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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그대만, 2011



오랜만에 본 러브스토리 영화.  저녁에 마신 커피 탓인지 잠이 오지 않아 침대에서 일어나 다시 책상 앞에 앉아서는 수업 준비로 이것저것 하는데... 스르르르 어느 순간부터 이 영화를 보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지난 번에 "오늘"이라는 영화를 와이프 없이 혼자 봤더니 와이프가 다음에 영화 볼 때는 꼭 같이 보자고 했었는데... 그 말을 못지켜줬다.  미안...다음엔 꼭!!

사실 영화가 시작되자 아내가 말한 그 말이 생각나서 잠시 고민하긴 했는데 예전에 우연히 이 영화 trailer를 보고는 언제 꼭 봐야지 하던 영화였기에 이내 와이프가 자고 있으니까....라고 나를 정당화시키고 마음 편히 보았다.

뭐랄까....이 영화...전체적으로 너무 좋았다.  사실 상 지난 여러 달 동안 한국 멜로 영화가 가진 특유의 감성적인 맛을 볼 일이 없어서 그런지 그 맛이 매우 달콤하게 다가왔다. 그 간, 신앙, 과학, 인문학, 시사 등등 수많은 자료와 서적들을 보면서 사랑에 대한 내용들도 많이 다뤘지만 확실히 학문은 학문인가 보다.  왜냐면 신학생으로서 그리고 교회 전도사로서 "사랑"의 중요성에 대해서 그렇게 잘 알고, 또 그렇게 떠들어 대고 다녔는데 이 영화가 이렇게 흥미진진하게 다가오는걸 보면 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결혼 5개월차 신혼 남편으로 아내와 알콩달콩 사랑을 하면서 지내는데도 불구하고 이런 멜로 영화가 이렇게 나를 신나고 흥분하게 만드는게 정말 신기하다.  하나님과의 사랑, 영혼과의 사랑, 그리고 아내와의 사랑이 나를 이토록 흥분하게 만들지 않는건 뭐지? 라는 의구심이 생기기도 한다.

더 흥미로운 사실은 이 영화를 보면서 와이프에 대한 짜릿한 사랑의 감정이 더 생겼다고 해야하나?  왠지 나도 저런 사랑을 해보고 싶다...라는 학습효과가 생기는 것을 발견하게 됐다. 이건 좀 중요한 발견이 아닌지 모르겠다. 사람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그리고 그 행위와 방식은, 내 안에서부터 창조되고 만들어지는 것이 아닌, 외부에서 경험하고 학습된 것이 내재화되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사랑이란게 짜릿한 감정만 가지고 되는건 아닌 건 분명하다. 사실 대부분 사랑 관계가 그렇게 시작되기는 하지만 점점 가면 갈수록 서로에 대한 존중과 배려 그리고 책임감이 더 폭넓은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짜릿한 감정이 또 전혀 없다면 그것도 너무 무미건조한 사랑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그 짜릿함이 존중, 배려, 그리고 책임감을 불러일으키는 열쇠가 되지 않나 싶다.  사랑관계가 존중을 위한 존중, 배려를 위한 배려, 책임감을 위한 책임감은 아니잖는가.

바로 여기서 그 짜릿함이 창조물이 아닌 모방물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다. 최초의 짜릿함 역시 어떻게 보면 외부로부터 학습된 것이 아닐까?  물론 그 짜릿함을 아주 어려서부터 경험하는 경우도 있고, 다 큰 어른이 되어서도 그 감정이 생기지 않아 결혼을 쉽게 결단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는 것을 보게 된다. 또 만나는 사람마다 그런 감정을 느끼는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은사람도 분명히 있다.  그 시작이 언제든, 경향이 어떠하든 그 원인을 본성적인 것 보다는 학습된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즉, 사람이 눈이 뜨이고 인지 능력이 형성되기 시작한 때부터 본 부모님들 간의 관계, 혹은 대중매체, 또는 단순히 세상에서 그들이 경험하고 인식한 것을 토대로 그 "짜릿함"의 정도와 시간이 결정되지 않나 싶기도 하다. (그것을 본인은 자각하지 못할지라도...)

원인이 어떠하든 중요한 건 그게 내 삶에 지금 어떻게 미치느냐 일 것이다. 만약, 짜릿함이 학습된 것이라면, 더 건강하고 아름다운 사랑 관계를 지속하기 위해 밝고 긍정적인 학습을 할 필요가 있겠다.  즉, 하나님과의 사랑 관계에서도 뜨겁고 가슴 불타는 간증이나 신앙 경험들이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더 흥미진진하게 만드는 길이 되지 않을까 싶다.

아무튼, 얘기가 좀 산으로 올라간 감이 큰데... 어찌됐든 이 영화가 오랜만에 내 마음과 정서를 따뜻하게 해 준 건 분명하다.

오늘 2011



기억에 남는 대사:


큰아들이 둘째 딸을 겁탈한 것을 눈감아버리려는 어머니 마음:
잘잘못을 가리기 보다는 자식을 잃지 않는게 더 중요했을 것이다.

하나님한테 인간은 애완견과 같은 존재다. 애완견A가 애완견 B를 죽여도 A를 죽이지 않는다. 하나라도 덜 잃고 싶어서. 죽은 B만 불쌍한 것이다. 주인한테 정의는 필요없다.

용서란 진실을 아는게 겁이나서 덮어버리는 행위다.
사과도 받지 않고 해 준 용서는 가짜다.

징역살고 나오면 죄책감도 없어집니까?

용서는 댓가를 바라고 하는게 아니잖아요.

미안하다는 말을 들어야지 아니면 용서 취소할랍니다.

용서보다는 죄를 더이상 짓지 않게 하는게 더 중요하지요.
이놈의 사회는 용서만 있고 반성은 없어요.
그러니 나쁜일이 반복되죠.
대책없는 용서는 죄악입니다.

용서받을 가치

그 소년이 회개를 했는지 용서를 받을 가치가 있는지는 감히 우리가 판단할 일이 아닙니다. 모든 걸 주님께 맡기고 그 아이를 위해서 더 기도하세요.
(그렇다면 제가 꼭 용서를 해야 했나요?)

상처받은 사람이 괴로운 이유는 용서해주고 싶은 마음이 있어서.

자매님은 용서한 순간 주님께 그 아이를 맡긴 거에요. 그 후에 일은 주님을 믿고 맡기세요. 그건 주님의 숙제니까요.
(그렇다면 주님은 뭘하고 계셨나요? 죽은 소년도 주님의 뜻인가요? 그 소년범이 제대로 벌을 받았다면 또 살인을 하지 못했을 꺼에요. 제 용서가 사람을 죽였어요.)
그래도 주님께선 단호한 자매님 보다는 자비로운 자매님을 원하셨을 껍니다. 가장 불쌍히 여기시는 영혼은 그 소년범이니까요.
(그럼 그에게 죽임을 당한 제 약혼자와 소년은 덜 불쌍한가요? 착한 사람에게 더 고통을 주시는게 주님의 뜻인가요?)
그 소년범과 약혼자의 운명이 바뀌면 좋았을까요?

나 기다릴꺼야. 내 맘이 내킬때까지. 강해질 때까지.

용서란 미움을 없애는게 아니에요. 그건 불가능해요. 미움을 마음의 가장자리로 밀어넣는 거에요. 서두르지 말아요. 시간이 아주 많이 필요하니까. 그 시간은 자신만이 알아요.

이렇게 쉽게 용서해줘도 되는 건가요? 기도 한번으로 용서가 끝나나요?
(자매님도 쉽게 용서받은 대가로 누군가도 쉽게 용서해주면 되잖습니까.)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실 때 원수들을 용서해 달라고 하나님께 청하셨죠. 그 절박한 순간에도 용서를 바란 건 피의자인 예수님이 용서를 원치 않으면 하나님도 용서할 수 없기 때문아닌가요? 죄인들은 자기 죄를 깨달아야 하지 않나요? 그런데 자기 죄를 알지도 못하는 살인자를 왜 제가 용서해야 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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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병기 활, 2011



영화의 스케일이나 스토리 구성의 탄탄함 혹은 활 쏘는 장면의 짜릿함 보다도 이 영화를 보는 동안 실제로 우리나라에 일어났던 역사적 사실에 대해 통탄하지 않을 수 없는 비극을 맛보게 된 영화였다.

