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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eedom Writers, 2007


Director. Richard LaGravenese

Cast. Hilary Swank(Erin, Teacher), et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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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감히 별 다섯개를 준다. 그러고보면 내가 별을 주는 기준은 내 마음에 얼마만큼의 감동을 주느냐, 혹은 생각할 거리를 얼마나 주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즉, 지극히 내 주관적인 평가이다. 하긴, 어차피 내가 전문 영화비평가도 아니고, 지극히 주관적인 것이 당연하다.

아무튼, 이 영화를 보는 내내 진한 감동의 눈물을 많이 흘렸다. 영화를 보면서 이토록 여러 차례에 걸쳐 울게 만든 것은 거의 내 인생에 처음인 것 같기도 하다. 물론, 영화를 보면서 눈물을 흘리기 시작한 것은 불과 수 년 전 부터다. 그 전까지만 하더라도 영화를 보면서 우는 경우는 거의 없었는데 그 대표적인 이유가, 영화를 보면서 우는 것은 왠지 내 자존심을 무너뜨리는 '애송이' 같은 행동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렇게 생각한게 더 '애송이' 같은데 말이다. 그러나 지금은 생각이 바뀌었고, 따라서 영화를 보면서 감동적인 경우에는 눈물을 참으려고 애쓰지 않고, 오히려 흘리려고 노력한다. 눈에서 뜨끈하고 끈적한 액체가 나올적마다 내 가슴에는 알 수 없는 평안함이 넘쳐나기 때문이다. 마치 상처가 난 곳에 빨간약을 바르면 따끔따끔한 통증은 있지만 벌써 치료가 된 듯이 심리적으로 안정되는 것과도 비슷하다. 하지만 그런 나에게도 대부분의 내가 봤던 영화는 점점 감정이 고조되다가 결국에 가서 한 번 터뜨리게 만들어 주었을 뿐이었다. 이 영화처럼 보는 내내 마치 영화 속에 내가 들어간 듯, 혹은 내가 주인공 Erin 교사가 된 듯, 감정이입이 이렇게 심하게 된 경우는 내 기억을 돌이켜 보건대, 처음이다.

영화의 시대적 배경은 1994년으로, 불과 2년 전에 LA 폭동이 일어난 후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을 다루고 있다. 그 때 당시, 인종간의 갈등이 얼마나 심했는지, 이를 놓고 서로들 '전쟁'이라고 표현하고, 각자 자신들을 '전사'라고 명명했다. 폭력과 살인이 난무했고, 서로 죽고, 죽이는 가운데 갈등의 골은 점점 더 깊어갔다. 자신과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들이 죽지 않으려면 먼저 적을 죽여야 하는 나름대로 이유와 명분이 있는 안타까운 현실이었다. 더 비참한 것은 이러한 갈등이 어른들 간의 문제만으로 국한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라나는 어린이와 청소년들에게 더 심하게 뿌리내려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학생들이 교육의 전당인 학교에서 지식을 연마하고 인격을 형성하는 시간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각각 생존하기 위해 철저히 몸부림 치는 시간을 보내게 된다. 사회의 오염된 현실이 학교에까지 깊숙이 침투하여 학교가 교육장소가 아닌 전쟁터가 되어 버린 것이다. 이러한 현실에 대해서도 교사들도 어떻게 해야할지 막막할 뿐이었다. 자신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긴 했으나,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 어느 누구도 과감히 '희생'을 하지는 못했다. 오히려, 현실과 학생들의 자질을 탓하며 자기 자신을 합리화하기 바빴다.

그 속에서 학생들이 무엇을 얻어나갈 것인가. 영화 속에서 Erin이 이런 말을 했던 것이 기억에 남는다.

"Why should they(student) waste their time to showing up(to the school) when they know we(teachers) are wasting our time teaching them."

교사가 학생들에 대한 사랑과 가르침에 대한 열정이 없다면 왜 학생들이 학교에 나와야 하느냐는 날카로운 비판이었다. 이런 마음을 지닌 Erin은 학생들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열정으로 그들을 양육하게 된다. 처음에는 겨우내 얼음장과 같이 차갑던 그들의 마음이 확실히 뜨거운 열정 앞에서는 점점 녹아지는 것을 보게 된다. 여기서 느낀점이 1.처음에는 누구나 고통스럽다. 그 시절에 절대 감정적으로 대응하지 말고, '인내'할 수 있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사실 그것이 말이 쉽지 실제로는 정말 쉽지 않다. 시간도 많이 걸리고 말이다. 사람 마음을 얻는게 어디 쉬운 일인가? 평생 혹은 죽을 때까지 안 될 수도 있다.

