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owing posts with label QT. Show all posts
Showing posts with label QT. Show all posts

John 14.1-14 "The way, and the truth, and the life"


Do not let your hearts be troubledBelieve in God, believe also in me. 2In my Father’s house there are many dwelling-places. If it were not so, would I have told you that I go to prepare a place for you3And if I go and prepare a placefor you, I will come again and will take you to myself, so that where I am, there you may be also. 4And you know the way to the place where I am going.’ 5Thomas said to him, ‘Lord, we do not know where you are going. How can we know the way?’ 6Jesus said to him, ‘I am the way, and the truth, and the life. No one comes to the Father except through me. 7If you know me, you will know my Father also. From now on you do know him and have seen him.’ 8 Philip said to him, ‘Lord, show us the Father, and we will besatisfied.’ 9Jesus said to him, ‘Have I been with you all this time, Philip, and you still do not know me? Whoever has seen me has seen the Father. How can you say, “Show us the Father”? 10Do you not believe that I am in the Father and the Father is in meThe words that I say to you I do not speak on my own; but the Father who dwells in me does his works. 11Believe me that I am in the Father and the Father is in me; but if you do not, then believe me because of the works themselves. 12Very truly, I tell you, the one who believes in me will also do the works that I do and, in fact, will do greater works than thesebecause I am going to the Father13I will do whatever you ask in my name, so that the Father may be glorified in the Son. 14If in my name you ask me for anything, I will do it.

역시나 오늘 말씀도 powerful!!! and 알쏭달쏭!!
지난 번 묵상 ... 노숙자를 집으로 데리고 와서 스파게티를 대접하겠다던 나의 결의는 실패로 끝났어.  스파게티까지 만들어 놓고...식탁 setting까지 완료한 다음에 Tenley까지 갔었으니 희안하게 노숙자가 하나도 보이지 않더라고. 대신에 경찰들만 잔뜩 몰려 있는 것이 아마 무슨 일이 일었났던 모양이었나봐. 거의 한 시간 동안 아내와 함께 노숙자 한 명을 데리고 올꺼라고 메트로도 내려가보고 건물 안에도 들어가보고 해보고 심지어 Friendship Height까지 갔었으나 결국 포기하고 말았지.  어디 첫 술에 배부를 수 있겠어?  더 기도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생각하고 다음에는 반드시 말씀 적용할 수 있길 기대해 보아~~ 


오늘 말씀의 키워드는 in, 그리고 second-keyword는 place라고 생각해.  녹색으로 표시한 부분은 헷갈리거나 이후에 추가적으로 더 생각해 보고 싶은 부분이고.

여기서는 keyword 두 개만 생각해볼께. 사실 두 키워드가 서로 연관되어 있는 것 같아.

일단, 오늘 본문에서 in 이라는 전치사가 총 19번 나오는데 12절에 in fact에 들어가는 in을 제외시키면 18번에 걸쳐 나오는 in이 모두 같은 의미를 담고 있다고 볼 수 있어. 즉, 예수님께서 하나님 안에 있고 하나님이 예수님 안에 있다는 것. I am in the Father and the Father is in me. 우리 역시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고, 또 하나님께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오직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어.  더욱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예수님이 하셨던 일들 - 영혼 구원, 생명 구원 - 역시 할 수 있다고 기록하고 있지. 그렇기 때문에 믿음은 행위로 알 수 있다는 말씀도 나오는 것이고. (야고보서) 

여기서 in의 의미를 좀 더 살펴보고 싶은데, 막연히 혹은 추상적으로 "안에 있다"라고 생각하면 안 될꺼 같애. in 이라는 단어에는 기본적으로 항상 두 가지 대상을 내포하고 있지 않나 싶어. 들어가는 대상이 있으면, 들어가게 될 대상이 있지. 쉽게 생각해서, 내가 이번에 한국에 간다고 하면, 일단 "나"라는 존재가 있고, 또 "한국"이라는 대상이 있지. 또는, 악어가 강에 들어간다고 말하면, "악어"라는 대상과 "강"이라는 대상이 있고 말야. 정말 당연한 소리지만 여기서 중요한 점은 어떤 하나의 대상이 다른 대상으로 들어가게 될 경우, 들어가는 대상은 들어가게 될 대상의 속성에 맞춰야 하는 필연적인 결과가 일어나게 돼. 즉, 내가 한국에 들어가면, "나"라는 존재는 한국이라는 나라가 가진 기후, 환경, 문화, 언어, 법, 등에 맞춰야 하고, 악어가 강에 들어가면, "악어"라는 대상은 강이 가지고 있는 속성, 즉 부력, 물의 흐름, 물의 온도, 등등에 맞춰야 하는 것처럼 말야. 따라서 내가 예수님 안에 있다는 말은 단순히 지나쳐버릴 추상적인 표현이 아니라, 예수님꼐서 가진 속성에 나를 맞춰야 하는 필연적 사건이 일어나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도 너희가 내 안에 있으면 내가 했던 일들을 너희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고. 이전 장에서는 포도나무 가지의 비유를 통해 말씀하셨던 것이고 말야. 그렇기 때문에, 역으로 생각해서, 내 삶에 아무런 변화가 없고, 예수님이 보이셨던 열매가 내 삶 속에는 맺히지 않는다면 내가 과연 예수님 안에 있는지 깊이 있게 반성해 보아야 한다고 생각해. 예수님께서도 교회만 다닌다고, 주여주여 입으로 외친다고 하늘나라에 가지 못한다고 말씀하셨잖아. 

또 여기서 한가지 더 주목할 점은 예수님이 하나님 안에 있고, 하나님이 예수님 안에 있다는 말은 둘의 객체가 같은 존재가 아닌 이상 성립될 수 없는 표현이라고 생각해. 왜냐면, 첫째, in의 개념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들어가는 대상은 부분이 아닌 전체가 되어야 하는 것이고, 둘째,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을 빌리자면, 모든 대상은 저마다의 고유한 속성을 가지고 있는데 (substance) 그 속성은 다른 대상과 결코 대체가능할 수 없기 때문이지. 즉, 나라는 사람과 한국이라는 나라가 결코 동일 할 수 없듯이 말야. 물론, 특성 (accident) 이 같을 수는 있지. 예를 들어, 한국말이라든, 한국의 문화라든지 한국인인 나와 한국이라는 나라가 공통적으로 지닐 수 있는 특성은 있지만 그럼에도 앞서 얘기했듯이 두 대상이 결코 같을 수 없다고 봐야해.  따라서 어떤 대상 A가 다른 대상 B에게 포함될 때에는 A라는 대상 전체가 전혀 다른 속성을 지닌 B에게 포함된다는 의미인데, 그 B의 전체가 다시 A에 포함된다는 말은 A와 B가 같은 대상(substance)이 아닌 이상 성립 될 수 없는 표현이라고 봐. 따라서 이 본문은 예수님이 곧 하나님이라는 Christology를 밝히는 부분이라고 생각해.

그리고 두번째 키워드 place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 싶은데, 예수님께서 아버지 집으로 가시는 것은 그곳에 사람들이 거할 곳place을 마련하시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셨어. 그렇기 때문에 거처를 마련하신 후에는 다시 우리에게로 돌아오겠다고도 말씀하셨고.  그런데 여기서 아버지 집이란 과연 무엇이고 또 어디일까?  같은 질문을 (의심많은...좋게 얘기하면 이성적인) 도마도 했어. "거기가 어딘가요?  우리가 거길 어떻게 알고 가나요?"  여기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아는 구절,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자가 없느니라."라고 대답하셔. 정말 아리송송하지. 확답은 아니겠지만 예수님의 대답을 통해 내가 이해하는 바로는, "아버지의 집"이란 물리적, 수학적 공식이나 이성적, 개념적 위치로 이해한다기 보다는 오로지 예수그리스도를 믿어야만 알 수 있는 믿음의 영역이 아닐까 싶어. 그렇다고 "아버지의 집"이라는 것이 실체가 전혀 없는 몽유적인 개념이 아니라 실제로 존재하지만 그곳에 갈 수 있는 방법은 오로지 "믿음"에 의해서만이라고 이해해보아.  다시 말하면, 목적지가 분명히 있는데 그곳에 가는 길은 일련의 논리적, 사유적 개념으로 만들어진 지도를 통해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또는 그 분 안에 우리가 들어갈 때in, 그 길을 우리도 걸어갈 수 있고, 결국엔 아버지의 집까지 갈 수 있다는 말이 아닐까. 또는, 예수그리스도라는 (색)안경을 써야만 보이는 길이라고도 이해해 볼 수도 있고. 

어찌됐든,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집에 우리의 거처를 마련하시기 위해 가셨다고 다시 오신다고 약속하셨어. 예수님이 우리의 거처를 마련하기 위해 가신 그 길은 흔히 아는 십자가의 길, 죽음의 길, 그리고 부활의 길이었어. 다시 말하면, 죽어지지만 다시 사는 것, 썪어지지만 열매맺는 것을 나타내지.  따라서 아버지의 집이 무엇을 그리고 어디를 지칭하는지는 모르지만 한 가지 추론해 볼 수 있는 것은 우리가 거할 곳엔 생명이 있고, 열매가 있는 곳이 아닐까?  관련이 있는 지는 모르겠지만 dwell 이라는 표현이 본문에 두 번 나왔더라고.  첫번째는 2절에 우리가 거할 곳을 지칭하기 위해서 사용하셨고, 두번째는 10절에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신다는 말씀에 사용되었어. 이것을 이런 식으로 이해하면 과격한(과도한) 해석일지는 모르겠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마련하실 거처는 다름 아닌 하나님 아버지가 거주하는 곳 ... 따라서 우리가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분의 길을 따라가면 하나님 아버지가 거하시는 곳에 우리 역시 거하며, 우리가 거하는 곳에 하나님 아버지께서 거하셔서,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시고, 하나님의 일들을 일으키시며 역사하시는 능력을 보게 되는 것이 아닌가 싶어.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12절에 "You will do greater works than these (if you believe in me and follow my path), because I am going to the Father (to make a room for you)."라고 말씀하셨지 않나 싶고. 


말씀 기도: 
예수님 안에 진정 거하길 원합니다. 예수님의 속성, 예수님의 생각,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발자취를 따르기 원합니다. 
예수님께서 마련해 주신 거처에 거하는 제 자신이 되길 원합니다. 
예수님이 하셨던 일보다 더 큰 일을 감당하게 되는 하나님 능력의 통로가 되길 원합니다. 

말씀 적용:
말씀 기도를 매 정각마다 읽고 기도하기. 

John 13.1-20 Washing the disciples' feet


1Now before the festival of the Passover, Jesus knew that (1) his hour had come to depart from this world and (2) go to the FatherHaving loved his own who were in the world, he loved them to the end. 2The devil had already put it into the heart of Judas son of Simon Iscariot to betray him. And during supper 3Jesus, knowing that (3) the Father had given all things into his hands, and that (4) he had come from God and (2) was going to God, 4got up from the table, took off his outer robe, and tied a towel around himself. 5Then he poured water into a basin and began to wash the disciples’ feet and to wipe them with the towel that was tied around him

6He came to Simon Peter, who said to him, ‘Lord, are you going to wash my feet?’ 7Jesus answered, ‘You do not know now (5) what I am doing, but later you will understand.’ 8Peter said to him, ‘You will never wash my feet.’ Jesus answered, ‘Unless I wash you, you haveno share with me.’ 9Simon Peter said to him, ‘Lord, not my feet only but also my hands and my head!’ 10Jesus said to him, ‘One who has bathed does not need to wash, except for the feet, but is entirely clean. And you are clean, though not all of you.’ 11For he knew (6) who was to betray him; for this reason he said, ‘Not all of you are clean.’