병자호란... 네이버 백과사전에서 정리한 바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1636년(인조 14) 12월∼1637년 1월에 청나라의 제2차 침구(侵寇)로 일어난 조선·청나라의 싸움.



1627년 후금(後金)의 조선에 대한 제1차 침입(정묘호란) 때, 조선과 후금은 형제지국의 맹약을 하고 양국관계는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1632년 후금은 만주 전역을 석권하고 명나라 북경을 공격하면서, 양국관계를 형제지국에서 군신지의(君臣之義)로 고칠 것과 황금·백금 1만 냥, 전마(戰馬) 3,000필 등 세폐(歲幣)와 정병(精兵) 3만을 요구하였다. 또한 1636년 2월 용골대(龍骨大)·마부태(馬夫太) 등을 보내어 조선의 신사(臣事)를 강요하였으나, 인조는 후금사신의 접견마저 거절하고 8도에 선전유문(宣戰諭文)을 내려, 후금과 결전(決戰)할 의사를 굳혔다.

1636년 4월 후금의 태종은 황제를 칭하고 국호를 청(淸)이라고 고쳤으며, 조선이 강경한 자세를 보이자 왕자·대신·척화론자(斥和論者)를 인질로 보내 사죄하지 않으면 공격하겠다고 위협하였다. 그러나 조선은 주화론자(主和論者)보다는 척화론자가 강하여 청나라의 요구를 계속 묵살하였다.
12월 2일 이런 조선의 도전적 태도에 분개한 청나라 태종은, 청·몽골·한인(漢人)으로 편성한 10만 대군을 스스로 거느리고 수도 선양[瀋陽]을 떠나, 9일 압록강을 건너 쳐들어왔다. 의주부윤 임경업(林慶業)은 백마산성(白馬山城:義州)을 굳게 지켜 청군의 침입에 대비하였으나, 선봉장 마부대는 이 길을 피하여 서울로 진격하였다. 13일에서야 조정에서는 청나라 군의 침입사실을 알았고, 14일 적은 개성(開城)을 통과하였다.

조정에서는 급히 판윤 김경징(金慶徵)을 검찰사로, 강화유수 장신(張紳)을 주사대장(舟師大將)으로, 심기원(沈器遠)을 유도대장(留都大將)으로 삼아 강화·서울을 수비하게 하였다. 또 원임대신(原任大臣) 윤방(尹昉)과 김상용(金尙容)으로 하여금 종묘사직의 신주(神主)와, 세자비·원손(元孫)·봉림대군(鳳林大君)·인평대군(麟坪大君)을 비롯한 종실(宗室) 등을 강화로 피난하게 하였다.
14일 밤 인조도 강화로 피난하려 하였으나 이미 청나라 군에 의해 길이 막혀, 소현세자(昭顯世子)와 백관을 거느리고 남한산성으로 피하였다. 인조는 훈련대장 신경진(申景禛) 등에게 성을 굳게 지킬 것을 명하고, 8도에 근왕병(勤王兵)을 모집하도록 격문(檄文)을 발하였으며, 명나라에 급사(急使)를 보내어 지원을 청하였다. 그러나 16일 청나라 선봉군이 남한산성을 포위하였고, 1637년 1월 1일 태종이 도착하여 남한산성 아래 탄천(炭川)에 20만 청나라 군을 집결시켜, 성은 완전히 고립되었다.

성내에는 군사 1만 3000명이 절약해야 겨우 50일 정도 지탱할 수 있는 식량이 있었고, 의병과 명나라 원병은 기대할 수 없었으므로 청나라 군과의 결전은 불가능하였다. 또한 성 밖에는 청나라 군이 무고한 백성들을 죽이고 노략질하기를 일삼으며, 어미는 진중(陣中)에 잡아놓고 그 아이들은 추운 길바닥에 버려 거의 모두 굶어죽고 얼어죽었다.
특히 병자년은 혹독한 추위가 오래 계속되어, 노숙(露宿)한 장수·군사들은 추위와 굶주림에 기진하여 병들고 얼어죽는 자가 늘어났다. 이러한 상황에서 성내에서는 최명길(崔鳴吉) 등 주화파(主和派)와 김상헌(金相憲) 등 주전파(主戰派) 사이에 논쟁이 거듭되다가, 강화론이 우세하여 마침내 성문을 열고 항복하기로 하였다. 청나라 태종은 조선의 항복을 받아들이는 조건으로, 우선 인조가 친히 성 밖으로 나와 항복하되, 양국관계를 악화시킨 주모자 2, 3명을 잡아 인도할 것을 요구하였다. 때마침 강화도가 적에게 함락된 소식을 들어, 어쩔 수 없이 최명길 등을 적진에 보내어 항복조건을 교섭하게 하였다. 1월 28일 이에 청군은 용골대·마부대를 보내 다음과 같은 강화조약 조항을 제시하였다.
① 청나라에게 군신(君臣)의 예(禮)를 지킬 것, ② 명나라의 연호를 폐하고 관계를 끊으며, 명나라에서 받은 고명(誥命)·책인(册印)을 내놓을 것, ③ 조선 왕의 장자·제2자 및 여러 대신의 자제를 선양에 인질로 보낼 것, ④ 성절(聖節:중국황제의 생일)·정조(正朝)·동지(冬至)·천추(千秋:중국 황후·황태자의 생일)·경조(慶弔) 등의 사절(使節)은 명나라 예에 따를 것, ⑤ 명나라를 칠 때 출병(出兵)을 요구하면 어기지 말 것, ⑥ 청나라 군이 돌아갈 때 병선(兵船) 50척을 보낼 것, ⑦ 내외 제신(諸臣)과 혼연을 맺어 화호(和好)를 굳게 할 것, ⑧ 성(城)을 신축하거나 성벽을 수축하지 말 것, ⑨ 기묘년(己卯年:1639)부터 일정한 세폐(歲幣)를 보낼 것 등이다.
1월 30일 인조는 세자 등 호행(扈行) 500명을 거느리고 성문을 나와, 삼전도(三田渡)에 설치된 수항단(受降壇)에서 태종에게 굴욕적인 항례(降禮)를 한 뒤, 한강을 건너 환도하였다. 청나라는 맹약(盟約)에 따라 소현세자·빈궁(嬪宮)·봉림대군 등을 인질로 하고, 척화의 주모자 홍익한·윤집(尹集)·오달제(吳達濟) 등 삼학사를 잡아, 2월 15일 철군하기 시작하였다. 이로써 조선은 완전히 명나라와는 관계를 끊고 청나라에 복속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관계는 1895년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일본에 패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전후에는 많은 고아들의 수양(收養)문제와, 수만에 이르는(어느 기록에는 50만) 납치당한 이들의 속환(贖還)문제가 대두되었다. 특히 청나라 군은 납치한 양민을 전리품으로 보고, 속가(贖價)를 많이 받을 수 있는 종실·양반의 부녀를 되도록 많이 잡아가려 하였으나, 대부분 잡혀간 이들은 속가를 마련할 수 없는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속가는 싼 경우 1인당 25∼30냥이고 대개 150∼250냥이었고, 신분에 따라서 비싼 경우 1,500냥에 이르렀다. 속환은 개인·국가 모두 그 재원을 마련하는 것이 큰 일이었다. 여기에 순절(殉節)하지 못하고 살아돌아온 것은 조상에 대해 죄가 된다 하여, 속환 사녀(士女)의 이혼문제가 사회·정치문제로 대두하였다. 1645년 10년의 볼모생활 끝에 세자와 봉림대군은 환국하였으나, 세자는 2개월 만에 죽었다. 인조의 뒤를 이은 효종(봉림대군)은 볼모생활의 굴욕을 되새기며, 북벌(北伐)계획을 추진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쉽게 얘기하면, 우리나라가 1637년 1월부터 청일전쟁(1895년)까지 청나라 속국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좋게 얘기하면 속국이지, 식민지 혹은 노예나라와 다름 없다. 물론, 일본의 세력 확장으로 1800년대 후반에는 우리나라에 청나라보다 일본의 간섭이 더 심해졌고, (1876, 강화도 조약) 따라서 청일 전쟁 이후 공식적으로 청나라로부터 해방된 우리나라는 1910년 8월 22일 한일합병조약을 체결하여 합법적, 공식적 일제강점기가 시작되기 전까지 계속해서 일본의 비공식적인 식민지로 살았다고 해도 과연이 아닐 것이다. (1894, 동학농민운동, 갑오개혁, 1904년 2월 한일의정서, 1905년 을사조약, 1907년 7월 정미 7조약 등) 

즉, 1637년부터 일본으로부터 해방된 1945년까지 우리나라는 계속해서 다른 나라의 식민지로 살았고, 사실 엄밀히 말하면 광복이후에도 여전히 미국의 속국으로서 자유권, 자주권을 상실한채 살아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또한, 이 외에도 과거 우리나라 역사를 보면 대부분 외부로부터 침략을 받았고 때로는 속국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형제국이 되기도 하면서 살았다. 우리나라가 자주권을 가지고 역사를 마음대로 호령할 때는 아마 고구려 시대를 제외하곤 없었다고 볼 수 있다. 

