때 사회탐구 영역을 담당하던 학원 강사가 해주었던 것이다.(나도 그러고 보면 학원(일반 단과반)을 다녔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오리발을 꼈다는 점을 인정한다.) 자신이 과거에 학원 강사를 하면서 부업으로 개인지도교습(혹은 과외)을 할 때가 있었던 일화라면서 소개했다. 한번은 고등학교 3학년 남자 학생을 가르친 적이 있었는데, 그 학생의 아버지가 서울 강남에서 잘 나가는 의사였다고 한다. 그러니 최상류층은 아니라도 상류층에 속하는 집안이었을 것이다. 아무튼, 그 학생의 목표도 아버지처럼 서울대 의대를 들어가는 것이었다. 웃지 못할 사실은 사회탐구 영역을 가르치는 자신을 과외 선생으로 부른 것이 얼마 전에 치른 모의고사에서 사회탐구 영역에서 한 문제를 틀려서였다고 한다. 그래서 한 달 동안 일 주일에 한 번씩 학생을 지도해 주기를 원했고, 그 댓가로 120만원을 주었다고 하니, 자신이 받으면서도 너무한것 아닌가 싶었다고 한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학생은 사회탐구 영역 뿐만 아니라 다른 영역까지 그보다 비슷한 수준 혹은 더 많은 돈을 내면서 개인교습을 받고 있었다고 한다.

물론, 서울대 의대를 들어가는 학생들이 전부다 그러한 혜택을 받으면서 공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자명한 사실은 돈이 없으면 양질의 교육을 받기가 힘들다는 것이다. 더 웃지 못할 사실은, 지금도 많은 대학에서 기부입학이 자행되고 있다는 것이다. 10억이라는 돈을 내면 입학을 시켜주는 나름대로 합리적인? 제도이다. 이에 대한 긍정적인 입장이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받은 돈을 가지고 대학에서는 학생들에게 더욱 더 양질의 시설과 더 높은 수준의 교육을 제공할 수 있기 때문에 많은 학생들이 혜택을 받을 수 있다는 논리이다. 하지만, 실상을 따지고 보면 가진자의 특권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현상이 만연해 있는 사회이기 때문에 점차적으로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날로 심화되고 있는 사실이 별로 놀라운 것은 아니다. 부와 가난은 세습된다는 말. 이 역시 이제는 상식으로 통한다. 더욱이, 소위 상류층의 사람들은 자기들끼리 울타리를 높이 올려놓고 그것을 넘어오는 사람을 극히 제한하고 있으며, 그 속에서 자기들끼리 번식하면서 부의 재생산을 이뤄가고 있다.

앨린 그린버그가 얘기했던 오늘 날 기업에서 필요로 하는 인재상은 MBA 학위를 가진 사람이 아닌 PSD(Poor but Smart and Desire to become rich) 정신을 가진 사람이라는 말 역시 느낄 점을 던져준다.

사설이 길었다. 다시 영화 얘기로 돌아가자면, 임상수 감독은 영화를 통해 여러가지 생각거리를 던져주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먼저, 주인(이정재, 서우)과 하녀(전도연, 윤여정)라는 상류층과 하류층이라는 계급 사이에서 발생한 갈등. 과거나 오늘 날이나 계급은 있어왔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과거에는 계급에 대해서 사람들이 당연하게 받아들였지만 오늘 날에는 계급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에 대해 마음 속 깊숙이부터 불만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엄밀히 말하면, 모든 사람들이 계급에 대해 불만이 있다는 것이 아니고, 하류층에 한해서 자신이 하류층이라는 것에 사실에 대해 불만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하겠다. 왜냐하면, 하류층이 생각하기에 상류층이나 하류층인 자신이나 누구나 상류층이 될 수 있는 평등한 기회가 있었지만 단지 자신이 그 기회를 살리지 못해서 하류층에 머물러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다. 또, 오늘 날 계급의 구분선이 되어주는 '돈'이라는 것이 워낙에 가변적인 것이기 때문에, 한 순간에 벼락부자가 되어 하류층에서 상류층으로 인생역전하는 사례도 주변(매스컴)에서 빈번하게 보고 있고, 그 반대로 상류층으로서 떵떵거리며 살다가 한 순간에 회사가 부도가 나거나, 주식이 종잇장이 되어 버리는 바람에 쪽박을 차고 하류층으로 전락해버리는 경우도 보기 때문에 그렇다고 생각된다. 즉, 자신도 얼마든지 '돈'만 많이 벌면, 인생역전 할 수 있는 가능성이 다분히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리고 돈으로 평가받는 세상에서 그 말이 틀린 것은 아니다. 그래서 어쩔수 없이 겉으로는 신분상 하녀로서 주인을 모시고 살아가지만 마음 속으로는 여전히 주인의식이 팽배하다. 자신도 언젠가 주인이 될 수 있다는 소망, 그 꿈을 여전히 놓지 않고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마음 속 깊이에서부터는 주인에 대한 섬김의 마음이 없다. 겉치레에 불과하다. 피상적이다. 너무나도 가볍다. 그러니까 섬기는 자신이나, 섬김 받는 주인이나 서로 간에 진실됨이 없고 사랑이 없다. 그래서 만족이 없고 불행할 뿐이다.