나의 경우를 얘기하자면, 처음 소대장으로 부임되어 갈 당시, 나의 마음에는 이러한 생각과 다짐으로 가득차 있었다. "그래, 섬기는 리더가 되어야지. 소대원들을 진심으로 사랑해야지." 그래서 부임해서 밥을 먹고 난 후에 내 식기는 내가 닦고,(이전 소대장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전투화도 내가 닦고, 누군가의 잘못에 대해 지적하게 되더라도 절대 감정적으로 하지 않고 이성적으로 합리적으로 하려고 했으며, 관용과 용서로 부대를 이끌어 가려고 노력을 했다. 그래서 처음에는 '다른 간부와는 다른 것 같다.' 는 소리를 줄곧 듣게 되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나의 그러한 노력을 비아냥거리거나 비판하는 무리들이 있었고 그것들은 나를 정말 지치고 힘들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것은 내가 과연 잘 하고 있는 것인가 라는 문제 의식이 들게까지 했다. 다른 어떤 소대장들은 강력한 카리스마로 소대원들이 찍소리도 못하게 휘어잡고 있다고 하는데, 내 부대를 돌아보면 - 물론 대놓고 나에게 반발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 그래도 자신의 불만을 그대로 표정으로 나타내거나 나의 말에 대해서 조소하는 병사들도 있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내가 군생활을 그들과 평생 하는 것도 아니고 소대장직은 일년만 하고나면 다른 보직으로 바뀌기 때문에 단시간 내에 나의 방식으로 모든 소대원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는 게 불가능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소대장 중반기에 접어들자 나의 방식에 대해 회의감에 자주 젖어들곤 했었다. 아니나 다를까, 이런 내 갈등에 어떠한 사건으로 불씨가 떨어지게 되었고, 그것은 주체할 수 없는 격한 감정의 불길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이전까지 그렇게 참고 인내하며 소대원들을 섬기려고 노력했던 나의 수고와 모든 노력들을 한 순간에 날려버리게 된 것이다. 그 사건으로 몇 명의 가슴에 씻을 수 없는 상처와 기억들을 안기게 되었고 그것은 나에게까지 화살로 돌아와 지금까지 안타까움과 후회로 앙금처럼 남아있다. 그래서 내 마음을 흔들때마다 뿌옇게 흐려짐을 느낀다. 내가 처음 가졌던 마음의 약속을 한 번 무너뜨리고 나자 다시 세우는 것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그래서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호흡이나마 유지하고 있던 내 영성이 혼수상태로 빠져들기 시작한 것이. 마음의 뿌리가 흔들리자 결국 삶의 모든 영역에서 악순환이 이어졌다. 여자친구와의 관계도 깨져버렸고, 세상적인 환락에 젖어들게 만들었다. 그 고리를 깨뜨리고 나오기까지 내 삶은 어둠과 불안의 연속이었다.

이처럼 자신이 처음 세웠던 마음의 약속을 계속해서 유지해 나가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 속 Erin처럼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그것을 이어나갈 때 열릴 것 같지 않은 학생들의 마음의 문이 열리는 것을 보게 된다. 내게 주어진 시간은 중요하지 않다. 내가 소대장을 일년만 한다고 할찌라도 그 시간 동안 내 마음의 약속을 허물지 않고 끝까지 인내하며 그것을 지켜 나가는 노력이 필요했음을 후회와 함께 절감한다. 일년이 된 시점에도 마음이 열린 소대원들도 있는 반면에 그때까지도 마음이 열리지 않은 소대원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내 마음에는 부끄럽지 않을 것이다.