이 얼마나 안타까운 역사적 현실인가?  

그럼 어떻게 하면 우리나라가 자주적으로 살 수 있는가? 

부국강병이라는 말이 생각난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으로서 국가관을 어떻게 세워야 하는지 궁금하다. 

Capitalism: A Love Story, 2009



“Property monopolized or in the possession of a few is a curse to mankind.” – John Adams, 1765
“No man ought to own more property than needed for his livelihood; the rest, by right, belonged to the state.” – Benjamin Franklin
“I sincerely believe … that banking establishments are more dangerous than standing armies.” – Thomas Jefferson, 1816
“It’s class welfare, my class is winning, but they shouldn’t be.” – Warren Buffett

What can I say about the capitalism?

자본주의. 일단, 자본주의에 대한 일반의식부터 고쳐나갈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본주의라는 용어에 대해서 특별히 혐오감을 느낀다거나 부정적인 인상부터 떠올리지 않는다. 왜냐면, 일단 자본주의에서 추구하는 것이 곧 내가 추구하는 것이기 때문이기에 그렇다. 자본주의의 매카니즘은 간단명료하다. 이긴사람이 다 가져간다는 논리. 그리고 그것이 정당한 것으로 인식되는 것.

사람은 누구나 가지고자 하는 욕망이 있다.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간에, 두 손에, 혹은 마음 속에 무언가로 채우려는 깊은 욕망이 있다. 그런 인간의 근원적인 욕망을 합리적으로 정당하게 사회적으로 충족시켜주는 것이 바로 자본주의라고 볼 수 있다. 다큐멘터리에서 누군가가 짚었듯이, 그렇기 때문에 자본주의는 모래위에 쌓은 성과 같을 수 밖에 없다. 욕망이라는 기반 위에 세워놓은 사회가 어떻게 건강하고 튼실하게 유지되어 나갈 수 있겠는가 말이다.

따라서 결론적으로 자본주의라는 사회체제는 단연코 폐지되어야 하는 것임에 분명하다.

그러기 위하여서는 일단, 자본주의에 대한 일반인식부터 바꿀 필요가 있다. 자본주의는 갑의 제도지 결코 을의 제도일 수 없다. 결코 가진자의 제도지 가지지 못한 자의 제도일 수 없다. 기회의 평등, 아메리칸 드림, 형평성, 공정성 등은 허울좋은 명칭일 뿐이지 실상은 부의 재생산, 규모의 경제, 적자생존 등이야 말로 자본주의의 참 모습이며 실체임을 자각해야 한다. 선조들이 뜨거운 피와 땀으로 일구어낸 '평등'이란 가치는 오늘 날 다시 '자본(돈)'이라는 굴레에 빠져 신개념 불평등, 신개념 계급사회를 초래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인류 역사는 불평등에서 자유로운 적은 없었다. 누군가가 말하기를 역사는 힘의 역사라고도 표현했듯이 역사 속에서는 항상 '힘 있는 자'가 있었고, 그 힘의 형태가 시대와 사회에 따라 다양한 모양과 모습으로 변이되어 나타났을 뿐 항상 그 뿌리는 함께 했음을 보게 된다.

따라서 '자본'은 오늘 날의 시대적 산물이며, 변이된 힘의 형태라고 볼 수 있다. 즉, 오늘 날 우리가 직면하는 불평등도 과거로의 후퇴가 아니라 인류역사가 항상 그래왔듯 마치 그림자와 같은 혹은 암적인 존재로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와 함께 하는 것이라 생각하는게 더 정확하겠다.

그리고 언제나 그러했듯, 가진자와 가지지 못한 자간에는 서로간의 이익을 도모하기 위해 갈등이 불가피한 것은 확실하다. 그리고 또한 언제나 그러하듯, 힘이 없고 가지지 못한 자들이 항상 다수라는 것이다. 그들 한 명 한명은 저항할 능력도 힘도 없지만, 그들의 힘이 응집될 때는 가진 자들도 두려워할 엄청난 힘을 소유하게 된다.

말하다보니, 민중 저항을 통한 사회 개혁 쪽으로 흐르는 것 같은데, 내가 말하고자 함은 결코 그것이 아니다. 사회 통합과 화합의 가능성의 장을 열고 싶은 것이다. 오늘 날 시대는 그 누가 뭐라고 해도 풍요와 번영의 시대인 것은 확실하다. 전세계에서 생산하는 식량은 전세계인들이 배불리 먹고도 남을 만큼의 풍부한 양이다. 다만, 그것이 필요한 곳에 원활히 흘러가지 못하는 사회구조의 문제라고 본다. 왜냐면 그런 사회구조를 만들고, 또 운영하는 사람들 또한 갑의 입장이기 때문에 그렇다.

겸손이라는 것은 결코 낮은 자의 것이 아니다. 낮은 사람은 어째도 낮을 수밖에 없다. 대신에 참된 겸손은 높은 자의 것이다. 마치 예수그리스도가 모든 권세와 영광을 입으신 분이지만 종의 모습으로, 즉 낮은 자의 모습으로 이 땅으로 오신 것처럼 말이다. 높은 자가 낮아지는 것. 노블리스 오블리제. 그것이 오늘 날 사회에 가장 절실히 필요한 가치며 노력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본에 대한 인식이 바뀔 필요가 있다. 물질과 재물에 대한 관점이 바뀔 필요가 있다. 재물이 우상이 될 수 없다. 재물이 힘이 될 수 없다. 이 사회는 자본이 아닌 다른 것으로 그 기반을 두어야 한다. 재물은 수단과 도구가 될 뿐 그것이 목적이 되어서는 안된다. 기업의 참된 윤리는 이윤창출로 그치는 것이 아닌, 이윤창출을 통한 사회의 질적 양적 발달을 꾀하는 것, 즉 사회로의 환원이라고 볼 수 있다.

소위 우리가 일컫는 미국 사회가 처음 들어설 때, 미국인의 정신은 적어도 이렇지 않았다. 남을 죽여서 내가 더 많은 돈을 축적하는 사회. 그런 사회를 꿈꾸지 않았다. 저마다 일할 자리가 있고, 주어진 위치에서 열심히 일하고, 먹고 사는데 넉넉한 안정된 수입을 받으면서 더 살기 좋고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서로서로 화합하고 협력하는 것이 바로 그들이 꿈꾸던 사회였다.

한데, 이 사회가 왜 이렇게 변질되었느냐.
결론적으로 이 사회의 정신이 변질되었기 때문이다.
결코 썩어질 것으로 우리의 정신과 사회의 기반을 두어서는 안된다. 비록 눈에 보이지는 않더라도 사랑과 평화를 기반으로 이 사회가 일어서야 한다.

결국 그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이요, 성경적 가르침 아닌가.
왜 미국은 더 이상 성경을 사회의 기반으로 두지 않는가.
진리가 너무나도 필요한 시점이다.

Religulous, 2008



신은 없다Religulous

Bill Maher 의 작품. 이 사람은 처음 보고, 처음 들어본 사람엔데, 미국에서는 꽤 인지도가 있는 사람인 듯하다. 실제로 종교분야에 지식도 많이 갖춘 지성인, 하지만 어떻게 해서든 종교를 해체하고 부정해보려고 시도하는 극진 무신론자. 그의 이야기는 앞으로 기독교 목사가 되려는 나로서 반드시 이해하고 준비되어야 할 내용들을 다루고 있다.