12 After he had washed their feet, had put on his robe, and had returned to the table, he said to them, ‘Do you know what I have done to you? 13You call me Teacher and Lord—and you are right, for that is what I am. 14So if I, your Lord and Teacher, have washed your feet, you also ought to wash one another’s feet. 15For I have set you an example, that you also should do as I have done to you. 16Very truly, I tell you, servants are not greater than their master, nor are messengers greater than the one who sent them. 17If you know these thingsyou are blessed if you do them. 18I am not speaking of all of you; know (6) whom I have chosen. But it is to fulfil the scripture, “The one who ate my bread has lifted his heel against me.” 19I tell you this now, before it occurs, so that when it does occur, you may believe that (7) I am he. 20Very truly, I tell you, whoever receives one whom I send receives me; and whoever receives me receives him who sent me.



오늘 본문에서의 키워드는 know("알다") 라고 생각해.

1. 예수님은 알고 계셨다고 본문에서 계속 얘기하고 있어.  그럼 예수님이 무엇을 알고 계셨나?
(1) 세상을 떠날 때가 되었다는 것
(2) 세상을 떠나 하나님께로 갈 것이라는 것
(3)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모든 것을 맡기셨다는 것
(4)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것
(5) 제자들의 발을 씻는 이유와 목적
(6) 누가 자신을 배신할 것인지
(7) 자신이 바로 하나님이라는 것

2. 여기서 특히, 왜 예수님께서 세상을 떠나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직전에 제자들의 발을 씻으셨는가하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  우선, 8절에 보면 베드로가 예수님께서 자신의 발을 씻기시려는 것을 완강하게 (never) 거부하고 있어.  그러나 이런 베드로에게 예수님께서는 아주 강력하게 응수를 하셔. "너가 이걸 거부하면 너는 나와 아무 상관이 없다 (no share/part with me)."  이건 정말 너무 심한 발언이 아닌가 싶어. 아무 상관이 없다니!!  그동안 베드로가 예수님을 따라 다닌게 얼마고, 또 예수님한테서 보고 듣고 배운게 얼마나 많은데 어떻게 이 하나의 사건 때문에 - 그것도 발 씻기는 행위 하나 때문에 - 그분과의 관계가 아무 것도 아닐 수 있다는 것인지 좀 말도 안된다는 생각까지 들어. 하지만 곧 예수님께서 자신의 행위를 설명하신 것을 생각해보면 정말 아무것도 아닐 수도 있겠구나 싶어. 12절부터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들이 나를 선생이요 주라고 인정한다면 내가 너희들의 발을 씻긴 것처럼 다른 사람들의 발을 씻기라고 말씀하셔. 더욱이 정말 중요한 포인트는 예수님꼐서 이 말씀을 권유식으로 하신 것이 아니라, 반.드.시. 해야만 하는 것이라고 거듭 강조하시는 것을 보게돼.(v13-16)  즉, 다시 정리해보면, 예수님을 아무리 많이 따라다니고 또 아무리 그분의 가르침과 기적을 많이 듣고 보았다고 하더라도 예수님께서 직접 보여주신 '발을 씻기는 행위'를 하지 않으면 예수님과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이 되어버린다는 말씀!! 

여기서 발을 씻기는 행위를 다름 아니라 남을 돌아보고, 남의 더러운 것(수치/상처/연약함)을 만져주고, 씻겨주고, 섬겨주는 행위로 이해한다면, 그것이 바로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내가 살아가야 하는 삶의 모습과 행동이 아닐까?  그렇게 살고 있지 않다면, 나는 예수님과 아무런 상관도 없는 사람이고 말겠지.  이 말은 실제로 오늘 날 미국과 한국 기독교를 보면 정확하지 않나 싶어. 오늘 날 입으로는 기도하고, 사랑과 나눔을 외치는 기독교인들이 실제 그들의 삶 속에서는 다른 사람의 발을 씻기지 않기 때문에 그들을 통해 예수님이 전해지지 않는 것.  그것이 바로 예수님과 상관없는 자들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싶으면서 더욱 더 나 자신을 반성해 보게 돼.

17절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어. "If you know these things, you are blessed if you do them."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으로서 당연히 그분이 몸소 보이셨던 섬김의 정신을 깨우치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 그것이 나에게 지금 당장 가장 절실하고 필연적인 사명과 열정이라고 생각해. 


적용:
이번 주말에 Tanley Town에 있는 노숙자 한 명을 우리집으로 초대해 그의 발을 씻기고 맛있는 음식 (스파게티? 서양식으로다가..) 을 대접한다. 

John 12.1-8

Six days before the Passover Jesus came to Bethany, the home of Lazarus, whom he had raised from the dead. 2There they gave a dinner for him. Martha served, and Lazarus was one of those at the table with him. 3Mary took a pound of costly perfume made of pure nard, anointed Jesus’ feet, and wiped them with her hair. The house was filled with the fragrance of the perfume.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후에 다시 그의 집으로 찾아가시지. 그리고 2절에 나와 있듯, 그들이 예수님을 위해 저녁을 준비했대. 큰 언니 마리아는 음식을 나르고, 오빠 나사로는 예수님 곁에 함께 앉아 있고, 막내 마리아는 비싼 향유를 예수님 발에 붓고는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예수님의 발을 닦아주었다고 기록되어 있어. 그래서 집안 전체에는 그 비싼 향유 냄새로 가득차게 되었지... (음식 냄새가 아니고 말야...) 

이번 말씀에서 주목하고 싶은 부분이 두 가지가 그 뒤에 나오는데, 첫번째는 마리아의 행동에 대한 반응이고, 두번째는 마리아의 행동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이지. 
4But Judas Iscariot, one of his disciples (the one who was about to betray him), said, 5‘Why was this perfume not sold for three hundred denarii and the money given to the poor?’ 6(He said this not because he cared about the poor, but because he was a thief; he kept the common purse and used to steal what was put into it.) 7Jesus said, ‘Leave her alone. She bought it so that she might keep it for the day of my burial. 8You always have the poor with you, but you do not always have me.’

두 사람의 반응이 매우 상반되는 것을 볼 수 있어. 먼저, 유다는 마리아의 행동에 대해 매우 못마땅해하지. "아니, 그 비싼 향유를 왜 낭비하느냐? 그것을 팔아다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면 훨씬 좋을텐데..."라고 말하고 있어. 사실 순간적으로 그의 발언이 매우 합리적이고 바른 소리를 한다고 생각이 되기도 해. 맞잖아. 그 향유의 값(300백 데나리온)이 그 당시 보통사람 일년치 봉급에 해당한다고 하니 오늘 날로 따지만 수천만원 하는 가치를 지닌 것인데 그것을 사람의 발에다 붓는데 사용한다? 아무리 예수님의 발이 귀하다손 치더라도 그래도 수십만원도 아니고 수천만원이나 들이는건 너무 과한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그래서 유다가 바른말한다고 생각되지. (참고로 1데나리온은 그 당시 노동자의 하루 임금이었대)  이것은 소위 서민적 이미지를 물씬 지닌 박원순 서울 시장이 어느 날 청담동 뷰티살롱에서 수천만원짜리 발마사지를 받았다라고 했을 때 보통 사람들이 받게될 충격과도 같은 것이 아닐까 싶어. 그동안 재래식 시장에서 서민들과 함께 3천원 짜리 소머리 국밥 먹는 그의 이미지에 익숙해 있던 사람들은 당연히 받게될 충격이겠지. 따라서 예수님의 그러한 행동이 평소 그의 행동과 전혀 어울리지 않았기에 유다에게는 분명코 큰 충격으로 다가왔을 수도 있을꺼야.

하지만 성경에서는 이런 유다의 발언에 대해 이렇게 꼬집어서 얘기하지. "유다가 이 말을 한 것은 정말 가난한 사람들을 생각하는 친서민적인 마음 때문이 아니라 결국 표몰이와 포퓰리즘을 이용해먹는 정치인과 같은 도둑놈 심보에서 나온 말이다." 그 대표적인 이유로 유다가 일행의 공금을 맡고 있었는데 그것을 빼돌리는 사람이라는 점에서 찾고 있어. 즉,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라고 말하는 유다 본인은 정작 실제 제 삶 속에서는 전혀 가난한 사람들을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자기 배만 불리는데 급급하고 사리사욕에 눈먼 사람이라는 것을 드러내고 있는 부분이야. 

따라서 결국, 위 말씀을 통해서 집중해서 생각해 볼 부분은 예수님이 얼마짜리 발마사지를 받았냐 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과연 내 말과 행동 또는 삶이 얼마만큼 일치하고 있는가를 점검해 보아야 한다고 생각해. 즉, 남을 비판하기에 앞서 나 스스로부터가 그 비판에 떳떳할 수 있는가, 그 비판을 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가를 꼬집어 봐야 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어.

두번째, 마리아의 행동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은 유다와 정반대셔. 마리아가 그 비싼 향유를 자신의 발에 붓고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정성스레 닦아주는 행위를 매우 당연하고 바람직하게 여기기까지 하시는 것을 보게돼.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본인의 발을 그토록 귀하고 사랑스럽게 여겨서가 아니라 7절에 나와 있듯이, 마리아의 그 행위는 곧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자신의 죽음에 대해 애통해하는 그녀가 마지막으로 보여줄 수 있는 최선의 사랑의 예표라는 점에서 받아들이고 계신 부분이지. 다시 말하면, 이것이 결단코 예수님께서 가난한 사람들을 무시하면서 사치와 허영을 부리는 것이 아니라 온 우주의 왕되신 하나님, 예수님께서 자신을 온 우주의 왕으로 믿는 크리스챤으로부터 존귀와 찬양과 경배는 받는 대목이라고 이해돼.  우리 역시, 내가 가진 최고의 것으로 아니 모든 것으로 나의 구주되신 예수님께 드릴 수 있는 주의 자녀들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더군다나 주님께서 나의 면전에 계시는데 당연히 그분께 내가 가진 모든 것으로 어떻게 드리지 않을 수 있을까... 우리가 살면서 당연히 가난한 사람,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줄 필요가 있지만 그보다 더 우선시되는 것은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믿고 시인하는 것, 그리고 그 분께 내가 가진 모든 것으로 최고의 예우를 다하는 것, 그것이 아닐까 싶어.

적용:
말과 행동(삶)이 일치되길 원합니다.
주님이 제 삶의 일순위가 되길 원합니다.
아멘

John 11.38-57


11장 38절부터 마지막까지 중에서 크게 두 가지를 생각해 볼께.