두번째 생각할 점은, 2.그러면 어떻게 학생들을 향한 사랑과 열정을 유지해 나갈 수 있겠는가이다. 인간은 유한한 동물이다. 불완전하다. 그래서 위에서 내가 나의 마음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결국 무너져 버린 것처럼 주변에서도 이런 모습을 쉽게 목격할 수 있다. 그러면서 우리는 '역시 인간은 완벽할 수가 없어.' 라고 말하며 자신을 합리화한다. 그렇지만 그러한 한계를 극복하고 Erin처럼 학생들을 끝까지 사랑하고 교육하는 경우도 이따금씩 보게 된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까? 나와 Erin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우선 드는 생각은 인간의 힘과 노력과 의지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누군가의 도움이나 지원없이 혼자서 긴 시간동안 심리적인 압박과 갈등을 감당하며 그런 위업?을 달성할 수는 없다고 본다. Erin의 경우, 그녀의 아버지가 그 역할을 톡톡히 감당했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자신의 마음의 힘든 것을 속시원하게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 있는 존재, 그래서 마음의 짐을 함께 짊어질 수 있는 존재였다. 어차피 길을 걸어가는 것은 자기 자신이라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 그러나 길을 걷기 위해 필요한 힘과 에너지는 자기 스스로 공급하는데는 한계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존재가 필요하다. 그것이 때로는 Erin처럼 아버지나 어머니가 되기도 하고, 혹은 대부분의 많은 경우처럼 그 대상이 배우자가 된다. 그러나 그보다도 절대적인 존재, 하나님과 신실한 교제 속에 살아간다면 그것처럼 더 큰 지원자는 없을 것이다.

나 역시, 처음 소대장으로 갈 당시 내 마음의 약속은 하나님 앞에서 한 약속이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받았던 소망과 약속을 계속해서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이뤄나가도록 노력했어야 하는데, 실제로 부임지로 가서는 내가 받고 있는 마음의 짐들을 하나님 앞에 내어놓지 못했다. 달리 말하면, 기도하지 못했다. 말씀도 보지 않았다. 그러니 불과 수개월만에 탈진해버린 것이다. 만약 하나님과의 영적 사귐과 교제를 하면서 소대장 직분을 감당했다면 이야기가 정말 달라졌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과 영적 교제를 해 나가는 것도 하나의 큰 과제가 아닐 수 없다. 부모님이나 배우자나 혹은 다른 사람과는 달리, 하나님은 우리가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분을 믿게 될 때, 그 영향력은 실로 어마어마하지만, 그 분을 향한 믿음이 계속해서 유지되기 힘들기 때문에 그 영향력 속에 거하기가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또한, 혼자서 그 믿음을 유지해 나간다는 것도 결코 쉬운 것이 아니다. 그래서 하나님이라는 엄청난 카드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혼자가 아닌 신앙의 공동체가 필요하다.

아마도 어떤 이들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그렇게 유지하기 힘들다면, 그러면 차라리 그냥 부모님이나 배우자 혹은 친구로 만족하면서 살래 라고 말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이해가 된다. 복권을 사더라도 금액은 높더라도 확률이 낮은 것보다, 금액이 낮더라도 확률이 높은 것을 사는 사람들도 있지 않은가. 그리고 그게 더 합리적이라고 세상은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을 사귄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모르기 때문에 그렇다. 그리고 하나님을 사귀는 것이 마냥 어렵다고만은 볼 수 없다. 그분은 우리가 노력하지 않아도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 예수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냄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구원'을 '거저'주신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알도록, 자신을 느끼도록 '거저' 은혜를 주시기도 하기 때문에 그렇다.

또, 역으로 말해 사람을 의지하는 것은 물론 더 믿기 쉽고, 편리하다는 장점이 있지만, 사람은 유한하기에 얼마든지 우리를 배신할 수도 있고, 우리를 정죄하기 쉽고, 또 무엇보다도 우리는 그들의 죽음을 보게 된다. 흙으로 돌아가는 것들에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전부 의지할 수 없다. 즉, 사람을 의지하는 것에도 문제는 있다는 것을 지적한다.