생각나는대로 정리해보자. ,
예수님이 부활하신다고 기록되어있는데, 막상 다시 오실 것이라고 예언한 장소 – 메기도 – 는 보잘것없고 허름하기 짝이 없음. 주변에 아무도 살지 않는 황량한 장소.
목사나, imma나 유대교 랍비들 중 어느 누구도 화자의 질문에 제대로 답을 하지 못함. 안타까움. 자신이 무엇을 믿는지에 대한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성찰이 없음. 그냥 믿으니까 믿는 것. (물론, 그것이 믿음의 입장에서는 축복. Cf.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
폭력과 종교의 상관관계 – 종교와 정치는 뗄 수 없는 관계 – 신앙이 과해지면 폭력적으로 빠지기 쉬움 – 종교의 위험성
종교는 허구의 산물 – 산타클로스를 믿는 믿음과 별반 다를 게 없다는 논리.
예수님 생애 기록과 비슷한 기록들을 가진 신화적 인물들은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게다가 예수님 기록보다 더 이전에 기록된 내용들. (ex. 성령으로 잉태. 기적들을 베풀고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함.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지만 삼일만에 다시 부활하시는 이야기.) 정말 너무나도 비슷함. 이것들에 대해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예수님에 관한 기록들이 단순히 신화에 불과하다면? 그리고 어쩌다보니 단지 사람들의 상상과 지식과 이성들이 한데 어우러져버린 하나의 소산물이라면? (Cf. 영국에 한 마을 산자락에 언젠가 어떤 남자형상의 아웃라인을 커다랗게 그려놓았는데 (커다란 성기도 포함하여) 그것이 그 곳 마을 사람들에게 점점 더 익숙하게 되어 정확히 누군가가 그곳에 그것을 그렸는지는 모르지만 이제는 그곳 마을 사람들에게 많은 의미를 주고, 실제로 그것을 계속해서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게 된다는 실제 일화)
의심은 신앙인seekers들은 당연히 품게되는 것? 의심많은 도마. 의심하지 않고 믿는 사람이 복되다.
자신이 믿고 있는 것을 침해 받는 것에 대해 상당히 혐오하거나 극도로 방어적으로 되는 모습을 보게 됨. 믿음의 매카니즘. 사람은 자신이 마음 속으로 yes라고 한 것은(받아들인것은) 그것이 객관적으로 틀리든 맞든 계속해서 그것이 맞다고 생각하려는 경향이 있음. 반대로 마음 속으로 no라고 했을 경우, 설령 그것이 정말 맞다고 할지라도 계속해서 틀린 것이 맞다고 생각하려는 경향을 보게됨. 자존심 문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문제. 또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기적들의 실체. 기독교인 중에 혹은 기독교인이 되는데 결정적으로 계기가 된 소위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느니, 환상을 보았다느니, 아니면 기적들을 체험하였다는 것 등의 실체가 무엇일까. 결코 증명할 수 없는 문제. 개인적인 문제. 개인적인 믿음의 문제. 자신이 하나님 음성을 들었다면, 혹은 하나님을 직접 만나서 대면했다면, 혹은 그 어떠한 것이든 제 3자가 객관적으로 증명하거나 이해할 수 없음. 만약에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모세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강을 두 갈래로 가른다거나, 정말로 물 위를 걸어다닌다든지, 보리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여명을 먹이고 열두 광주리가 남는다던지,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된다던지, 혹은 죽은 사람을 살리거나,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것과 같은 기적을 제 3자가 보지 않는 이상, 결코 믿기 힘든 부분. 다만, 성경에 나온 기록들을 사실로 이해하고, 2천년 전에 우리와 똑 같은 오감을 지닌 사람들이 실제로 보고 듣고 체험한 바를 가지고 사실 그대로 기록했다고 이해하고 믿는다면, 그 사람들의 간증?이 결국 우리의 믿음의 바탕이 되는 것임. 하지만 오늘날에도 그와 같은 동일한 능력이 임하지 않음. 오늘 날에 기독교들이 말하는 기적이란, 영화에서도 짚었듯이, 자신이 비오게 해달라고 했는데 말한지 10초도 되지 않아 실제로 비가 내린다든지 하는 맥락. 그것이 정말 하나님께서 나의 기도를 응답하신 기적인지, 아니면 단순히 우연의 산물인지. 이 역시도 믿음의 영역. 단순히 우연의 산물로 볼 수 도 있고, 실제로 하나님이 하셨다고 볼 수 있음.
이런 맥락이라면, 아무튼, 기독교는 어찌저찌하든 결국 히브리서 11:1절 말씀처럼,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임.
따라서 종교를 인간의 상상의 (허구의) 산물이라고 볼 수 있고, 또 한편으로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숭상하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믿음을 통하여서 실제로 생명을 얻고, 삶의 의미를 찾고, 어둠에서 빛을 경험하는 능력이 임함. 그 믿음이 잘못된 방향으로 빠지면 과격해지고 폭력을 일으키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믿음의 문제라기 보다는 그 믿음을 가지는 인간들의 (특히 소위 리더들이라는 사람들의) 잘못된 인도로 인한 것이라고 봄.

또한, 개인적인 기적 체험을 통해 소위 자신이 예수님 다음의 예언자라는 등의 말씀을 하나님께서 하시고, 또 무슨 증거까지 보여주셨다고 주창하며 새로운 종교를 만드는 경우도 종종 보게됨. (cf. 몰몬교. 신천지 등) 이에 대해 한 마디 할 수 있는 것은 요한 1서에 거짓 선생들을 구별할 수 있는 방법은 그 선생의 가르침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가 있느냐 없느냐. 즉,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서만 구원을 받느냐 못받느냐 문제를 다루는 것이 핵심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뜻.
자신이 예수님 다음이라느니, 그래서 자신의 말이 곧 예수님 말씀처럼 진리라느니, 혹은 자신이 다시 오신 예수님이라느니 라는 식의 주장은 결코 넘어가서는 안되는 논리. 그런 기적이나 환상체엄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사탄의 장난? 유혹? 예수님께서도 공생의 삶 전에 광야에서 사탄으로부터 시험을 받으실 적에 자신에게 절하면 세상 모든 것을 주겠다는 유혹을 받으셨지만 넘어가지 않으셨음. 결국, 예수님으로부터 배울 수 있는 것은 전적인 자기 부인.

좋아서만든영화, 2009




영화 자체의 작품성보다는 영화의 내용이 나를 사로잡게 만든다. 열정... 이 단어는 오늘도 다시금 내 심장을 쾅쾅 두드린다.

과연 내가 하고 있는 일을 좋아서 하는가. 좋아하고 있는가. 몰입하고 있는가.

부당거래, 2010

류승완 감독
황정민 류승범 류해진 천호진 마동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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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히 떠오르는 명대사는 없다. 하지만 영화자체가 충분한 반향을 일으킨다.

부당거래. 이 영화는 오늘 날 자행되어지고 있는 세태에 대해 적나라하게 꼬집고 있다. 물론, 과장한 면이 없진 않지만 영화 특성상 극화시키는 것은 문제제기를 하기 위한 효과적인 방법 중 한가지다.

부패한 공권력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일단 차치해 놓고, 내가 짚고 넘어가고 싶은 부분은 최철기 반장(황정음)이 왜 부패권력 혹은 부당거래에 가담했느냐이다. 이해가 되면서도 가장 안타까운 부분이 바로 그 대목이었기 때문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그의 부하들이 그를 죽이고는 계급장을 떼면서 이것 때문에 그랬냐고 따져 물을 때 나의 가슴 또한 많이 아팠다. 계급장이 무엇이길래 아끼고 사랑하는 후배도 잃고, 또 그들의 신뢰도 잃고 말이다. 그렇게까지 하면서 계급장에 목숨을 걸어야 했는가 말이다.