첫째, 예수님의 기적
둘째, 대제사장의 예언 

첫째, 예수님께서 죽어서 무덤에 안치된 나사로를 살리신 기적의 내용. 이 내용과 관련해서 생각한 부분을 몇 가지 나눌께. 먼저, 개인적으로 이 사건이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나타내신 마지막 기적이라고 생각했는데 조사를 좀 해보니 아니더라고. 요한복음에는 기록되지 않았지만 다른 세 복음서에 이 사건 이후에 예수님께서 소경 바디매오를 고치셨다는 내용이 나오고, 또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때에 베드로가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자르자 그것을 다시 낫게 하시는 기적을 일으키시는 내용이 있었어. (눅 22.51)  끝으로, 흥미로웠던 발견은, 예수님의 첫번째 기적이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킨 기적이었다면 마지막 기적은 바로 포도주를 자신의 피로 변화시키는 기적이었다는 점이였어. 즉, 예수님의 기적의 완성은 단순히 몸을 씻기는 물을 변화시켜 우리의 더러운 죄까지 말끔히 씻어버리는 보혈의 피로 변했다는 것을 나타내시는 것이 아닐까 싶어. 한데, 한 가지 의문이, 4복음서에는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사건은 세부 내용은 조금씩 다를지라도 동일하게 포함시키는 것을 보게 되는데 (예수님 십자가 사건, 부활 사건 등) 왜 예수님께서 죽은 사람을 살리신 기적은 요한복음에밖에 포함되지 않았을까라는 점이야.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이 엄청난 사건은 4복음서에 포함시켜도 되지 않았을까 싶은데 말이지. 이유가 뭔지 아직 잘 모르겠어.

둘째, 49절부터 53절의 내용을 보면, 대제사장 가야바가 예수님의 죽음을 정당화시키는 말을 하지. 사실 이전부터 유대인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잖아. 하지만서도 예수님을 죽일만한 근거와 명분이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에 계속해서 갈등하고 있었는데 가야바의 발언을 통해 이제는 예수님을 죽여도 되겠다는 확고한 명분이 서게 된거야. 가야바가 이렇게 말했지. "You do not understand that it is better for you to have one man die for the people than to have the whole nation destroyed" (v50)  즉, 한 사람이 죽는 것이 다른 모든 사람들과 나라 전체가 망하게 되는 것보다 낫다. 이게 얼마나 합당하고 정당한 명분이겠어. 예수님 한 사람만 죽이면 모든 사람과 나라 전체가 산다고 하는데 말야. 

지는 전쟁은 명분이 없는 전쟁이라는 말도 있듯이 명분 없는 전쟁과 싸움처럼 사람들을 무력하게 만든게 없거든. 하지만 이제 유대인 지도자들은 이전과는 달라졌어. 그들의 이러한 확고함이 나중에 본디오 빌라도가 본인 스스로는 예수님을 죽일 아무런 합당한 이유가 없다고까지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또 강도 바라바를 살려주면서까지, 유대인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반드시 죽여 마땅하다고까지 말하게되는 근원적인 힘이 아닐까 싶어. 이를 통해서, 잘못 들어서게 된 명분은 참 위험한 것이 아닐수가 없다는 것을 보게 돼. 결국 끝장을 볼때까지 가고, 결국엔 가서는 후회로 남게되지. 

하지만 더 흥미로운 사실은, 51절부터 53절까지 나와있듯, 대제사장 가야바의 발언 역시 하나님의 개입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돼.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민족과 흩어진 그의 자녀들을 모아 하나게 되게 하시기 위함이라는 사실. 결국 대제사장 가야바의 발언을 통하여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게 되고, 그 사건으로 말미암아 오늘 날도 계속해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그 구원의 능력이 전세계 가운데 널리 퍼져나가며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으로 하나가 되고 있다는 점에서 하나님의 선하신 개입과 놀라운 계획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지.

적용:
예수님께서 흘리신 보혈의 피의 능력을 경험하는 하루가 되길 원합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하심을 믿고 의지하며 오늘 하루 가운데 하나님을 주로 모시고 겸손하게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게 도와주세요.

John 11.28-37 "Jesus talks with Mary"

28 When she had said this, she went back and called her sister Mary, and told her privately, ‘The Teacher is here and is calling for you.’ 29And when she heard it, she got up quickly and went to him. 30Now Jesus had not yet come to the village, but was still at the place where Martha had met him. 31The Jews who were with her in the house, consoling her, saw Mary get up quickly and go out. Theyfollowed her because they thought that she was going to the tomb to weep there. 32When Mary came where Jesus was and saw him, she knelt at his feet and said to him, ‘Lord, if you had been here, my brother would not have died.’ 33When Jesus saw her weeping, and the Jews who came with her also weeping, he was greatly disturbed in spirit and deeply moved. 34He said, ‘Where have you laid him?’ They said to him, ‘Lord, come and see.’ 35Jesus began to weep. 36So the Jews said, ‘See how he loved him!’ 37But some of them said, ‘Could not he who opened the eyes of the blind man have kept this man from dying?’


오늘 본문에서는 '예수님의 눈물'에 담긴 의미를 생각해 보려고 해.  아리스토텔레스는 눈물은 우리의 정신을 깨끗하게 하는 치료 능력이 있다고 했는데 왜냐면 눈물을 흘리는 행위를 통해 '카타르시스Katharsis'를 경험하게 되고, 이로 인해 우리의 영혼이 억압된 상태로부터 일시적이나마 자유로워지기 때문이라고 해.  카타르시스라는 말은 '밖으로 내보낸다,' '배설한다'는 뜻을 갖고 있는데, 즉, 눈물을 통해 우리 마음 속에 쌓여 있는 것을 내보낸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지.  '실컷 울고 나니 속이 시원하다.'는 말도 같은 맥락이라고 봐.  그래서 이 당시에는 희극보다는 비극이 더 예술적 가치가 높았다고 그래.  한데, 얼핏 생각하기로는 오늘 날엔 희극이 비극보다 대중성이 높지않나 싶어. 그래도 영화나 드라마와 같은 경로로 대중들의 눈물을 쏙 빼놓는 잘 만들어진 비극들이 나오기도 하지. 

그리고 또 한가지, 복음서 어디에도 예수님이 웃었다는 기록은 없어. 다만, 우셨다는 기록만 두 군데에서 나오는데 그 중 하나가 오늘 본문말씀이고 다른 하나는 누가복음 19장 41절에 예수님께서 영적으로 눈먼 예루살렘 도시를 안타까워하시면서 눈물을 흘리셨다고 나와. 그러면 왜 사복음서 기자들은 예수님께서 눈물만 기록했던 것일까?  예수님이 못 웃는 분은 아니실꺼 아냐?  그 이유로서 한 가지 생각이 든 것이 앞서 아리스토텔레스 당시에는 왜 희극보다 비극이 예술적 작품성 혹은 내용적 깊이가 더 크다는 얘기를 했잖아.  사복음서를 기록할 당시에도 그러한 시대적 정신 혹은 공감대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었고, 마찬가지로 성경을 기록하던 저자들도 그 영향을 받았던게 아닐까하는 생각이 해봤어.  성경은 물론 하나님의 영감으로 쓰여졌지만(딤후3.16; 베후1.20-21) 동시에 사람의 손으로 쓰여졌기 때문에 그 사람이 살고 있던 시대적 상황과 환경 그리고 본인의 주관이 깊이 관여되어 있다는 점을 놓쳐서는 안되지. 그래서 동일한 인물을 기록하는 사복음서도 제각각 그 내용과 설명방식이 다른 것 아니겠어?

곁다리 관찰은 여기까지 하고, 본문을 좀 더 살펴보자면, 33절에 마리아와 그의 유대인 친구들이 우는 것을 보고 왜 예수님이 he was greatly disturbed in spirit and deeply moved 되셨는지 잘 이해가 가지 않아.  메시지 성경 한국어 버젼을 보면 이 내용을, "깊은 분노가 북받쳐 올랐다." 라고 해석하고 있고, 개역개정에서는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현대인 성경에서는 "몹시 안타까워하시며," NIV에서는 "deeply moved in spirit and troubled"라고 표현하고 있어.  

종합해보면, 한마디로 비극인거지. 안타까움, 연민, 긴장, 통분, 분노, 비통함을 경험하고 있는 상태. 

그렇다면, 왜 이 상황에서 예수님은 비극을 경험하고 계신걸까?

상황을 정리해보면, 예수님은 나사로의 죽음을 예견하고 계셨고, 오히려 그의 죽음을 통하여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 되심을 보여줄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하고 계셨으며, 그렇기 때문에 나사로가 병들어 누워있을 때 마르다와 마리아가 예수님께 빨리 와서 오빠를 치료해 달라고 요청했음에도 불구하고 이틀이나 지체하시고 나사로가 결국 죽고나서 사흘이나 무덤에 안장되어 있은 후에 오셨고, 그것도 마을에 들어가지도 않고 마을 얹어리에서 머물러 계셨고, 더군다나 베다니라는 지역은 유대지방으로 자신을 죽이려는 세력이 있어서 제자들이 그렇게 만류했음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제발로 찾아 오셨던 어떻게 보면 잘 짜여진 각본과도 같이 모든 상황들이 예수님의 손바닥 안에 있었을텐데, 즉 마르다와 마리아가 오빠를 잃고 슬퍼하고 있을 것도 다 예상하고 계셨을 텐데...왜 그들이 우는 것을 보면서 예수님은 비극을 느끼셨던 것일까?  오히려, 모든 상황들이 본인의 예상대로 진행되고 있음을 보면서 속으로 흐뭇한 웃음을 짓고 계셨어야 할텐데 말이지. 

감정은 남들도 전염시킨다고 남들이 우는 것을 보니까 예수님도 그냥 따라 우셨던 걸까?  설마...요한복음의 기자가 그걸 기록하려고 한 것 같지는 않아.  뭔가 더 크고 깊은 속뜻이 있지 않을까?  

한 가지 떠오르는 생각은, 아직까지 사람들이 자신을 너무나도 모르고 있음에 대한 답답함과 서러움 그리고 안타까움에서 북받쳐 오른 눈물이 아니었을까 싶어.  생각을 해봐.  나사렛, 마르다, 마리아 셋 모두 믿음이 매우 신실하고 좋은 사람들이었어.  본문에 나온 마리아만 봐도, 언니가 예수님께서 오셨다고 귀뜸을 해주자마자 벌떡 일어나서 예수님께로 달려와서 무릎을 꿇으면서 이렇게 고백하지. "주님Lord!!"  

하지만 그렇게 믿음이 있고 신실하다는 그네들이었지만서도 예수님 입장에서 보면 아직까지 그들이 자신에 대해서 너무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을수 있었을꺼 같애.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된 예수님, 또 그들의 친구되신 예수님은 그들의 간절한 요청에 분명히 오실 것인데, 예수님이 조금 늦었다고 이내 예수님의 역사하심을 포기해버리고 죽은 그들의 오빠 나사로를 벌써 무덤에 안장해버린 그 사실을 보면서...예수님은 아직 이들의 믿음이 이것밖에 안되구나...싶었을꺼 같애...  내가 누군지 잘 안다고 하지만 아직 나에 대해 너무도 모르고 있구나.. 싶으면서 터져나온 안타까움의 표출이 바로 눈물이 아닐까 싶어.