그렇기에,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안다면, 그분을 향한 믿음과 열정이 얼마나 소중하고 귀중한 것인지 깨달을 수 있다. 마치 산악인들이 목숨을 걸고 히말라야 산 정상에 올라가는 이유와도 사뭇 비슷하지 않을까? 그 정상에 올라가본 사람들만이 왜 자신이 목숨의 위협을 감수하면서까지 이 험난한 산을 올랐는지 말로 표현하기 힘든 그 알 수 없는 매력을 맛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생각하고 싶은 것은, 3.열정 그 자체에 대해 짚어보고 싶다. 영화 속 Erin은 엄청난 열정을 보여준다. 그러한 열정은 뭐니뭐니해도 학생들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마음에서 비롯된다고 본다. 전병욱 목사님이 '사명'이 무엇인가에 대해 설명하면서, 자신이 안타까워하는 것이 바로 자신의 '사명'이라고 했다. 어떤 특정한 대상을 보면 알 수 없는 애틋한 감정에 휩싸이고, 눈물이 나고, 힘이 솟고, 의지가 불타는 곳, 그곳에 바로 자신의 사명이 있다는 얘기다. 즉, 그 감정상태를 달리 간단히 표현하면 자신의 사랑이 담긴 곳이다. 연인과의 사랑만해도 그렇다. 사랑하게 되면, 그 사람만을 생각하게 된다. 지금 그녀는 뭘 하고 있을까? 무슨 생각을 할까? 내가 좋은 것을 먹거나 보게되면, 대뜸 그녀부터 생각난다. '아, 함께 먹으면 좋을텐데... 아, 함께 보면 좋을텐데..' 예쁜 물건을 보게 되면, 그녀부터 생각난다. '그녀가 이거하면 좋을텐데...' 등등. 무엇이든 그녀 위주로 생각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사랑의 단적인 모습이다. 사랑하는 곳에 마음이 가게 되어 있다. 마음이 가면 말과 행동이 따라가고, 더 나아가 자신의 노력과 수고와 열심이 따라가는 것이다. 그 열정 가운데 창의력도 생겨나고 말이다.

Erin이 학생들을 사랑하자 학생들과 시간을 보내는 것이 너무나도 즐겁다. 그래서 학교에서 지내는 시간이 그녀에게는 너무도 행복하다. 학생들을 사랑하니까 학생들을 위해 뭐라도 더 가르쳐주고 싶고, 주고싶어 한다. 한 번은 학생들에게 책을 사주고 싶은데, 박봉의 월급으로는 감당할 수 없자, 백화점에서 브라자도 팔고, 호텔에서 수위도 보는 등의 부업들을 몇 가지를 더 하면서 돈을 벌어 학생들에게 책을 선물하기까지 한다. 또, 학과장과 학교장이 반대함에도 무릅쓰고, 교육감을 직접 찾아가 학생들과 함께 '수학여행'을 할 수 있도록 허락까지 받아내어, 그 때까지 삶의 울타리에서 나가본 적 없는 학생들에게 더 넓은 세상을 보여주고, 그들의 생각의 폭을 넓혀주기까지 한다. 또, 그녀가 학생들을 사랑니까 창의력도 불쑥불쑥 솟아나오는 것을 보게 된다. 학교 정규과정에도 없는 다양한 활동들을 창안해 내어 학생들이 좀 더 즐겁고, 생생한 교육을 받도록 제공한다. 예를 들어, 학생들이 일기를 쓰게 한다든지, - 그래서 영화 이름이 'Freedom Writers'이다 - '안네의 일기'에 나온 실제인물을 독일에서부터 초빙해오기 위해 학생들과 Fund Raising Event를 연다든지 등등의 일들은 사랑과 열정 그리고 희생 없이는 절대 나올 수 없는 창의적인 것들이다.

나 역시 비슷한 경험이 있다. 부대원들을 생각하면 할 수록 그들을 위해 무언가 더 해주고 싶었다. 사병들이 군대에서 2년 이라는 시간을 허송세월 버린다고 생각하지 않도록, 자기 발전할 수 있는 시간과 여건을 마련해 주기 위해 노력했던 기억이 있다. 한번은 내 사비를 털어서 '일기장'을 사서 부대원 한명 한명 다 나눠주기도 했고, 또 누군가가 영어회화에 대한 열정과 관심이 있어서 직접 서점에 가서 관련 책자를 사서 주기도 했다. 또 좋은 영화(혹은 최신영화)를 선별하여 매주말마다 상영시켜 주었고, 또 한 번은, 부대원 가운데 주식에 대해 공부를 열심히 하는 친구가 있어서, 부대원 전체를 모아놓고 그 친구가 하는 '주식 강의'를 듣도록 했다. 이것은 강의를 듣는 사람 뿐만 아니라 준비하는 사람에게도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는데, 그 이유는, 누군가를 가르치면 자신이 더 배우게 되기 때문에 그렇다. 또, 부대원들의 체력관리를 도모하기 위해 '체력단련표'를 만들어서 체력단련을 꾸준히 성실하게 한 사람들은 포상을 주기도 하고, 또 부대원 가운데 저체중이나 과체중 인원들이 정상체중을 갖도록 하기 위해 매주 금요일 6시에는 체중계로 체중을 한명 한명 확인하며 체중 변화를 함께 보면서 그들을 독려했다. 2주간마다 체중을 가장 많이 뺀 사람은 포상도 주었고, 만약 체중 변화가 없는 경우는 '매복'이라는 벌칙 겸 체력단련의 시간을 부여하기도 했다. 나중에는 사병 대부분 정상 체중으로 돌아왔고, 그들 중에는 10kg이상 뺀 인원이 세 명이나 되었다. 그 밖에도 크고작은 많은 일들이 있지만 다 나열하지는 않겠다. 다만, 하고싶은 얘기는 확실히 사랑하는 마음이 있을수록 내 관심과 행동이 따라가고 또 창의적인 것들도 생겨났다는 것이다.