강국장이 최철기를 설득할 때 했던 말이다.
"이번 일만 잘 처리되면은 그동안 없던 줄이고 빽이고 한번에 생기는 거야. 임마, 경찰대학 나와서 맨날 줄잡아 봐라. 경찰대학 그거 결국은 줄기거든, 근데, 이거는 뿌리랑 쁘라치되는거야. 다이렉트로... 야임마, 너도 너지만, 이제 대호하고 너네 팀애들 앞날도 생각해야되지 않겠냐? 응?"

누군들 높아지지 않으려고 할까. 누군들 더 많은 힘을 가지고 싶지 않을까. 정말 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다 동일한 욕망을 소유하고 있다. 최철기 반장도, 주 검사도, 장석구 사장도, 김양수 회장도, 강국장도, 그리고 기자양반도 마찬가지였다. 모두다 한 방향, 한 마음이었다. 더군다나, 강국장이 끝자락에 했던말, "너도 너지만, 너네 애들도 생각해야지." 이 대목이 - 적어도 내 생각에는 - 최반장의 마음을 뒤집었을 것이다. 사람은 자신에게 딸린 사람들(식구, 친구, 후배 등)을 생각하면 더 약해진다. 아마도 한 가지 이유가 그들을 핑계로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 합리화하기 쉬워지기 때문일 것이다.

욕망Desire을 가지는 것 그것은 부정적인것이 아니다. 그것이 진정 인간다운 모습니다. 다만, 욕망의 끝이 어디에 있느냐가 중요하다. 가장 핵심을 말하겠다. 욕망의 궁극적 지향점이 하나님이 아닌 썩어져버릴 세상 것이 될 때 사람들은 공허함과 허무감으로부터 자유할 수 없다. 하나님이 바로 진리다. 그리고 그 진리는 우리를 진정 자유케하는 힘이 있다. 그리고 그 진리를 붙들때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까지 살리는 생명력이 있다.

다만, 이 놀라운 진리를 앞에 놓고도 사람들의 눈이 어두워지고 귀가 막혀서 진리를 보거나 들어도 무감각해져 버린 것이 문제다. 저마다 여전히 썩어져버릴 것들을 의지하고, 그것을 궁극적인 지향점으로 삼고 아둥바둥 살아가고 있다. 그것의 결말을 이 영화에서 보여주지 않는가. 아니, 우리 주변에서도 그러한 삶의 결과가 어떠한지 보고 있지 않은가. 왜 머리로 아는 것을 실제 삶으로 살아내지 못하는가. 그것이 문제 중에 문제라고 생각한다.

진리를 궁극적 욕구로 삼고 살아가는 우리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Hotel Rwanda, 2004

가슴 아픈 영화였다. 그리고 오늘 날에도 여전히 이런 일들이 자행되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더 가슴을 치게 만든다. 이런 현실 속에서 과연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영화는 1994년 르완다에서 일어난 후투족과 투치족간의 민족혈쟁을 다루었다. 벨기에 식민지 당시, 투치족이 벨기에로부터 단순히 그들과 조금 더 닮았다는 이유로 - 콧구멍의 크기(그래서 콧구멍의 크기도 자로 쟀다고 한다) 등 - 특혜를 입었고, - 실제로는, 벨기에가 문화식민정치의 일환으로 특수 계층을 선별하여 정치적으로 이용한 것이었다 - 그런 특혜를 입은 투치족은 같은 민족인 후투족을 탄압하는데 일조하고, 경제적으로 이익을 착복했었다. 후에 후투족이 정치적인 힘을 가지게 되자, 과거에 있었던 원한을 갚기 위해 투치족을 대량으로 인종살상하는 대비극이 벌어진 것이다. 이 때 당시, 목숨을 잃은 사람이 약 백만명 - 르완다 전체 인구의 20% - 에 달한다고 하니, 실로 통탄하지 않을 수 없다.

원한이 무엇인지, 정치적 힘이 무엇인지, 인간의 더럽고 추잡한 모습을 다시금 상기시켜주는 영화였다. 그리고 여전히 이러한 인간의 죄된 속성이 세계 곳곳에서 - 수단, 북한 등 - 자행되어지고 있다는 점이 내 심장을 부끄럽게 한다.

영화에서 인상적인 대목은 이것이었다. 종군기자가 대량학살하는 장면을 촬영하고 전세계로 방송을 내보내자 주인공 폴 루세사바기나Paul Rusesabagina는 그 기자에게 희망에 찬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이제 전세계 사람들이 우리의 비극을 보고는 도와주러 오겠군요." 그러자 종군기자는 안타까워 하는 목소리로, "음... 아마 그들은 TV를 보면서 눈살을 찌푸리며 이렇게들 말하겠죠. "It's horrible." 그리고는 먹던 저녁을 마저 먹고 있을껍니다."

이것이 바로 현실이 아닌가 싶다. 머리로는 알아도 실제 행동으로 옮기는 경우가 적다. 진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진리가 무엇인지 머리로는 알아도 실제 행동으로 그렇게 살지 않는다. Leonard Sweet 교수가 지적했듯, 오늘 날의 크리스찬은 thought experience는 너무나도 많은데 lived experience는 없다는 말이 다시금 와 닿는다. 세계 곳곳에, 그리고 가까이 내 주변에도 부정과 비리가 난무하지만서도 거기에 대해 담대하게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실정, 제 편하고, 먹고살기 바쁜 모습이 바로 내 모습이 아닌가 싶다.

진리 앞에 목숨이 무엇이 아까울쏘냐. 하나님보다 세상에 그 무엇이 아까울쏘냐 말이다.

영화를 보면서 다른 무엇보다 내 자신을 많이 반성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물론, 바른 생각을 가지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열심과 열정만 있는 것도 매우 위험하기 때문이다. 다만, 오늘 날에는 진리에 목숨을 바칠 수 있는 열성이 절실하다고 확신한다. 구체적으로 당장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다만, 지금 내 심장이 뛰고 있으면, 즉 생명력이 있으면 일이 생겼을 때 언제든 뛰쳐 나갈수 있을 것이다.

마가복음 13:9-13,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사람들이 너희를 공회에 넘겨 주겠고 너희를 회당에서 매질하겠으며 나로 말미암아 너희가 권력자들과 임금들 앞에 서리니 이는 그들에게 증거가 되려 함이라. 또 복음이 먼저 만국에 전파되어야 할 것이니라 사람들이 너희를 끌어다가 넘겨 줄 때에 무슨 말을 할까 미리 염려하지 말고 무엇이든지 그 때에 너희에게 주시는 그 말을 하라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요 성령이시니라. 형제가 형제를, 아버지가 자식을 죽는 데에 내주며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하리라.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아저씨, 2010

이정범 감독

원빈 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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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들은 내일을 보고 살아가지? 나는 오늘을 보고 살아간다. 그게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 보여주겠어."

"너 정체가 뭐냐?" "나..... 옆집 아저씨"

In the Matter of Cha Jung Hee | Trailer

Keyword: Root(Family;blood), Identity

본래 '강옥진'이라는 인물이 '차정희'라는 인물로 살아가게 되면서, 자신의 정체성과 뿌리에 대한 질문을 다룬 휴먼 드라마.

이를 보면서 들게 된 생각은,

1. 사람은 '뿌리'를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것. 자신이 태어난 곳. 자신을 태어나게 해준 부모님. 자신이 자라온 곳. 수구초심.

2. 그 뿌리를 알려는 노력은 자신의 '정체성'을 알기 위한 노력에서인지, 자신의 '정체성'을 이해하기 위해 '뿌리'를 알려는 노력을 하는 것인지. 혹은 그 둘다인지. 아무튼, 무엇이 먼저가 되었든 그 둘은 상당히 밀접한 관계에 있다.

3. 강옥진이 차정희가 된 사유가, 그리고 그로 인해 강옥진이란 인물이 그토록 마음의 고통(?) 혹은 혼란을 안게 된 이유가, 한 사람(사회봉사가)의 순간적인 판단으로 인한 것이었음. 나비효과. 그보다도 매 순간 판단과 결정을 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척도는 '진실'과 '사랑.' 그 당시 사회봉사가가 비록 자신이 손해를 입는다고 할지라도 '진실'을 추구했더라면, 그리고 강옥진이라는 아이를 진정 '사랑'했더라면 어떤 결과가 나왔을까 싶다. 다만, 사회가 대부분 그렇게 흘러가지 않는다는 것. 그 속에서 '진실'과 '사랑'을 추구하는 것은 바보같기만 한 행동일까?