적용:
나 역시 예수님에 대해서 잘 안다고 하지만 실제 내 삶을 들여다보면 너무나도 모르는 것이 많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된 예수님, 그분의 전지전능하신 능력을 더욱 더 신뢰하고 믿고 따르는 제 자신이 되길 원합니다.  너무 믿음이 연약합니다.  담대하고 확고한 믿음을 주세요.  그 옛날 노아가 산꼭대기에다가 백여년에 걸쳐 방주를 만드는 동안 세상 사람들의 그 많은 질시와 비난과 조롱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신실하게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붙들었던 것처럼 저 역시 세상 사람들이 볼 땐 바보같다고 비난할 찌라도 하나님, 예수님을 붙들 수 있는 믿음이 눈을 허락하여 주세요.

John 11.17-27 "Jesus talks with Martha: "the resurrection and the life"

17 When Jesus arrived, he found that Lazarus had already been in the tomb for four days. 18Now Bethany was near Jerusalem, some two miles away, 19and many of the Jews had come to Martha and Mary to console them about their brother. 20When Martha heard that Jesus was coming, she went and met him, while Mary stayed at home. 21Martha said to Jesus, ‘Lord, if you had been here, my brother would not have died. 22But even now I know that God will give you whatever you ask of him.’ 23Jesus said to her, ‘Your brother will rise again.’ 24Martha said to him, ‘I know that he will rise again in the resurrection on the last day.’25Jesus said to her, ‘I am the resurrection and the life. Those who believe in me, even though they die, will live, 26and everyone who lives and believes in me will never die. Do you believe this?’ 27She said to him, ‘Yes, Lord, I believe that you are the Messiah, the Son of God, the one coming into the world.’

오늘 말씀에서는 한 가지에만 좀 집중해 보려고 해.
25-26.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누구든지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할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게 된 배경은, 23절에서 예수님이 마르다에게, "네 오빠 나사로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 라고 말하자 24절에서 마르다가 예수님께, "네 알아요. 마지막 날 부활 때에 다시 살아나겠죠."라고 말한 것에 대한 대답으로 하신 말씀이지. 

사실 이 당시에 유대인들에게는 마지막 때(종말) 있을 부활에 대한 신앙이 보편적으로 퍼져 있었어. 이유는 바로 그들이 읽던 구약성경에 그렇게 나와있기 때문이지. 다니엘 12.1-2절을 보면, "At that time ... many of those who sleep in the dust of the earth shall awake, some to everlasting life, and some to shame and everlasting contempt." 이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게 돼. (유사 말씀으로는 이사야 26.19; 에스겔 37.1-14)

따라서 마르다 입장에서는 예수님께서 "네 오빠가 다시 살아날 꺼야" 라고 말씀하신 것에 대해 예수님이 왜 당연한 소리를 하고 계시지? 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 

여기에 대해 예수님은 이제 전혀 새로운 대답을 주셔.  "내가 곧 부활이고 생명이다. 따라서 나를 믿으면 죽어도 살 수 있고, 살아서 믿으면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완전히 혁신적인 대답이 아닐 수 없어. 그렇잖아. 이성적으로는 이해가 잘? 아니 전혀 안되는 부분이기도 해.  예수님을 믿으면 실제적으로!! 죽어도 살고, 살아서 믿으면 영원히 죽지 아니한다?  완전 불가사의, 뚱딴지 같은 소리잖아.  아무리 예수님이 대단한 존재라고 해도 그분을 믿는다고해서 내 생명이 끊어지지 않을 수가 있는거지?  상식적으로, 이성적으로 이해하기가 힘들지...

또 한 가지 이 말씀에서 주목해 보고 싶은 부분은, 자세히 살펴보면 말씀에서 비록 두 가지를 얘기하고 있지만 실상은 한 가지 의미를 내포한다고 생각해. 앞문장에서 예수님을 믿으면 죽어도 산다고 그랬는데, 죽어도 살기 위해서는 살아서 예수님을 믿어야 가능한 것이잖아. 왜냐면, 죽어서 믿을 수는 없는거잖아. 즉,  이 말은 뒷문장에 살아서 믿으면 영원히 죽지 아니한다는 말과 같은 말이라고 생각해. 

한 가지 더 덧붙이자면, 이 믿음은 개인적인 것이기 때문에 나사로가 다시 살아난 것이 마르다의 믿음 때문이 아니라 결국 죽기 전에 나사로가 가지고 있었던 신실한 믿음 때문이 아니었나 싶어.  그래서 나중에 나오겠지만 예수님께서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눈물을 흘리신 것은 다른 어떤 이유보다도 죽음까지 신실하게 예수님을 부여잡은 그의 신실한 믿음에 감동되어 눈물을 흘리신게 아닐까 싶기도 해.

Anyway,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라는 말은 그 의미와 내용이 실로 엄청난 것이 아닐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들어.  그런 예수님을 믿으면, 결국 나는 죽어도 사는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게 되니까 말야... 옛날 진시황제가 그토록 찾아다니던 불로초가 바로 요한복음 11장에 있었어!! 

생사화복의 주관자 되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분이 바로 예수님!!  그 예수님이 하나님 되심과 나를 사랑하심을 믿을 때, 그리고 나의 교만함을 회개하고, 나의 모든 생각과 마음과 삶을 오직 그분의 영광을 위한 것으로 turning 할 때, 나사로가 죽어서도 살아난 것처럼, 내 영과 육 그리고 마음도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는 이 엄청난 말씀!! 


적용: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 그리고 성령님, 이 생명의 말씀을 부여잡길 원합니다. 그리고 나사로가 그러했던 것처럼, 마르다가 고백했던 것처럼 예수님을 진심으로 믿길 원합니다. 그리고 신실하게 그 믿음을 지켜나가길 원합니다. 죽음까지도 그 믿음을 지켜나가길 원합니다. 

John 11.7-16 "Jesus goes to Lazarus' home"

7 Then after this he said to the disciples, ‘Let us go to Judea again.’8The disciples said to him, ‘Rabbi, the Jews were just now trying to stone you, and are you going there again?’ 
예수님은 어째서 다시 유다로 가시려는 것일까?  유다를 떠나셨던 이유가 바로 사람들이 예수님을 돌로 쳐 죽이려는 것을 피했던 것인데 말야 (10.31-19)... 그런데 다시 그곳으로 가려 하시는 이유가 뭘까?  도대체 예수님의 생각을 이해할 수가 없어... 그 이유를 다음 구절에서 말씀하고 계신데 그건 더 이해하기가 어려워...

9Jesus answered, ‘Are there not twelve hours of daylight? Those who walk during the day do not stumble, because they see the light of this world. 10But those who walk at night stumble, because the light is not in them.’ 
??  갑자기 빛 얘기는 왜 다시 하는 것일까?  물론, 앞에서 예수님께서 본인이 바로 '빛'이라고 말씀을 하셨지.  8.21절에서는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라고 말씀하셨고, 9.5절에 보면,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한데, 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에 더 valid한 포인트는 daylight에서 찾을 수 있을꺼 같아. 9.4절에 보면,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라고 말씀하셨지. 즉, 예수님께서 비록 죽음을 무릅쓰고라도 베다니 즉 유다지방으로 향하겠다는 것은 나사로를 살림으로써 나타내게 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시겠다는 말씀이시지. 다시 말하면, 나는 죽음도 두렵지 않다! 하나님 영광을 위해서라면 나는 죽음도 전혀 두렵지 않다!라는 예수님의 의지와 하나님에 대한 변함없는 열정을 나타내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또 한가지 내 가슴을 뛰게 만드는 묵상은...바로 twelve라는 단어에서 찾을 수 있어. 꼭 낮이라는 것이 12시간만을 나타내는건 아니잖아? 겨울에는 낮이 짧아져서 낮이라고 볼 수 있는 시간을 8, 9시간으로 볼 수도 있고, 그 반대로 여름에는 낮을 15, 16시간으로 볼 수도 있는데 왜 낮을 12시간이라고 굳이 말씀하셨던 것일까?  여기에 대해 나는 12제자가 떠오르더라고. twelve disciples!!  예수님은 하나님이셔서 사실 모든 것을 알고 계신분이지. 심지어 자신의 죽음까지도... 나중에 보면 자신의 죽음이 누구를 통해 언제 일어날지에 대해서도 다 알고 계시다는걸 보게돼.  따라서 유다 지방으로 다시 회향하실 때는 이미 자신의 죽음이 임박했음을 아셨을 것이 분명해. 따라서 예수님께서 공생의 삶을 마감하신 후에 그분의 사역과 사명 - 하나님의 일 - 을 계속해서 감당해야 할 사람들은 바로 12제자들이었던 것이지. 

따라서 9절 앞부분을 다시 이해해보면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을꺼 같아. 제자들이 예수님께, "아니, 예수님! 유다지방에 왜 돌아가시려고 하시나요? 그곳에 가면 당신을 죽이려는 사람들로 가득하지 않습니까? 죽으려고 그러세요?"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 "무슨 말이냐. 생명이 있는 한 하나님의 일을 해야하지 않겠느냐. 그리고 설령 내가 죽더라도 하나님의 일을 계속할 너희들이 있지 않느냐?"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이 Those who walk during the day do not stumble, because they see the light of this world. 10But those who walk at night stumble, because the light is not in them.’ 

즉,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와 함께하면 너희들 역시 죽음도 두렵지 않을 것이지만 나와 함께 하지 않으면 두려움으로 가득할 것이다." 라고 말씀한신게 아닐까? 


11After saying this, he told them, ‘Our friend Lazarus has fallen asleep, but I am going there to awaken him.’ 12The disciples said to him, ‘Lord, if he has fallen asleep, he will be all right.’ 
이 말씀을 보니 제자들이 앞에서 예수님이 무슨 말씀을 하신지 이해를 못한게 분명하지?  사람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 경향이 있듯이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나사렛이 잔다고 표현하자 그것을 곧이 곧대로 콜콜 자는 잠으로 애써 이해하고는 예수님한테 그러면 안 가도 되는거 아니냐고 반문하지. 한데, 내가 여기서 "애써"라고 표현한 이유가 있어. 희랍어와 영어 둘 다 모두 잠이란 것을 죽음에 대한 완곡한 표현이야. 따라서 제자들이 예수님의 그 표현에 대해 사실 충분히 알아들을 법도 한데 그들이 유다지방에 가기 싫으니까 어떻게든 "애써" 자기가 원하는 방향으로 해석하고 이해하는 것이지.

이것만 봐도 제자들이 아직 멀었다는 걸 보여주지. 즉, 그들이 아직 스스로 빛 가운데 걸어갈 만한 능력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 아닐까 싶어. 다시 말하면,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일에 사로잡혀 있기 보다는 여전히 세상적인 기준과 본인의 유한한 이성적 판단에 얽메여 있는게 아닌가 싶어. 나중에서 계속 나오지만 이런 제자들을 예수님께서 계속해서 훈련시키시고 결국 나중에 가서는 성령으로 그들을 도와주셔서 그들이 결국 하나님의 일에 사로잡히게 됨을 보게 되지.


13Jesus, however, had been speaking about his death, but they thought that he was referring merely to sleep.14Then Jesus told them plainly, ‘Lazarus is dead. 15For your sake I am glad I was not there, so that you may believe. But let us go to him.’

예수님께서 다시 친절하게 제자들에게 설명하시지. "얘들아, 내가 말한 잠은 드르렁드르렁 자는 잠이 아니라 죽음을 얘기했던 것이란다." 