하지만 Erin만큼은 아니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 보건대, 여전히 내 울타리가 있었고, 그들을 사랑하면서도 그 뒤에서는 내 것을 챙기고 내 것을 생각하기 바빴던 것 같다. 다시 말하면, 사랑에 올인하지 못했다. 그런 내 상태를 영화와 접목해서 내가 만약 Erin이라면 학생들을 사랑하면서도 남편과의 관계가 허물어지지 않을 정도에 한해서 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안타깝게도 Erin은 그녀의 사랑을 학생들에게만 집중하자, 그녀의 남편이 이혼을 결심하고 결국 이혼하게 되었다. 그녀의 남편 입장에서는 그녀의 사랑을 자신에게 집중해주길 원한 것이다. 이해는 되면서도 한편으로는 두렵기도 하다. 왜냐면, 나의 소망은 하나님을 위해 나의 모든 것을 올인하고 싶다는 것이다. 양떼들을 먹이다보면, Erin처럼 자연히 가정에 소홀하게 되고, 그것은 곧 아내와 아이들이 불행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걱정된다. 그렇다고 가정이라는 울타리를 쳐놓고,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하기란 지금 생각같아서는 '온전한 헌신'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다. 과연 하나님은 무엇을 원하실까 궁금하다.

Erin과 같이 양떼들을 먹이는 것에만 집중해야 하는가? 하지만 하나님은 '가정' 이라는 공동체를 주시지 않았는가? 지금도 많은 수의 소위 신실한? 목회자들을 보면 가정에 소홀한 경우가 많다. 사랑의 교회 옥한흠 목사님의 경우도 새벽일찍부터 교회에 나가면 자정이 다 되어서야 집에 들어왔다고 하고, 장경동 목사님의 경우도 부흥회 인도로 인해 일주일 가운데 사나흘은 밖에서 잔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가정의 경우 아내의 헌신적인 인내와 희생이 있었기에 가정이 깨어지지 않고 유지될 수 있음을 보게 된다. 하지만 그것이 올바른 것인지 지적해보고 싶다. 왜 아내만 그렇게 희생해야 하는가?

어릴 적부터 목회자이신 아버지와 사모라는 명칭을 가진 어머니를 보면서 많은 갈등을 했다. 아버지는 저렇게 밖에서 활동적으로 사시는데, 어머니는 매일 집에서만 밥하고, 빨래하고, 자식들 투정 받아주고, 뭘 하시는가 말이다. 어머니의 인생은 도대체 왜 이 모양일까? 그런 어머니의 모습을 보면서 괜시레 화가 나기도 했다. 그리고 어린 마음에 생각하기로는 내가 이 다음에 커서 결혼하게 되면 내 아내는 어머니처럼 살게 하지 말아야겠다 다짐했었다. 하지만 지금 내가 하나님의 사역에 '올인'해야 겠다고 생각하다보니, 아버지보다 더 아내의 희생을 요구하겠구나 싶다. 이는 비단, 목회자들 뿐만 아니다. 오히려 세상에도 이런 종류의 사람은 더 많다. 예를 들어, 사업가들이 대표적이다. 사업체를 세우고, 이끌어가기 위해 얼마나 큰 노력과 헌신을 필요로 하는가. 따라서 그들 중에 가정에 소홀한 경우가 허다하다. 비록, 사업체가 잘 나가고, 굴지의 회사가 되었다고 할지라도 가정이 파탄나고 무너지면 그 인생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물질이라는 것은 유한한 것 아닌가. 물질이 좋긴 하다. 삶을 편안하게 만들어 주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그러나 물질의 많고 적음이 행복에 직결되는 것은 아닐 뿐더러, '부자 3대 못간다.'는 말도 있듯, 물질의 노예가 된 아버지와 함께 사는 가족들이 건강한 자아감과 삶의 자세를 겸비해 나가는 것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물질과 성공'을 사랑하여 그것에 올인하는 것은 바른 가치관이 아니다.