꿈은 이루어진다, 2010

계윤식 감독

이성재, 최지연, 강성진, 정경호, 유태웅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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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누군가가 이 영화 얘기를 했다. 내용을 대충 듣기로는 2002년도 한일월드컵 당시 북한 사람(군인)들이 한국에서 중계하는 라디오 방송을 듣는다라던지, 사선을 넘나드는 DMZ에서 남한 군인들과 함께 축구를 한다는 등지의 이야기가 나온다는 것이다. 다소 뚱딴지 같은소리긴 했으나 흥미를 끌기에는 충분했다. 그래서 오늘 주저않고 바로 영화를 보게 되었다.

지금까지 한국 영화 중에는 북한과 관련된 영화가 많이 있었다. 그러나 항상 그 내용은 남한의 입장에서 북한을 바라보는 관점이 주를 이뤘던 것으로 기억한다. 대표적으로 1998년도에 '쉬리', 그리고 2000년도에 개봉한 '공동경비구역(JSA)' 역시 사랑과 민족의 정(情)이라는 소재를 이용하여 남북간의 안타까운 분단 현실에 대해 조명했었다. 그러나 두 영화 모두 여전히 남한의 시각이라는 한정된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 영화였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2008년도에 본 '크로싱'이라는 영화는 북한을 바라보는 내 눈을 확 뜨이게 해 준 파격적인 영화였다. 말로만 듣던 북한의 비참한 현실이 영상을 통해 내 뇌세포 하나하나에까지 전율과 감동을 안겨 주었던 것이다. (역시 영상의 힘이란 실로 놀랍다.) 그 영화는 - 내가 본 것 중에서는 - 이전까지 남한에서 만들던 남북관계를 소재로 하는 영화와는 달랐다. 남한이 아닌 북한의 관점에서 만들어진 영화였다. 이는 아마도 그동안 남북경제협력(개성공단, 금강산 사업 등)이라든지의 여러가지 경로를 통해 문화적, 정치적, 경제적, 교육적 측면 등에서 활발한 교류가 이뤄짐으로서 가능해지지 않았나 생각해본다. 더군다나, 벌써 약 20,000명이라는 탈북자가 한국으로 망명나와 남한 사람들과 어우러져 살고 있고, - 그 중에는 북한 권력 순위 20위였던 황장엽 씨도 끼어있다 - 이 곳, 미국에도 지금 현재 99명의 탈북자가 살고 있다고 하니, 북한 현실에 대해 깊이 있게 알 수 있는 기회가 도처에서 열린셈인 것이다. 얼마 전에 한 탈북 여성으로부터 전해 듣기로는, 영화 '크로싱'에서 묘사된 북한의 실상황이 오히려 더 심하다는 말을 듣기도 했다. 이처럼, 이제는 북한의 입장에서 영화를 만들 수 있을 만큼의 깊이와 가능성이 열린 것이다. 아무튼, 크로싱을 보면서 느꼈던 그 충격과 감동은 여전히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이번 영화 역시, '크로싱'이라는 영화와 그 틀을 함께 한다. 북한의 입장에서 만들어진 영화. 더욱이 2002년 한일 월드컵이라는 남측에게도 역시 친숙한 소재를 사용함으로써 더욱 더 쉽게 영화에 몰입할 수 있게 만들었다. 영화 속에서, 북측 병사들과 남측 병사들이 함께 어우러져 '대~한~민~국!'이라는 응원구호가 아닌, '우~리~민~족!'이라는 응원구호를 함께 외칠 때는 나도 모르게 스크린 앞에서 똑같은 구호를 함께 외치고 있었다. 두 눈시울은 붉어진 채로.

계윤식 감독을 비롯하여 제작자가 무슨 의도를 이 영화를 만들었을까 생각해본다. 아마도 가장 대표적인 이유가 북한에 대해 좀 더 남한 사람들이 열린 시각을 가지게 되기를 소망하는 마음에서 였을 것이고, 분열된 조국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을 자극하여 아마 남한 사람들의 한반도 통일에 대한 희망과 열정을 불러일으키고자 했을 것이다. 그리고 지극히 내 주관적인 추론에 의하면, 이 영화 역시 북한에 들어갈 터이고, 그러면 북한 내부 사람들에게도 당에 대한 불만과 조국 통일에 대한 염원을 호소하는 강장제의 역할을 기대했을 것 같다. 여담이지만, 탈북한 주민들의 증언에 의하면 많은 수의 한국 드라마와 영화 그리고 서양영화들도 대거 북한으로 유입되고 있다고 한다. 한 연구기관에 의하면 북한 전체 주민의 60%가 외부 문물에 노출되었을 것이라고 잠정 추정하고 있다. 물론, 도심지나 국경지역 같은 경우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외부 정보와 접했을 것이다. 재밌는 사례로는, 한 탈북자의 경우, 김래원, 문근영이 주연했던 한국 드라마 '옥탑방 고양이'를 즐겨 봤다고 하고, 한번은 평양에서 영화 '타이타닉'이 일파만파 사람들 사이에서 크게 흥행을 하자 북한 당국에서 '타이타닉'과 관련해서 공식 성명서를 발표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 내용인 즉슨, '타이타닉'은 자본주의의 운명을 선명하게 나타내는 영화로서, 결국 타이타닉 호가 마지막에 가서 두 동강이 나서 바닷속으로 침몰되듯이, 자본주의 역시 그렇게 될 운명이라고 발표했다는 것이다. 아무튼, 이처럼 이 영화 역시 북한으로 넘어가서 북한 주민들이 볼 가능성이 크다는게 내 생각이다.

전체적으로 영화는 잘 만들어졌다고 평가한다. 하지만 동시에 내용 자체가 너무 위험하지 않는가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면, 남북을 한 민족으로 보고, 북한 동포들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는 것은 좋지만, 그와 동시에 휴전현실에 대해 망각해서는 절대 아니되기 때문이다. 지금의 한번도의 현실은 말 그대로 휴전상태다. 전쟁의 참혹한 현실로부터 너무 시간이 오래 흘렀고, 그래서 대부분의 오늘 날 사람들은 전쟁의 기억조차 없으며, 또한 제 살기 바쁘고, 물질 문명 속에 정신없이 허우적 거리다 보니 이러한 현실에 대해 망각할 때가 많아서 그렇지, 그래서 오히려 우리나라 밖에 사람들이 얘기하듯 '안보불감증'에 걸려서 그렇지, 전쟁의 위험은 여전히 도사리고 있는게 현실이다. 그래, 다시 말하지만 그게 현실이다. 그래서 수많은 젊은 남자 청년들이 자신들의 청춘을 희생해서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또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푸른 옷을 입고 총을 들고 밤을 지새워가며 자신과의 싸움을 하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그래 맞다. 우리의 적은 북한의 김정일 예하 당정군이지 북한 주민들은 우리의 적이 아니라는 말은 맞는 말이다. 그래서 사실 '크로싱'이라는 영화는 북한 주민들을 소재로 했기에 좀 더 편하게 방어벽없이 볼 수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이번 영화 '꿈은 이루어진다'는 다르다. 그 소재 자체가 북한 군인들이지 않은가. 물론 북한 군인들도 남한 군인들도 머리로는 얼마든지 우리 모두 한 민족이고, 한 핏줄과 한 뿌리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전쟁이 나게 되면, 그들의 손은 각자 가진 총을 들고서 서로에게 총부리를 겨눌 것이다. 그리고는 '나라와 이념'라는 명목으로 서로가 서로를 죽일 것이다. 따라서 총이 서로의 손에 있다는 것 자체만 보더라도 결코 우리의 방어벽을 허물어서는 안된다.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다.

그래서 군대에서 이 영화를 과연 군인들에게 볼 수 있도록 허용할지 의문이다. 한데 뭐 이미 개봉했다고 하니 방송통신심의위원회에서 벌써 사람들에게 상영 허용을 헸다는 말이고, 그러면 군인들 역시 휴가 나가거나 하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분명히 지적하지만 방어벽 없이 이 영화를 그대로 받아들였다가는 웃기는 꼴이 날 수 있다.