그런데 15절 말씀을 보니, 앞서 11,12절에서 묵상한게 방향을 좀 잘못 잡은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어. 왜냐면, 15절 말씀을 통해 유추해 보건데, 제자들이 잠을 죽음이 아닌 단순한 잠으로 이해했던 것은 예수님이 죽은 사람을 살린다는 것을 생각지도 못했던 이유가 아닐까 싶어.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15절에서 내가 나사로한테 바로 가지 않아서 그가 죽은 것이 잘된 일이다. 덕분에 너희들은 내가 사람의 죽음까지 좌지우지 할 수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지 않느냐. 즉, 내가 하나님 됨을 너희들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다. 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라고 이해돼. 

16Thomas, who was called the Twin,* said to his fellow-disciples, ‘Let us also go, that we may die with him.’ 끝으로 열두 제자중 한 사람인 도마가 현문우답 아니 동문서답을 하지. 동료 제자들에게, "그래, 가자가자! 가서 예수님이랑 같이 죽자!!"  

아니, 이렇게 말하면 지금까지 예수님이 설명한게 뭐가 되냐?  이 말씀에서의 핵심은 죽음이 아닌 바로 생명이었어. 나사로에게도 생명을 주러 가는 말씀이었고, 예수님과 제자들 역시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며 생명의 길로 가는 것을 계속 강조하시고 말씀하셨는데 결국 마지막으로 제자 중에 한 사람이 하는 소리가, "자 그럼 우리 죽으러 갑시다!" 라고 말하니...참...


적용점:
하지만 나 역시 제자들과 다른 점이 뭐가 있을까?  못하면 못하지 결코 잘난게 하나도 없을꺼 같다. 따라서 하나님께 기도하며 간구하기로는
1.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끊임없이 품어주시고 가르치셨던 것처럼 나에게도 동일하게 안아주시고 계속 키워주시고
2. 성령님을 제 마음, 제 삶 가운데 보내 주셔서 하나님의 충성된 일꾼이 되기 원하고
3. 그리하여서 늘 빛 가운데 거하며 하나님의 일 - 영혼 구원, 하나님 영광을 드러내는 일 - 을 하는데 있어서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되길 원합니다. 

John 11.1-6 "Jesus hears of Lazarus' death"

1. 예수님께서 아직 예루살렘에 계실 때, 마리아와 마르다가 예수님께 편지를 보냈대.  그들 오빠 나사로가 병들었다고 말이지.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셔.  "그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  이 대목은 앞장에서도 눈먼자가 태생적으로 장님이 된 원인이 죄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하심을 나타내기 위해서라고 말한 것과 같은 맥락이라고 생각해. 즉, 질병과 죽음에 대해서도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하심을 드러내는 장면이라고 볼 수 있어. 

2. 한 가지 아이러니는 예수님께서 마리아 자매와 나사로를 사랑하신다고 말씀하시는데 (5절) 바로 그들에게 출발하지 않으시고 예수살렘에 이틀이나 더 머무르고 계셨다는 점이지.  마리아 자매가 살고 있는 곳은 베다니로 물론 예루살렘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긴 한데 그래도 왜 사람이 아프다고 그러면 바로 와서 고쳐주길 원하잖아...그런데 하루도 아니고 이틀씩이나 지체하신 것을 보면 그만한 이유가 있었을꺼라고 생각해. 

쉽게 생각해보건데, 그것은 하나님의 때와 인간의 때가 다르다는 것을 나타낼 수도 있어. 

그리고 주목해 볼 것은 분명 나사로의 질병은 하나님께서 영광받으시기 위해서 생겨난 것이라고 말씀하셨어.  그러면 그 질병을 치유하는 과정이나 결과에 있어서도 오로지 하나님 한분만 영광을 받으셔야 하지 않겠어?

하지만 사람이 본인이 이마만큼 노력했기 때문에 질병이 나았다고 생각한다면 하나님의 영광은 그만큼 감소되어 버리겠지? 

예를 들어, 기독교인들의 간증 중에 이런 간증을 많이 듣게 될꺼야.  즉, 암에 걸려서 세상에서 해 볼 수 있는 치료나 방법들은 다 해봤는데 결국 의사들도 두 손 두 발을 놓게 된 상태까지 치달았지만 그 때 기도나 혹은 말씀을 통하여 그 질병이 씻은 듯이 말끔이 나아버리는 경우.  의학적으로는 결코 설명할 수 없는 그러한 기적과도 같은 일들을 간증하는 경우를 보게 돼.  그것이 하나님 홀로 영광받으시기 합당한 경우가 아닐까 싶어.

아마도 마리아 자매도 그들 오빠가 질병에 걸리자 예수님께도 편지도 쓰고 본인들이 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방법들을 동원했을 꺼라고 봐. 

왜 흙탕물도 이리저리 휘저으면 물이 뿌옇지만 가만히 놔두면 침전물은 가라앉고 깨끗한 물만 위에 남듯이... 예수님이 지체하신 이틀이라는 시간을 통하여 본인들이 하려고 했던 여러가지 침전물들이 조용히 가라앉고 오로지 맑고 순수한 눈으로 주님만 간구하고 바라보게 되는 시점이 된 것이 아닐까 싶어. 

바로 예수님도 그것을 기다리신 것이고.

적용점:
제 삶의 여러가지 많은 부분들이 내 스스로, 내 뜻대로 하려고 하지만 다 주님의 뜻 가운데 있는 줄 믿습니다. 삶의 생사화복이 다 주님 손에 있음을 바라볼 수 있는 맑은 눈을 제게 허락해 주세요.

John 10.22-42 "Jesus the Christ, the Son of God"

22      Then came the Feast of Dedication at Jerusalem. It was winter,
23      and Jesus was in the temple area walking in Solomon`s Colonnade.

(비전성경 주석 참고) Feast of Dedication은 우리말로 '수전절'로 지금은 유대인들의 하누카Hanukkah로 잘 알려져 있는 유대인 명절이야. 이 날은 간단히 말해 과거 유대인 역사에서 그들의 성전이 더럽혀진 일이 있었는데 그 성전을 깨끗하게 회복시켰다는 의미에서 '수전절'이라고 부른다고 해. 즉, 성전을 성전답게 만든 날을 기념하는 날이지. 이때에는 8일 동안 매일 하나씩 초에 불을 밝히는데 하누카 촛대 가운데는 처음부터 불을 켜놓기 때문에 실제적으로 아홉 개의 촛불을 밝혀. 이 때문에 수전절을 '빛의 명절'이라고도 부르지. 

이런 배경지식을 가지고 말씀에서 주목할 점은 왜 수전절에 예수님께서 성전 안에 위치한 솔로몬 행각에 계셨던 것일까 하는 점이야. 그것도 예수님께서 자신이 바로 양의 우리의 문이며 나로 말미암아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말씀하신 후에 말야. 

솔로몬의 행각Solomon's Colonnade(portico) 의 의미에 대해서 알아보고 싶어서 뒷조사를 좀 해 봤는데...

"첫째, 복음서에서도 다수의 사건이 이 곳을 중심으로 일어났다고 기록하고 있어. (눅 2.46, 20.1; 요 7.14) 또한, 베드로가 앉은뱅이를 고쳤다고 말한 미문 (행 3.2-10) 역시 솔로몬의 행각에서 일어난 일이라고 보고, 그리고 베드로가 기적을 베푼 후에 그곳에서 설교까지 하지. (11,12)  또, 교회의 정규적인 집회 장소로 볼 수도 있어. (5.12)" (아가페 성경사전 참고)  즉, 예수님을 포함한 많은 사도들이 자주 이용했던 곳이지. 
둘째, Solomon's Portico는 예루살렘 성전 동쪽에 위치해 있고 Triple Gate을 통해서 들어갈 수 있다고 해. 그리고 이 문은 절벽에 위치하고 있어. 


바로 이 문이 베드로가 앉은뱅이를 고친 장소가 아닐까 싶네?  

또 흥미로운 사실은 이 문으로 들어가면 땅 속으로 들어간다는 거야. 무슨 말이냐면, 솔로몬의 행각을 산 위에다가 만들다 보니 들어가는 입구는 산 중턱을 뚫어서 산 꼭대기 땅아래로 공간을 만들고 그 위로 올라갈 수 있는 계단을 만들어서 산 위로 연결시켰다는 얘기지. 



한데 왜 예수님께서 무슨 생각으로 솔로몬의 행각에 올라가 계셨는지 잘 모르겠어. 다만, 처음에 수전절이라 하면 빛의 명절이라고 했는데, 예수님 자신이 바로 세상의 빛이라고 하잖아.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다"(9.5)  따라서 지극히 내 주관적인 생각으로는 예수님께서 성전의 의미를 새롭게 회복시키기 위한 일환으로 빛되신 본인이 성전의 의미가 더럽혀지고 퇴색해버린 솔로몬의 행각에 올라가 계셨던게 아닐까 싶어. 성전이라 하면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가 되어야 하는데,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결국 예수님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니까 말야. 

24      The Jews gathered around him, saying, "How long will you keep us in suspense? If you are the Christ, tell us plainly."
25      Jesus answered, "I did tell you, but you do not believe. The miracles I do in my Father`s name speak for me,
26      but you do not believe because you are not my sheep.
27      My sheep listen to my voice; I know them, and they follow me.
28      I give them eternal life, and they shall never perish; no one can snatch them out of my hand.
이 말씀을 통해서는 믿음과 행동에 대해서 생각하게 돼. 믿음의 증거는 혹은 하나님의 살아계심의 증거는 입으로 머리로 떠드는 것이 아니라 실제 삶의 영역에서 행동으로 열매로 드러나는 것임을 나타내는 것을 말씀하고자 함이 아닌가 싶어.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에 대해 그리고 하나님이 주신 율법에 대해서는 그렇게 잘 알고 그렇게 잘 말하지만 결국 그들의 삶 속에서는 어떠한 하나님의 기적/행적/열매들이 보여지지 않는 것이 그들에게는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믿음이 없어서라는 말씀.

29      My Father, who has given them to me, is greater than all; no one can snatch them out of my Father`s hand.
30      I and the Father are one."
이 구절은 어제 묵상한 내용과도 상당히 밀접한 부분이 있어.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 정말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기는 하지만 또 그렇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가 유일한 구원의 통로가 되는 것이지.

31      Again the Jews picked up stones to stone him,
32      but Jesus said to them, "I have shown you many great miracles from the Father. For which of these do you stone me?"
33      "We are not stoning you for any of these," replied the Jews, "but for blasphemy, because you, a mere man, claim to be God."
예수님이 누구신지에 대해 아직 볼 수 없는 그들은 당연히 예수님의 그런 고백들이 너무나도 말도 안되게 생각되겠지. 하지만 예수님을 볼 수 있는 자들, 즉 영적 눈을 뜬 자들은, 또는 예수님께서 눈을 뜨게 만들어준 양들은 예수님의 그런 소리가 진리로 와 닿을 수 밖에 없고, 주님이라는 고백을 하지 않을 수가 없지.