잠깐 다른 얘기를 하자면, 예전에 봤던 <핸드폰>이라는 영화가 생각난다. 친절과 봉사를 회사의 최고 가치로 여기면서 고객을 왕으로 모시는 E-마트에서 일하는 직원(박용우)이 직장에서 인정받기 위해서 고객들에게 친절과 봉사로 섬기는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돈벌이를 위한 매우 피상적인 겉치레에 불과할 뿐, 마음 속으로는 그들을 증오하고 미워하고 저주한다. 때문에 점점 더 그의 마음은 병이 들어가고, 이는 그가 나중에 반사회적인 행동을 하게 만든 장본인이 된다. 사랑과 봉사는 마음 속 깊숙이에서부터 진심에서 우러나와야지 그렇지 않다면 주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이나 둘 다 진실의 샘이 메말라 그들의 감정과 인생이 황폐해 질 뿐임을 시사해 주는 영화였다.

영화 <하녀>도 마찬가지다. 마음 속 깊이에서부터 주인에 대한 사랑과 존경이 없기 때문에 병식(윤영선)은 주인이 없을 때마다 아더메치(아니꼽고. 더럽고. 메스껍고. 치사한) 를 외친다. 그리고 자신의 마음 속에는 '평등주의' 의식의 팽배로 인해 나도 얼마든지 상류층이 될 수 있다는 동경심에 주인이 집을 비울 때는 마치 자신이 주인인냥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아 화롯불을 쬐며, 와인과 함께 책을 읽는다. 그녀의 이러한 마음은 아들에게도 전이되어 아들이 '검사' - 소위 상류층 - 가 되는 장면도 연출된다. 또한, 전도연이 주인에게 해꼬지를 당하면서도 반항 한 번 제대로 못하자 본인이 오히려 더 답답해하고 억울해 하고, 마지막에 수십 년 동안 섬겼던? 주인들에게 보란듯이 비난하고 당당하게 문을 박차고 나가는 모습을 통해 오늘 날 하류층들이 상류층에 가지고 있는 반발심과 갈등을 잘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둘째는, 감독은 상류층이 하류층에 대해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 보여주고자 하는 것 같다.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오늘 날에 상류층과 하류층을 나누는 기준인 '돈'은 매우 가변적이다. 물론, 부와 가난의 되물림의 현상, 부익부 빈익빈의 현상은 기정사실이 되어 가고 있지만, 그것을 뒤집어 엎는 사례들 또한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더 나아가, 지금의 상류층이 된 소위 돈 많은 사람들. 그들이 원래부터 돈이 많은 사람들인지 자각해야 한다. 물론 그들 중에는 부의 되물림으로 태어날 때부터 부자의 신분으로 태어난 사람들이 있기 하다. 그러나 많은 수가 그런 것은 아니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 땅부자, 부동산 부자들이 많다. 예전에 가지고 있던 땅들이 갑자기 천정부지로 가격이 솟아오르는 바람에 벼락부자 혹은 졸부들이 많은 것이다. 여담으로, 부자에 대해 연구를 오래한 사람이 이런 결과를 발표했다. "부자는 부자가 될 수 밖에 없다. 그들이 가진 지식, 교양, 인격, 품위, 건강, 성격 등등 전반적인 부분에서 그들은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정말 자수성가해서 큰 부자가 된 사람들을 보면 겸손한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지만.) 왜냐면, 자신 역시 가난했던 시절이 있었기 때문에 그렇다. 다만, 갑자기 졸부가 된 사람들. 혹은 태어날 때부터 거저 부자가 된 사람들은 돈을 어떻게 버는지도, 어떻게 잘 써야할 지 모르고 돈의 귀함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다. 그런 부자들 때문에 사회적으로 부자에 대해 인상이 전반적으로 좋지 않다고 얘기한다.