결론을 맺겠다. 이 영화는 잘 만들어 졌으나 사실감은 떨어진다. 북한 사람들을 좀 더 이해할 수 있고, 분단된 현실에 대해 안타까운 마음을 자극해주며 조국 통일에 대한 희망과 열정을 적절히 불러일으킨다는 것에는 이견이 없다. 다만, 코믹스럽게 영화를 만들다보니 사실감이 떨어지며, 어떻게 보면 환타지같은 느낌까지 든다. 아마 감독이 자신의 희망사항을 표출한 것으로 생각된다. DMZ라는 땅이 결코 함께 어우러질 수 없는 지역이 아닌, 그곳에서 함께 축구도 할 수 있고, 함께 응원하면서 축구 경기도 시청할 수 있는 그런 기적이 일어나기를 바라는 그런 감독의 희망일 것이다. 마치 2002년도에 대한민국 온 국민의 꿈, 16강 진출이 이뤄지고, 더 나아가 4강까지 올라가는 기적이 일어난 것처럼 말이다.

나 역시 그런 기적적인 조국 통일의 꿈, 그리고 DMZ에서 북한 사람들과 함께 아무런 죄없는 공을 차면서 서로의 어깨를 부딪치면서 웃을 수 있는 날이 어서 속히 오기를 간절히 소망하고 기도한다.

Orphan, 2009



Director. Jaume Collet-Serra
Cast. Vera Farmiga, Peter Sarsgaard, Isabelle Fuhr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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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nt some tensions? I recommend it!! It's a good twisted movie!

My recomendation for the good twisted movies ever!!

★★★★★ - Saw(2004)

★★★★☆ - Orphan(2009), The Usual Suspects(1995), Identity(2003)

Turtle: The Incredible Journey, 2009

바로 정리를 했어야 하는데, 시간이 조금 지났다. 그래서 영화를 보면서 쓰고 싶었던 내용이 있어는데 기억이 불투명해졌다. 그렇다고 영화를 다시 보는 것은 무리일 것 같다는 생각이고, 그냥 최대한 기억을 더듬어서 쓰는게 좋겠다.

자연 관련 영화 또는 다큐멘터리는 언제 보아도 흥미진진할 뿐더러 감동까지 있다. 동물이나 자연의 자연스런 광경만 보아도 그 속에 수많은 배울점과 느낄점이 있기 때문이라고 본다. 거짓이 없고 진실된 그들의 모습을 보면 나 또한 진실해지지 않을 수 없음을 느낀다.

이번 영화의 경우 '바다거북'이라는 하나의 객체를 놓고 집중적으로 다뤄준다. 영화는 바다거북의 출생, 성장, 출산, 죽음 등의 과정을 순차적으로 조명해 주고 있다.

먼저 생각해 보고 싶은 부분은, 거북이가 탄생한 후에 누가 알려준 것도 아닌데 바로 바다로 뛰어들어가는 장면이다. 태어난 곳에서 바다까지의 거리는 불과 수십미터. 하지만 그 짧은 시간 동안 수많은 새끼 거북이들이 갈매기나 게와 같은 무리로부터 사냥을 당해 죽음을 당하는 것을 보게 된다. 하지만 그렇게 허무하게 죽어도 어느 거북이도 그 죽음에 대해 통곡하는 모습을 찾아 볼 수 없다. 그냥 '죽으면 죽는가보다.'하는게 거북이들의 모습이다. 물론 살기 위해서 발버둥 치기는 한다. 열심히 도망다니고 필사적으로 바다로 뛰어들어간다. 하지만 채 꽃도 피워보기 전에 허무한 죽음을 맞게 되더라도 어느 거북이 하나 거기에 대해 일체 반항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그냥 모든게 자연스럽게 흘러만 간다.

이 모습을 생각하면서 동시에 어제 봤던 드라마 '나쁜남자'가 떠올랐다. 자신의 부모와 자신이 아끼던 한 여자의 죽음에 대해 분노심과 적개심이 불타올라, 그들을 죽음으로 몰고 갔던 장본인들을 향해 계란으로 바위치는 격이 되더라도 무조건 복수를 하겠다는 즉, '와신상담'하는 내용이었다. 비록 극중 주인공이 자신이 지금 하고 있는 행위가 나쁜 것임을 알지만 복수심에 사로잡혀 있다보니 벌을 받더라도 복수는 하고 벌을 받겠다고 말하는 지경에 이르게 됨을 볼 수 있었다.

형사가 복수를 하려는 그를 막기 위해 이런 말을 했다. "부모님이나 누나가 당신이 복수해 주기를 원할까요?" 그러자 그는 이렇게 대답한다. "무슨 상관이에요. 어차피 그들은 다 죽었는걸요." (정확한 대사는 아니다.) 즉, 다 죽었기 때문에 자신이 복수를 해 주길 원하거나 원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 논리라면 사실 그가 복수를 하려는 것은 부모나 누나를 위해서라기 보다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라는 것이 맞다. 자신의 자존심을 살리기 위한 몸부림인 것이다.

또한, 어제 본(어제 영상을 좀 많이 봤다) '모범시민'이라는 영화 스토리 라인도 이와 비슷하다. 자신의 아내와 딸이 강도로부터 허무하게 살해당하자 10년이라는 긴 시간동안 철저하고도 치밀하게 계획하여 세상에 반항하며 복수하는 내용이었다.

정리하면, 사람은 죽음에 대해 그리고 특히나 허무한 죽음에 대해서는 통분하기 마련이다. 거부반응을 일으키고, 화를 내고 분노를 표출하는게 자연스럽고 인간적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이것이 바다거북이와 극명하게 대조되는 부분이다.

하지만 적어도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있다면 거북이와 같아야 하지 않느냐는게 내 생각이다. 왜냐하면, 주신자도 하나님이시고 다시 취하신 자도 하나님이신데, 왜 인간인 우리는 하나님이 다시 취해 가실 때마다 이렇게까지 심한 격분에 잠겨야 하는가 말이다. 원인이 어떻게 되었든, 어떤 죽음이 되었든 거북이와 같이 초연한 자세로 살 수는 없는가? 그것은 비인간적인 것인가? 인간적이라는 것은 무언가 도대체? 너무 추상적인가? 그럼 적어도 기독교적 관점에서 본 인간적이라는 것은 무언가?

거북이도 인간도 똑같은 피조물 아닌가? 물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받은 특별한 존재이긴하다. 그럼에도, 하나님이 창조주라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 하나님과 인간 과의 관계가 틀어진 장본인인 선악과 사건에서 보아도 모든 인류의 죄악은 인간이 하나님과 같아지려는 욕망에서 나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창조주와 피조물과의 관계 혹은 질서가 흐트러진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과연 인간이 자신의 교만함, 자기중심적 사고, 자존심을 뿌리 뽑을 수 있겠는가 말이다. 물이 엎질러지면 다시 되담을 수 없는 것 아닌가. 선악과를 먹었으면 이미 먹은 것 아닌가. 물론, 이 때문에 예수님이 오셔서 그러한 잘못된 관계를 바로잡을 수 있는 길을 제시하고 가셨지만 지금의 생각 같아서는 과연 그것이 가능한지 의문이다.

그래도 기독교인으로서 인간의 몸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그것을 가능하게 하셨으니, 나 역시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믿고, 또 그대로 따라 살도록 해야할 것임을 재강조한다. 나 자신에게.

차마고도, KBS

차마고도 [茶馬古道] 차(茶)와 말을 교역하던 중국의 높고 험준한 옛길.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교역로이며 이 길을 따라 중국의 차와 티베트의 말이 오갔다.

실크로드보다 200여 년 앞서 만들어진 인류 최고(最古)의 교역로로, 중국 서남부에서 윈난성[雲南省]·쓰촨성[四川省]에서 티베트를 넘어 네팔·인도까지 이어지는 육상 무역로이다. 윈난성·쓰촨성의 차와 티베트의 말을 교환했다고 하여 차마고도(茶馬古道)라는 이름이 붙었다.