34      Jesus answered them, "Is it not written in your Law, `I have said you are gods`?
35      If he called them `gods,` to whom the word of God came -- and the Scripture cannot be broken --
36      what about the one whom the Father set apart as his very own and sent into the world? Why then do you accuse me of blasphemy because I said, `I am God`s Son`?
37      Do not believe me unless I do what my Father does.
38      But if I do it, even though you do not believe me, believe the miracles, that you may know and understand that the Father is in me, and I in the Father."
예수님께서 아직도 예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잘 아는 말씀으로 이해시키려고 하셔. 그리고 이같이 말씀하시지. 너희들이 읽는 말씀에 내가 바로 신이라고 말하지 않느냐? 자신이 신이라고 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하나님 만이 하실수 있는 기적들을 그가 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시지. 비록 그가 인간의 육체를 입고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께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스스로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기 때문에 그러한 것임을 기억해야 해.
(참고: "I say, "You are gods, children of the Most High, all of you; nevertheless, you shall die like mortals, and fall like any prince." (시편 6-7)

39      Again they tried to seize him, but he escaped their grasp.
40      Then Jesus went back across the Jordan to the place where John had been baptizing in the early days. Here he stayed
41      and many people came to him. They said, "Though John never performed a miraculous sign, all that John said about this man was true."
42      And in that place many believed in Jesus.

치열한 끝장토론의 결과 어떤 사람은 여전히 예수님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지만 또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믿게 되는 결과가 생겼음을 보게 돼. 이 사실을 목도하면서 하나님의 때는 역시 아무도 모르는 것이구나 싶어. 하나님이 언제 나의 눈을 만져주실지, 그래서 언제 내가 눈을 뜰지 그 때와 장소는 아무도 모르지. 


추가적으로 생각난김에 딱 한가지만 더 하면, 앞 구절에서 양 우리를 지키는 watchman이라는 비유를 쓰셨는데 그 존재는 바로 성령님을 뜻하는게 아닐까 싶어. 처음에는 교회 지도자들이 아닐까 했는데 그들 역시 양에 불과할 뿐이지. 더군다나 watchman은 목자에게만 문을 열어주고 또 목자가 아닌 도둑들이 들어오는 것을 막는 역할을 하지. 이처럼 성령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마음과 생각에 들어오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함과 동시에 여러 육신의 세상의 사탄의 생각에서 보호하는 역할도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


적용점 및 기도:
빛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내 삶의 주인으로 모시길 원합니다. 
나의 믿음이 말과 혀로만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행함과 진실함으로 드러나길 원합니다.
성령님께서 제 마음을 감찰하여 주시고 도와주셔서 유일무이한 선한 목자 되신 예수님께서만이 제 마음과 생각을 이끌어 주시고 세상의 욕망과 정욕으로부터 보호하여 주세요.
주님의 도우심이 아니고서는 절대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John 10.1-21 "A good shepherd"

1       "I tell you the truth, the man who does not enter the sheep pen by the gate, but climbs in by some other way, is a thief and a robber.
2       The man who enters by the gate is the shepherd of his sheep.
양의 우리를 문으로 들어가면 목자, 담 넘어 들어가면 도둑 ... 여기서 양은 나를 뜻하는 것이라고 하고 양의 우리라 함은 인간 세상을 지칭하는 것이라 하면, '문'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그리고 '목자'는 누구일까?  그리고 '도둑'은 누구일까?

3       The watchman opens the gate for him, and the sheep listen to his voice. He calls his own sheep by name and leads them out.

여기서 watchman은 또 누구? 그리고 문을 열어준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목자 스스로 문을 열고 들어오면 안되나?  또, 양들이 목자의 목소리를 듣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게다가 목자가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른다고 하는데 그 의미는 뭘까?  끝으로, 왜 목자는 그들을 우리 밖으로 불러 내는가?

4       When he has brought out all his own, he goes on ahead of them, and his sheep follow him because they know his voice.
우리 밖으로 끌어낸 목자는 양들 앞에 서서 양들을 이끌고 간다... 그리고 양들은 목자의 목소리를 들으며 따라간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일까?

5       But they will never follow a stranger; in fact, they will run away from him because they do not recognize a stranger`s voice."
그리고 양들은 절대 목자 이외의 음성은 따라가지도 않고, 오히려 도망가기까지 한다고 하는데 그 의미는 무엇일까?

6       Jesus used this figure of speech, but they did not understand what he was telling them.
예수님의 이 비유는 무엇을 말하려는 것인가? 

그럼 이제부터 그 속뜻을 알기 위해 진리의 세계로 탐험해 봅시다!! 고고!! 

7       Therefore Jesus said again, "I tell you the truth, I am the gate for the sheep.
예수님께서 친절하게도 비유를 설명해 주시네.  이야기 속에 나온 '문'은 바로 나다!!! 즉, 양들은 예수님을 통해 우리 밖으로 나갈 수 있는 것이야. 

8       All who ever came before me were thieves and robbers, but the sheep did not listen to them.
그리고 이런 말을 하셔.  나 이전에 왔던 자들은 도둑과도 같은 자들이다.  즉, 양의 우리를 문을 통해서가 아니라 담넘어 들어온 자들이라는 얘기지. 그건 무슨 말일까?  양을 인간으로 그리고 양 우리를 인간 세상으로 이해한다고 하면, 즉, 예수님 이전에 양들을 이끌기 위해 온 무수한 사람들...그 속에는 성인들도 있을 것이고, 철학자, 왕, 군주, 정치인, 장군, 예언자, 랍비, 선생, 등등의 소위 리더라고 불리우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야. 그들도 인간을 이끌기 위해 앞장서서 노력했던 사람들이지. 그리고 분명 그들 중에는 존경받고 칭송받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고 또 비난받고 욕듣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야. 하지만 예수님은 한 마디로 딱 잘라 그들 모두 '도둑'이라고 명명해 버리셔. 어떻게 들으면 정말 어이가 없는 발언이지. 아니, 예수라는 자가 누구기에 이런 말을 해? 지가 얼마나 잘났기에 그런 오만불상한 말을 해? 아마 그런 말을 들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런 반응을 보일꺼야.  오늘 날로 얘기하면 많은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존경을 받는 링컨 대통령이나 간디, 마더 테레사 아니면 주변에 훌륭한 목사나 종교인들을 '도둑'이라고 표현하는 것과 다르지 않아.  그걸 듣는 사람들은 당연히 어이가 없겠지... 아니, 인류를 위해 이토록 좋은 일을 하고, 또 많은 사람들한테 좋은 영향을 준 그 사람을 어떻게 도둑이라고 할 수 가 있어?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해하기 힘들꺼야. 

한데, 왜 예수님이 그런 말씀을 하셨을까? 

거기에 답을 하기 전에 말씀에 나온 한 가지를 더 짚고 넘어가면, 예수님께서는 그런 도둑의 목소리를 양들이 듣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어.  이건 또 도대체 무슨 말일까?  세상을 보면 많은 사람들이 리더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많은 영향을 받는 것 같잖아?  그래서 소위 내가 존경하고 배울만한 사람의 트위터에도 follower가 돼서 그 사람의 말을 귀담아 들으며 때로는 그것을 따라 살려고 하지 않는가 말이지.

한데, 예수님은 딱 잘라서 양들이 도둑들의 말은 듣지 않는다고 하셨어. 왜 그러셨을까?

9       I am the gate; whoever enters through me will be saved. He will come in and go out, and find pasture.
예수님께서 다시 말씀하셔.  내가 바로 문이다. 그리고는 다음에 말씀하시는 구문이 바로 이 비유의 핵심이 아닐까 싶어.  나를 통해서만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  나를 통해서만이 우리를 들어오고 나갈 수 있고, 그리고 초목을 찾을 수 있다. 

즉, 이 말씀을 통해 유추해 보건데 여기서 말하는 리더란 바로 영적인 리더를 말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세상적 지식, 지혜 그리고 육신은 세상의 통치를 받고 그 영향력 안에 있지만, 세상의 리더들이 사람들의 영혼을 생명으로 결코 이끌 수 없으니까 말야. 만약 그렇게 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도둑'과도 다름 없을 꺼야.  게다가 앞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듯이, 그런 도둑들의 말을 듣지도 않을꺼야. 

한데, 사실 또 많은 사람들이 거짓 영적 리더의 말에 현혹되는 경우를 생각하게 되면서 예수님의 말씀이 어떤 의미인가 곱씹지 않을수가 없어. 그래서 생각하던 중에 깨달은 점 한 가지는, 여기서 말하는 양이란 바로 목자의 양이라는 점이지. 또는 목자가 하나하나 이름을 붙여준 양이라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어. 이 말인 즉슨, 모든 인간들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벌써 하나님의 계획하심과 은혜로 선택하시고 구원으로 이끄실 인간들을 지칭하는 것이라는 것이라고 생각해. 따라서 벌써 하나님을 만났고, 그분의 선택하심을 받고, 구원을 받은 인간들은 주변의 어떠한 거짓된 유혹이 온다고 할찌라도 요동도 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씀에서 말하는 것이 아닐까 싶어. 

10      The thief comes only to steal and kill and destroy; I have come that they may have life, and have it to the full.
도둑은 양을 훔쳐서 죽이고 파괴하기 위해서 오지만, 예수님은 양에게 생명을 주고 양의 삶을 더 풍성하게 하기 위해서 오신다고 하셨어. 이 말을 다시 영적인 범주에서 다시 생각해 보자면 거짓 영적 리더들이 사람들을 유혹하여 데리고 간다고 할찌라도 그들이 구원으로 이끌 수 없기 때문에 결국에 가서는 그들의 영혼을 더 피폐하게 만들고 병들게 만든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라고 이해했어.

11      "I am the good shepherd. The good shepherd lays down his life for the sheep.
예수님께서 자신은 선한 목자라고 자칭하시는데 그 이유로 드는 것이 양들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어놓기 때문이라고 하셔.

사람은 지극히 이기적 동물이잖아. 아무리 좋은 목적과 선한 의도를 지녔다고 할찌라도 그 내면을 깊숙이 들여다보면 그것이 결국 자신을 이롭게 하기 위한 행동이었음을 발견하게 돼. 더군다나 사람은 의지가 약하기 때문에 한 순간 방심해 버리면 개인의 이기심이 극치로 치닫게 되고 이는 결국 자신이 이끄는 추종자들을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이용하게 되고 따라서 추종자들은 병들고 죽게 만들지. 인간의 이기심을 가장 확연히 보여주는 대목은 바로 죽음 앞에서라고 볼 수 있어. 언젠가는 어차피 다들 죽을 목숨이지만 왜그리 죽음 앞에서는 그리도 작아지고 초라해 지는지... 그것은 결국 이기심의 발로가 아닐까?  

바로 이것을 나타내는 구절이 바로 다음에 나오지.

12      The hired hand is not the shepherd who owns the sheep. So when he sees the wolf coming, he abandons the sheep and runs away. Then the wolf attacks the flock and scatters it.
13      The man runs away because he is a hired hand and cares nothing for the sheep.

여기서 삯꾼hired hand이란 무엇일까?  도둑이 아니라 hired hand이라고 말씀하신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을 생각해 보기 전에... 위의 구절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어.

사람들이 죽음 앞에서 항상 도망만 다닌다고?  

하지만 때로는 영웅?들의 모습 속에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기상을 보기도 하잖아. 지하철 선로에 떨어진 사람을 구해지고 본인은 결국 죽는다던가, 아니면 이순신 장군처럼 '생즉사 사즉생'을 외치며 사생결단의 초연한 의지로 전장을 누비는 사람들도 있고 말야, 또 무언가 대의를 도모하기 위해서 희생을 자초하기도 하지. 이런 실례 때문에 아직도 성선설, 성악설 논쟁에 해답이 나지 않기도 하고...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삯꾼hired hand이라는 믜미를 이해해보면 좋을 꺼 같아. 