따라서 여기서 내가 말하고자 함은, 지금 소위 돈을 많이 가졌다는 부자들 혹은 상류층들은 겸손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도 언제 어느 때 하류층으로 전락할지 모르는 게 인생이다. 물론,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 때문에 전전긍긍하라는 말은 아니다. 다만, '돈'의 가변성과 가벼움에 대해 얘기하고 싶은 바다. 부자라는 것은 특권이 아닌 책임임을 명심해야 한다. 빌게이츠는 이런 말을 했다. "인생은 공평하지 않다." 이를 어떤 사람은 달리 말해서, "100억 부자는 자신의 각고의 노력으로 모을 수 있는 돈이지만, 1000억 부자는 천운이다." 라는 말을 했다. 즉, 부자는 타고난 운명이라는 말이다. 사실 수많은 사람들이 부자가 되기 위해 동일한 노력? 혹은 더한 노력을 하지만 성공하는 경우는 드물다. 미국 LA 실리콘 밸리에서 한 해에 100개의 회사가 차려지면 그 중에 97개의 회사는 망하고 3개의 회사만 살아남는다고 하지 않은가. 부자가 되기 위해서는 시기도 중요하고, 흐름도 중요하고, 적절한 인재(동업자/협력자)도 중요하다. 그것을 한 치 앞도 내다보기 힘든 사람이 어떻게 예상하고 적절히 하나하나 준비할 수 있는가. 그래서 천운이라는 말이다. 따라서 부자는 자신의 재물복이 마치 당연한 것인냥 또는 타고난 것인냥 받아들여서는 안된다. 오히려 사회적으로 그리고 주변 이웃들을 위한 관심과 책임으로 자신의 타고난 운명을 승화시켜야 한다. 왜냐면, 엄밀히 따지면 자신들도 하늘로부터 거저받은 것 아닌가 말이다. 하지만 부자들은 그러한 책임의식 혹은 겸손의 마음이 턱없이 부족하다. 자신도 못가진 자였을 때에는 그렇게 외쳤을 '평등주의'를 이제는 가진자의 입장에 서니까 '울타리'를 치기 바쁘다. 그리고 하류층들을 무시하고 그들과 상종하지 않으려 한다. 여기에 대한 한 가지 추측은, 자신이 그러다보면 그나마 가진 것들을 잃을까봐, 그래서 힘들게 올라온 상류층에서 하류층으로 전락할까봐 두려워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일수도 있겠다. 왜 사람은 잃을게 많을 수록 두려움이 커지지 않은가. 영화에서 주인(이정재)도 하녀(전도연)을 말그대로 자신과 동등한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는다. 그냥, 성적 노리개로 생각할 뿐이다. 그래서 성적인 관계를 맺고 나서 아무 거리낌 없이 돈으로 그것을 계산하지 않은가. 심지어, 자기 자신에 너무 심취되어 있는(self-centered) 나머지 아내나 장모까지 존중받아야 할 인격체라기 보다는 자신의 소유물로 생각한다. 자신의 과오로 전도연이 자신의 아이를 가지자, 안주인과 장모는 혹시나 나중에 유산상속에 있어서 차질이 생길까봐 은밀하게 아이를 낙태시켜 버린다. 그 사실을 안 이정재가 장모를 향해 이렇게 말한다. "당신이 뭔데 당신 마음대로 내 허락도 없이 내 아이를 지우는 겁니까?" 아이라는 생명체도, 하녀에 대한 미안함도 전혀 없이 단지 자신과 관련된 소유물을 다른 사람이 마음대로 손을 댔다는 것에 대한 분노감의 표출이었다.

셋째는, 대부분의 예술작품이 그렇듯이 감독은 문제를 문제로만 그치지 않고, 실낙같은 희망을 던져준다. 주인집 딸인 나미를 통해 바로 그 희망을 선사한다. 나미가 자신의 엄마와 할머니가 하녀(전도연)에게 불한당같은 행위를 한 것에 대해 미안함 감정을 느끼는 점이나 - 그것은 곧 신분을 넘어선 따뜻한 인간미를 나타낸다 -, 마지막에 자신의 생일을 맞아 축하해주는 가족들과 어울리지 않고 - 아버지가 따라준 샴페인도 마시지 않은 채 - 혼자 덩그러니 그들로부터 떨어져 나오는 장면을 통해, 그래도 이 시대에 살아있는 혹은 살아있을 양심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끔 만들어 주었다.

우리는 앞으로 시대가 어떻게 흘러갈지 장담할 수는 없다. 다만,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이 되기를 소망하며 기도할 뿐이다. 그리고 우리가 소망하는 바가 정말 그렇게 되도록 내가 처한 환경에서 노력할 뿐이다. 세상에는 현재 너무나도 많은 문제들이 발생하고 있고, 그러한 문제들은 점점 더 극심해져 간다. 물질의 노예가 된 인간들은 그들의 인간성이 더욱 더 피폐해져가고, 가식과 허울의 팽배로 인해 사람들 간에 이뤄지는 감정적 교류 속에 진실성이 단절되면서 고독감과 외로움은 더욱 더 극심해져 가고 있다. 간단하게 말하면, 사회에 진실된 사랑이 줄어들고 있다.

그럼에도 희망할 수 있는 것은, 자연을 보아도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오고, 내리막이 있으면 오르막이 다시 있듯, 마냥 인류의 역사가 극악해져만 갈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랑의 하나님은 여전히 인류를 사랑하시며, 그분의 우리가 이해하기 힘든 거룩한 계획 안에 인류역사가 흘러가고 있으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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