한나라 이전인 기원전 시기에 중국 서남부 윈난성·쓰촨성에서 생산된 차와 티베트의 말을 교역하기 위해 형성되었고 당·송 시대를 거치면서 번성하였으며 이후 네팔, 인도, 유럽까지 연결됐다. 1000년 전 티베트 불교가 티베트의 주도인 라싸[拉薩]에서 윈난·쓰촨 지역으로 전래되기도 했다.

길이가 약 5000㎞에 이르며 평균 해발고도가 4,000m 이상인 높고 험준한 길이지만 눈에 덮인 5,000m 이상의 설산(雪山)들과 진사강[金沙江], 란창강[瀾滄江], 누장[怒江]이 수천㎞의 아찔한 협곡을 이루어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로 꼽힌다. 세 강이 이루는 삼강병류 협곡(Three Parallel Rivers of Yunnan Protected Areas)은 2003년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자연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이 길을 따라 물건을 교역하던 상인 조직을 마방이라고 하는데, 수십 마리의 말과 말잡이인 간마런으로 이루어지며 교역물품은 차와 말 외에 소금, 약재, 금은, 버섯류 등 다양했다. 근대 들어 차마고도를 따라 도로가 많이 건설되었지만 아직도 일부 마방이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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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로서도 : 새와 쥐만 다닐 수 있을만큼 좁은 길이라는 뜻

형제공처 - 두(세) 형제가 한 명의 아내 : 한 명이 마방으로 집을 비울 때, 다른 한 명이 농사를 같이 하며 안전을 지킬 수 있기 때문.

*노부상부 - 중국과 티베트 마방의 길을 연 전설적 상인. 8번째 장삿길에서 실패하고 돌아오다가 풀에 오르는 개미를 보았다. 그 개미는 8번 실패한 후 9번째 성공했다. 그 때, 신이 나타나 '네가 실패한 이유는 종을 달지 않아서이다. 오늘 돌아가서 큰 종을 만들어 말의 목에 달면 성공할 것이다.'라고 말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종과 방울을 달고 길을 나선 후 교역에 성공했다는 일화다. 이후부터는 마방 길에는 항상 '통로요로'라고 말 두필이 선두에 서며, 종과 방울을 달고 있다.

그렇게 생사고비를 넘겨 차마고도를 건너가서 팔은 돈이 송이 1근에 45위엔, 우리 돈으로 약 5천원. 총 3,500근을 팔아 1,700만원을 받았다. 즉, 일인당 약 100만원인 셈이다. 이 것을 가지고 1년 동안 살게 된다.

아마존의 눈물, MBC

아마존 밀림 가운데 살아가고 있는 원시부족들에 관련된 다큐멘터리다. 현대 문명에 익숙한 내게는 그들의 삶의 모습 하나하나가 너무도 생소할 뿐이다. 불을 피우는 것, 사냥하는 것, 그들의 풍습, 언행, 장식, 생활양식 등등. 특히, 여자 남자 할 것없이 그네들의 생식기가 적나라하게 노출된 것이나 사냥으로 잡아온 각종 동물들 - 사슴, 원숭이, 아마딜로 등 - 의 배를 가르고 내장을 꺼내는 등의 장면이 생생하게 그대로 전달되는 것들을 볼 적에는 반사적으로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었다. 그러면서 나도 모르게 '어으-', '아으-' 를 수도없이 연발했다.

볼 때는 생각지 않았는데, 옷 하나 걸치고 살아가지 않아도 남들의 시선에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는 그들의 모습을 상기해보니 성경 속에 아담과 하와 이야기가 생각난다. 선악과를 따 먹은 후에 인간은 수치심을 느끼기 시작해 옷을 만들어 입었다고 얘기하는데, 왜 이들은 아직까지 옷을 지어 입고 살아가지 않을까 의구심이 생긴다. 더욱이 공동재산이라든지, 공동체생활, 욕심 없이 하루 벌어 하루 살아가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여기가 아직까지 선악과를 따먹지 않은 '에덴동산'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물론, 이들에게도 죽음의 위협은 존재한다. 그래서 불행은 있다. 그러나 소위 찬란한 물질문명의 혜택을 누리고 살아가는 우리들의 삶이 이들에 비해 오히려 더 각박하고, 고독하고, 피폐한 것을 볼 때, 과연 문명의 발전이 인간에게 축복인가 싶다. 안타까운? 것은 이들 부족에게도 이제 조금씩 현대 문명이 침투해가고 있다는 것이다. 더이상 벌거벗고 다니지 않고 티셔츠나 치마 등을 입고 다니는 사람들도 생겨나고, 사냥을 할 적에도 총을 사용한다. 또 자전거나 오토바이도 타고 다니고, 심지어 텔레비전까지 보면서 외부 세계에 대한 동경심을 키워가고 있다. 그들중 어떤 이들은 돈을 벌기 위해 혹은 단순한 호기심으로 도시로 들어가기도 한다고 한다. 아마 이들의 생활 풍습도 지금까지 다른 부족이나 사회와 마찬가지로 머지않아 강력한 현대 문명의 흐름에 잠식될 것이라 예상된다.

원시부족들의 운명처럼, 현재 아마존은 현대인들의 무분별한 벌목으로 인해 산림이 급속도로 훼손되어 가고 있다고 한다. 이런 추세라면 향후 20년 이내에 아마존 전체 산림의 40%가 사라진다고 하니 그 심각성이 엄청나다. 그래서 제목이 <아마존의 눈물>이다.

애석하게도 서글픈 사실은 이 심각한 문제를 어디서부터 풀어나가야 할지 실마리조차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물질문명, 현대문명, 혹은 인간의 이성과 지성의 힘. 그것은 과연 축복인가 저주의 행로인가부터 쉽게 답할 수 없는 부분이다.

바람, 2009


이성한 감독

정우 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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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얼리티

페어러브, 2009

신연식 감독

안성기, 이하나 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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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한다고 말하는 순간 깨달아버렸어. 내가 사랑하지 않는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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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의 딸과의 사랑.

사랑의 범위는 어디까지?

슬픔보다 더 슬픈 이야기, 2009



원태연 감독

권상우(K), 이보영(크림), 이범수(주환) 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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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혼자 있으면 안돼. 누가 있어야 돼.

목에 걸린 생선가시 같애요. 여기서 안 넘어가요.

사람은 손으로 뿐만 아니라 눈으로도 만질 수 있다.

그는 모릅니다. 사랑은 가슴이 아닌 눈으로 보인다는 걸. 그래서 사랑이 보이지 않을때 눈물이 흐른다는 걸.

사랑하는데 말이 필요하다면 벙어리는 어떻게 사랑할 수 있나요.

사람이 사람을 보고 가슴 떨려올 수 있는 건 인생에 단 한번 뿐이라고 했다.

당신을 사랑하게 된 것은 하늘이 나에게 준 숙제입니다.

사랑이 뭐야? 양치질 같은거요. 양치는 혼자하는 거잖아? 그럼 누구 보라고 해요?

결혼은 칫솔통이야. 칫솔통 하나에 칫솔들이 들어가 있잖아.. 같이 있는게 당연한 걸로 알잖아. 그게 결혼이야.

사랑과 감옥의 공통점은 한 번 빠지면 자기 의지대로 나올 수 없다는 것.

해바라기, 2006



강석범 감독

김래원(오태식), 김해숙(양덕자) 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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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내가 10년동안 울면서 후회하고 다짐했는데 꼭 그렇게 다가져 가야만 속이후련했냐!!


사랑? 뭐별건가 행복한 순간의 추억하나만 있다면 충분하지. 기억하고 있다면 사랑은 변하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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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가슴 시린 영화였다. 김래원의 연기도 돋보이고. 잘 참고 인내하다가 결국 분노하게 되는 오태식의 모습을 보는데, 예수님이 갑자기 떠오르면서, 그 분의 인내와 사랑은 비할데가 없구나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내가 오태식이었으면 그보다 먼저 주먹이 나가지 않았을까 싶으면서 나의 한계와 부족을 다시금 느끼게 된다. 끝까지 참고 인내할 수 있는 믿음과 의지.. 그것이 내게 필요하다.

'How to Train Your Dragon, 2010



- 98m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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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eat visual


"Everything we know about them is wrong." -
Even though something that the everyone else think that is right can be wrong. That is the time to be the only one, doing crazine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