삯꾼이라 하면 보수를 받고 일하는 사람을 뜻하지. 즉, 이 말은 이해관계가 있는 것으로 내가 어떤 행동이나 말을 함을 통하여서 내가 이익을 보거나 손해를 보는 것을 뜻하지.  그리고 사람은 이기적이기 때문에 분명히 이익이 되는 것을 쫓을꺼야. 

하지만 여기서 이익이란게 단순히 눈에 보이는 물질적인 것 뿐만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심적, 정신적 이익도 포함시켜야 해.  

소위 영웅적인? 죽음을 선택했던 그들... 그들 역시 이해관계에 따른 행동이 아니었을까?  다만, 그 내용이 훨씬 더 복잡해서 헷갈리긴 하지만 말야...

가장 파격적인 예로 들어 보자면,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기 위해 오지로 부족선교를 갔다가 죽임을 당한 선교사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리는 보통 어떤 생각을 할까?  

와, 이 사람은 정말 예수님의 사랑으로 가득찬 사람이구나. 이 사람은 정말 이타적인 사람이구나.  우리는 추호도 이 사람을 이기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지.

하지만 과연 그럴까?  (물론, 너무도 그런 분들을 존경하고 나 역시 그런 삶을 희망하지만...) 그 분의 내면을 가만히 들여다 보면 그가 소위 말하는 순교를 당한 것은 그것 역시 이기심의 발로라고 볼 수 있어. 분명히 그가 오지로 선교하러 간 것은 돈을 많이 벌러 간 것도 아니고, 예쁜 색시를 찾으러 간것도 아니었고, 또 죽음을 맞이한 것도 오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고 구원하기 위해서였기에 이기적이라고 보기가 매우 힘들지만, 그의 죽음을 불사한 선교의 열정은 바로 하나님께 인정받고자 한 그의 지극히 고차원적인 이기심이었다고 볼 수 있어.  앞서 얘기한 영웅들의 스토리 역시 우리는 이타적이라고 말하지만 그 역시 고차원적인 이기심에 의한 행동이었다고 생각해.

여기서 이기심이라고 무조건 나쁘다고 볼 수 없다는 것을 말하고 싶어. 다만, 이기심은 어디까지나 이기심일 뿐이라는 것이지. 

이타심이라는 것은 바로 자기가 전혀 그럴 필요가 없는데 (즉, 본인에게는 전혀 돌아올 것이 없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희생시키는 것을 뜻해.  바로 예수님의 경우가 이 경우지.  예수님은 하나님이셔.  세상과 인간을 창조하신 그 분께서 왜 굳이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스스로 인간의 종된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을까. 마음만 먹으시면 인간을 한 순간에 다 멸망시켜 버리시고 다른 존재를 창조하실 수도 있는데 말야. 또 인간을 위해 죽는다고 이미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는 것은 이미 어불성설 아닌가.  "역시 넌 최고야!!"  자화자찬을 하기 위해 그런 일을 하셨다?  음... 하나님이 혼자 놀기 좋아하시는 그런 분이실까?  

아니라는 결론하에, 따라서 그런 예수님께서 본인의 삶을 희생하시면서까지 인간을 구원하시고자 함은 세상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완전한 이타심임을 발견하게 돼.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 만이 삯꾼이 아닌 즉, 이해관계가 전혀 없는 완벽한 선한 목자라고 볼 수 있으며 그렇게 완전하기 때문에 오직 그분을 통해서만 인간이 구원을 얻을 수 있지 않나 싶어.

14      "I am the good shepherd; I know my sheep and my sheep know me --
또 다시 말씀하시지. "나는 선한 목자다!"  (세번째..예수님은 삼세번을 참 좋아하셔..)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셔.  나는 내 양을 알고 또 내 양은 나를 안다. 

앞서 말했듯이 여기서 양이란 벌써 구원을 받은 (즉, 예수님의 존재에 대해 이미 깨달은 사람)을 지칭하고 있어. 즉, 선택받은 사람들이지. 9장과 연결짓자면 영적으로 눈뜬 자들인 셈이야.  

15      just as the Father knows me and I know the Father -- and I lay down my life for the sheep.
내가 생각하기에 이 구절이 하나님이 예수님 되시고, 예수님이 하나님 되시는 일반 상식으로는 전혀 이해하기가 힘든...그리스도론Christology를 나타내는 구절이 아닌가 싶어. 따라서 11-13절에 대해 장황하게 살펴보았던 하나님의 전적인 이타심을 나타내기 위해 등장한 말씀이라고 생각해.

16      I have other sheep that are not of this sheep pen. I must bring them also. They too will listen to my voice, and there shall be one flock and one shepherd.
예수님은 참 좋은 분이셔...계속해서 영적인 눈을 뜨게 할 사역들을 하시겠다는 말씀이지.  그렇게 되면, 그들 역시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 ... 그 엄청난 진리를 알게 되고, 그리고 예수님을 따라 사는 삶을 살게 된다는 말씀.

17      The reason my Father loves me is that I lay down my life -- only to take it up again.
18      No one takes it from me, but I lay it down of my own accord. I have authority to lay it down and authority to take it up again. This command I received from my Father."
음.. 이 구절을 이해하려다 보니 앞서 12-13절 이해에서 말했던 자화자찬에 대한 입장이 달라져야 할 필요성이 생겼어. 그 이유는 이 구절이 바로 자화자찬 또는 자기사랑, 자기인정을 말하는 대목이 아닌가 싶어서... 즉, 하나님된 예수님, 예수님된 하나님께서 자신이 그렇게 희생했다는 점에 대해 대단히 만족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구절이야. 게다가 자신이 양을 위해 희생하는 것은  다시 생명을 얻기 위함이라는 점에서...이 역시 이해관계를 위해서가 아닌가 하는 의문이 생겼어. ㅠㅜ 
물론, 본인이 본인을 인정하기 위해 하는 행동을 이기심이라고 이해해야 하는가 아닌가라는 점에서도 입장과 해석이 달라질 순 있겠지.

19      At these words the Jews were again divided.
20      Many of them said, "He is demon-possessed and raving mad. Why listen to him?"
21      But others said, "These are not the sayings of a man possessed by a demon. Can a demon open the eyes of the blind?"

여전히 이런 이상한 소리를 하시는 예수님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사람들의 의견이 분분한 것은 당연한 것일테야.  정말 중요한 것은 - 오늘 말씀에서도 누차 나왔지만 - 이런 예수님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가 예수님의 양이 되어야 하지. 그리해야 우리가 그분이 누구신가 알 수 있고 또 예수님께서 우리의 이름을 불러 주실때 그분의 목소리를 따라갈 수 있게되니까 말야. 그럼, 우리가 어떻게 그분의 양이 될 수 있을까?  그건 전적으로 하나님된 예수님의 선택에 달려있어. 그분이 우리를 찾아오시고 우리의 눈을 만지시고 우리의 눈을 뜨게 하셔야만 가능한 일이지. 그렇기 때문에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인 것이고. 


기도:
하나님 오늘 말씀 묵상 가운데 이해가 힘든 부분이 많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이해할 수 있는 능력과 지혜를 허락해 주세요. 

적용:
예수님의 목소리에 더 귀를 세우고 그분을 따라가는데 게을러지지 말자.


John 9.35-41 "Jesus seeks the outcast"

35절. 눈뜬 자가 사람들로부터 쫓겨나자 예수님을 그를 만나주셔. 참 놀라운 것은 그가 눈을 바로 떴을 때는 예수님을 보지 못했는데 (12절) 이제 사람들로부터 무시받고 버림받았을 때에야 비로소 자신을 고쳐주신 그분을 만나게 된다는 것이야. 왜 그가 눈을 뜨고는 바로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고 사람들로부터 버림 받았을 때에야 비로소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을까? 그 이유를 말씀을 그대로 직역해서 보자면 "1. 예수님께서 그를 '실로암'으로 보내시고는 자리를 옮기셨다가 2. 그가 힘들어한다는 말을 듣고는 위로해주기 위해서 그를 찾아오셨다." 라고 이해할 수도 있을꺼야. 이건 보편 상식적인 해석이라고 볼 수 있어. 

하지만 예수님과의 대화를 보다보니 '아...이건 단순히 상식적으로만 해석할 문제가 아니구나..' 싶더라고. 왜냐면, 상식적으로 눈뜬 자가 불과 얼마 전에 자신을 고쳐주었던 사람의 목소리를 분간하지 못하는게 말이 될까?  더군다나 장님의 경우, 시각이 없는 만큼 다른 감각들 즉, 청각, 후각, 촉각, 미각이 매우 발달해 있는데 말야. 따라서 눈뜬 자가 자신이 들은 목소리, 게다가 자신을 고쳐주었던 바로 그 사람의 목소리, 그것도 얼마 되지도 않은 시점에서 그 목소리를 알아채지 못한다는 것이 개인적으로는 상식에서 벗어나는 내용이라고 생각이 들었어. 

그럼 바로 이런 비상식적인 구문을 상식적 수준에서 벗어나 좀 더 입체적으로 어떻게 해석해 볼 수 있을까? 생각해 보던중에 이런 가능성들을 꼽아봤지.
1. 눈뜰 당시에는 너무 정신 없었고, 또 눈뜬 이후에도 너무나도 바쁜 스케줄과 정신적 압박 때문에 예수님 목소리에 대한 기억을 잃어버렸을 수도 있다. 
2. 혹은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자신을 고쳐준 예수님이라는 인물에 대한 상상과 기대가 너무나도 커지다 보니 그 목소리에 대한 인식도 왜곡되었을 수도 있다.
3. 막상 예수님의 생김새를 보니 목소리를 기억해 낼 수 없을 정도로 파격적(?)으로 생기셨다.
4. "예수님이 다시 찾아오셨을 때는 육체적으로 찾아오신 것이 아닌, 형이상학적으로 찾아오신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의 목소리가 귀로 들린 것이라기 보다는 마음으로 들린 목소리일 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4번에 대해 좀 더 생각해 보고 싶은데, 왜냐면 실제로 그리스도인들의 회심스토리를 듣다보면 이런 경우들이 많은 것을 보게 돼거든. 즉, 이전에는 교만하게 (자기 중심적으로) 살다가 어느 한 시점에 말씀(설교/성경/찬양)을 듣고/읽고/부르고 있는데 갑자기 한순간에 자신이 교만하다는 것을(혹은 죄인임을) 가슴으로 깨닫게 된 이야기. 이것을 사람들은 하나님/예수님을 만났다고들 표현하지. (나도 그러하고...) 그리고 그 순간에 다들 이런 결심들을 하게 돼. "이제는 교만한 삶(자신 중심의 삶)을 내려놓고 겸손한 삶(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테야!!" 즉, 영적인 눈을 뜨는 체험이지. 그리고 이 체험은 개인적으로 실제적으로 경험한 것이기 때문에 누가 뭐라고 하든 본인에게는 그것이 사실이고 진리로 받아들여져.

하지만 비록 그런 찰나적인 체험이 있었지만 다들 이런 고민에 빠져. 내가 경험했던 그 체험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그 체험을 가능케 한 하나님/예수님이라는 분이 과연 누굴까?  분명코 그것은 부인할 수 없는 감정적, 체험적, 실제적 사실인데 어떻게 그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가 잘 되지 않는거야. 대충 뭔지는 알겠는데 입으로는 설명이 잘 되지 않으니 얼마나 답답하겠어. 그러면서 사람들은 회의감과 혼란에 빠지게 되고 결국 영적인 눈은 떴음에도 불구하고 영적인 침체를 경험하게 되지. 

그렇게 심적으로 영적으로 끙끙 앓는 그들에게 다시 예수님이 다가오시는 경험을 하게 돼.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이 품고 있던 모든 고민과 갈등이 해소되어 버려. 왜냐면, 다시 만난 그 경험에서 예수그리스도의 의미를 발견하게 돼거든. 아, 예수님이라는 분이 이런 분이시구나. 그래서 이것을 가능하게 했구나. 우와우!! 예수님이라는 분이 실로 엄청난 분이구나!! 예수님이라는 분이 진리구나!!  그것을 깨닫는 순간 사람들은 예수님을 "주여!!"라고 부르고 그 분을 따라 살게 되는 것이지. 

한데, 사실 이 경험이 특히 믿음이 성장하는 초반기에는 무한 반복되는 것을 보게 돼. 왜냐면 비록 처음 하나님/예수님과의 만남에 대한 체험이 있었지만 (첫경험), 많은 순간 세상에 살면서 자꾸만 거짓증언과 유혹, 그리고 갖가지 혼잡한 얘기들에 노출되다 보면 그 첫사랑, 첫경험을 잊어버리게 되거든. 그래서 내가 영적으로 침체되고 내 마음이 힘들고 가난할 때, 다시금 예수님께서는 내 마음 속에 조용히 찾아와 나를 안아주시고, 일으켜 주시고, 그 분 안에서 다시금 삶의 의미와 용기를 찾게 해 주시지. 그리고 그분을 다시 따라 살겠다는 의지를 주시고 말야. (물론, 타이밍은 각각 다르겠지만 말야...하지만 말씀에서도 나왔듯이 내가 힘들 때 나를 찾으신다는found him 것을 주목해야 해.(35절) 

다시 말씀에 나온 눈뜬 자 이야기로 돌아가서... 눈뜬 자 역시 앞서 말한 그리스도인들과 동일한 경험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해. 즉, 본인은 누가 뭐래도 한 순간의 체험을 통해 눈을 떴는데 누가 자신을 고쳤는지 그 사람이 누군지 설명이 안되는 것이야. 눈뜬 후에 보지도 못했고 말야. 게다가 주변에 많은 사람들은 자신을 고쳐준 그 사람에 대해 자꾸만 딴소리를 하고 있고, 거기에 더해서 결국 그들의 입맛에 맞는 얘기를 안 해준다고 자신을 내쫓아 버렸으니 얼마나 마음이 답답하고 힘들었겠어? 그리고 자신을 고쳐준 그 사람에 대해 정말로 궁금증이 폭발하겠지. 도대체 누구냐 넌?!!!  

바로 이 때, 예수님께서 나타나셔!! 그리고는 눈뜬 그에게 내가 바로 너가 그토록 알고 싶었던 "그 사람"이라고 말씀하셔. 그러자 드디어 눈뜬 자의 입에서는 "주여 Lord"라는 말이 나오지. 앞절에서는 이 사람이 예수님에 대해서 단순히 "예언자 prophet"이라고 얘기했는데 이제는 그의 "주인"이 되어 버린 것이야. 주인이라는 말은 평생토록 그분을 따라 살며,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지. 

내용이 좀 산만해진 감이 있어서 다시 정리하자면,

내가 던진 질문이 눈뜬자가 두번째로 만난 예수님이 과연 실제적 육체적 만남인가 아닌가? 였는데 
대답이 "아니다" 일 가능성이 있었고 그것을 
그리스도인들의 회심 과정과의 유사성을 통해 이해해 보려고 했었어. 


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눈뜬 자에게 실재적, 실존적으로 나타나셨느냐 아니냐라고 따지는 것보다
눈뜬 자에게 예수님의 의미가 어떻게 변화되었는가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 

그리고 그 의미가 또한 눈뜬 자의 삶에 어떤 변화를 초래할지가 훨씬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


마지막 39-41절은 결국 9장의 핵심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지 않나 싶어.

그 말의 속 뜻은:

세상은 예수님으로 인해 둘로 나뉠 것이다. 예수님를 아는 사람과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
결국 예수님이 주인되심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사람이 비로소 죄에서 자유할 것이고, 예수님을 주인으로 삼지 않는 사람은 죄의 노예가 될 것이다, 



적용점:
예수님을 나의 주인되심을 고백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을 따라 살기 원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그분의 음성을 듣기 위해 귀를 기울이겠습니다.

John 9.24-34 "The Pharisees question the healed man a second time"

흔히들 아는 얘기지만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은 매우 종교적인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말씀에 대한 지식이 빼어났고 또한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서도 믿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철저히 예배와 절기를 지켰다. 그들의 모습은 신실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존재를 편협한 시각으로 바라봤다. 그리고 문제는 마치 그들의 이해가 모든 것인냥 착각했다는데 있다. 그들의 이해가 진리가 돼 버린 것이다. 장차 그들의 믿음은 율법주의로 발전했고 그렇게 인간의 인식의 틀에 갖혀버린 그 속에서는 하나님이 제대로 경험될 수 없었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그러져 버린 것이다. 마치 하수구가 막혀 물이 제대로 흘러내려가지 않듯이, 영혼의 물줄기가 막혀버렸다. 34절에 바리새인들이 눈뜬 장님에게 보여준 태도에서도 이러한 사실이 여실히 드러난다. To this they replied, "You were steeped in sin at birth; how dare you lecture us!" And they threw him out.  불행하게도 자신의 이성과 인식의 틀에 갖혀버린 그들은 자유로운 성령의 역사하심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가 아닌 것이다. 이것을 영적 둔감, 영적 어두움, spiritual blindness라고 부른다.

바로 이 상황에서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뚫어뻥" 같은 존재로 현현하셨다.  그리고는 본말이 전도된, 주객이 전도된 율법주의자들의 믿음에 대해서 질타하시고, 새롭고 파격적인 모습으로 믿음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라고 가르치셨다.

사실 바리새인들은 안타깝기 그지없다. 하나님 존재를 부정한 것도 아니고 누구보다도 열심히 믿으려고 했던 사람들이 아닌가. 그들의 노력과 열심이 안타깝게 느껴진다. 하지만 열심히 뛴다고 다가 아니잖는가. 뛰는 것도 매우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자신이 어디로 뛰고 있는가라는 방향이 더 중요하다. 따라서 올바른 믿음을 가지는 것이 열심을 가지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는 다소 이해하기 힘든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그 믿음이라는 것은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믿음의 경험들이 본인의 공로의 결과물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이요, 예수그리스도의 공로로 이뤄졌다는 가슴의 고백이 나와야 하는 것이다.

분명코 바리새인들도 열심이 있었지만 무언가 풀리지 않는 고민과 답답함이 있었을 것이다. 믿음 생활에 대한 회의가 있고 의문이 있었을 것이다. 다만, 그들의 삶이 그렇게 흘러왔고, 문화가 그렇게 자리잡았고, 다른 대부분의 주변 사람들도 그렇게 살고 있기 때문에 답답함을 억누른채 그것이 맞는 것인냥 인정하고 살아야만 했을 것이다.

그런 답답함을 오늘 말씀에서 찾아볼 수 있다.

심리학에서 방어기제 중에 "반동형성"이라는 것이 있다. 이것은 미성숙한 방어기제로 쉽게 말해 자신이 현실 속에서 하고 싶은 일을 여러가지 환경적, 상황적 이유 때문에 무의식적으로 억누르고 있다가 누군가가 현실에서 그 일을 하게 되는 볼 경우 그것에 대해 극심하게 부정적인 반응을 보인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무의식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에 본인은 진실로 자신이 그 일을 싫어한다고 착각하게 된다.

이런 관점에서 바리새인들이 예수의 말과 행적에 대해 그토록 히스테리적 부정적 반응을 보인 것은 바로 그들이 무의식적으로 영적인 자유함에 대한 갈망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바로 복음에 대한 갈망. 즉, 무언가 억눌린 듯한 그들의 영성에 대한 답답함에서 해방되고자 하는 간절한 내면적 욕구가 있었을 것이다.


복음이라는게 무엇인가?

복음에 대한 정의 역시 다양하겠지만 오늘 말씀에 비추어 보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30절에 보면 눈뜬 장님이 The man answered, ‘Here is an astonishing thing! You do not know where he comes from, and yet he opened my eyes. 라고 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이 아닐까.  어차피 하나님 그 분의 형태도 존재도 분명히 알 수 없는 우리 인간은 불충분한 인식의 단계를 넘어서 경험의 결과를 통해 하나님의 존재를 체험해 볼 수밖에 없지 않는가. 즉, 눈이 뜨이고, 죽었던 자가 살아나고, 가진자가 갖지 못한 자에게 나누어 주는 경험...그리고 그 경험을 자신의 공로로 인정하지 않고 전적으로 그 경험을 가능하게 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모든 영광을 돌리는 것. 마치 눈뜬 장님이 내가 눈을 뜬 것은 전적으로 예수라는 그 사람을 통해서 가능했다고 선포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것이 바로 복음이라고 생각한다.

그럼 그 경험은 언제 가능한가. 눈뜬 장님의 경우를 살펴보면 두 가지를 흥미로운 점을 찾아볼 수 있다.

첫째, 다른 경우와는 달리 이번 경우는 예수님께서 직접 눈뜬 장님에게 다가오셨다. 1절을 보면    As he went along, he saw a man blind from birth. 이라고 했다. 즉, 예수님께서 직접 그를 보시고 다가오신 것임을 알 수 있다.

둘째, 6-7절에서 드러났듯이 눈뜬 장님은 내 눈이 뜨이길 원하면 내가 뭐라도 하겠습니다라는 마음 상태임을 볼 수 있다. 그것이 본인을 치욕스럽게 만들더라도 말이다. 타인의 침saliva은 어느 누구에게나 불쾌감을 준다. (오늘 날의 관점에서는 그렇지만 그 당시에 침의 사회적 의미는 모르겠다) 따라서 타인의 침을 자신의 눈에 바를 정도면 그 사람의 자존감은 제로상태라고도 볼 수 있다. 예수님은 바로 이렇게 마음이 가난하고 갈급한 사람을 변화시킨다.

여담이지만 침의 성분은 99%가 물이고 나머지 성분들을 구강을 보호하고 보존하는 좋은 물질이라고 한다. 더군다나 침은 소화작용을 돕는 주요 분비물이라는 점에서 침으로 치유하시고 변화시키시는 예수님의 행동이 바로 물과 성령으로 세례를 배푸시는 것을 시사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오늘의 적용:
제게 영적인 민감함을 주옵소서. 그러기 위해서는 제 자신의 이기적인 교만함을 내려 놓고 주님의 겸손한 마음을 품어 세상과 다른 사람들 속에서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눈을 주소서.
나의 인식의 틀에 하나님을 가두지 않게 하시고 하나님의 인식의 틀에 나를 집어 넣을 수 있는 영적인 지혜를 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