가정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고, 하나님께서 그 가정을 유지하기 위해 한 사람의 희생만을 요구하시지 않을 것이라고 본다. 성경에도 '피차 복종하라'고 했고 또,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가 교회를 사랑하심같이 하라'고 말씀하셨듯이, 아내를 그렇게 사랑한다는 말은 아내의 희생을 전적으로 요구하라는 말은 아닐 것이기 분명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지금 결론짓기로는 만약 결혼을 해서 가정 공동체를 세우게 되면, 가장 이상적인 것은 같이 한 곳을 바라보며 동역을 하는 것이지만, - 즉 Erin의 남편이 Erin의 아버지와 같이 Erin을 도와주고 협력해주는 관계 - 대부분 그렇게 되기 힘들 것이라는 가정 하에, 가정을 건강하게 세우고, 하나님의 양떼를 돌보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즉, 이 말은 어떻게 보면, 양떼를 돌보는 일에 '올인'하지 말라는 말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자신의 가정을 무너뜨리면서까지 양떼에 '올인'하는 것은 결코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다.

물론, 사랑을 하면 그 곳에 마음도 노력도 시간도 물질도 정성도 가기 마련이다. 즉, 양떼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으면 그들을 위해 헌신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랑이 지속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주신 공동체, 가정을 먼저 건강하게 세우지 않으면 안된다.

영화는 Erin이 처음 교사로 부임해 들어가서 4년 동안 같은 학생들을 졸업시키기까지의 일대기를 다루고 있다. 그 4년 동안 Erin은 학생들에게 '올인' 하면서 다른 교사들이 볼 수 없던 놀라운 성과를 나타내었음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그 4년 이후의 Erin 교사의 삶과 열정이 어떻게 되었는지 모른다. 다만, 그녀가 최초 4년 동안 보여 주었던 그러한 열정과 사랑이 지금도 계속 이어지고 있을까라는 의구심이 든다. 4년간 그녀의 물불 가리지 않던 열정으로 인해 결국 그녀의 남편과의 관계는 깨어지고 가정은 무너졌다. 비록 아버지가 곁에 계시긴 하지만 언제까지는 함께 하시는 분은 아니다.

여기서 나는 Erin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그 때 그녀를 그 누구가 말릴 수 있겠는가? 그녀의 가슴 속에는 이미 학생들을 향한 불타는 사랑으로 가득차 있었는데 말이다. 오히려 그것을 말리면 불난집에 부채질 하는 것과 동일하다. 따라서 내가 하고 싶은 얘기는, Erin이 학생들을 만나서 그들에 대한 사랑과 열정에 불 붙이기 전에, 좀 더 바른 가치관을 소지했더라면 어땠을까라는 아쉬움을 얘기하고 싶다. 즉, 더 건강한 '가정관'과 '교사관'을 가지고 있었다면 학생들을 살릴 뿐더러, 그녀의 가정까지 살리는 삶을 살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 누가 완벽하겠는가. 불완전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세상 아닌가. 다만, 그 속에서 좀 더 나은 방법을 찾고 인생 선배들을 걸어갔던 삶의 발자취를 보면서 그들이 경험한 똑같은 실수를 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영화 'Freedom Writers'는 마치 내 이야기와 같고, 내가 경험했던 것, 내가 저질렀던 실수, 나의 부족한 부분들, 앞으로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심적 부담감, 그리고 방향성까지 보여주면서, 결국 눈물로 보게 만든 내 인생에 보물과도 같은 영화였다.

영화를 보게 하신 주님께 감사드린다.

The Brave Heart, 1995

Director. Mel Gibson

Cast. Mel Gibson, Sophie Marcea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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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 과감히 돌아설 수 있는 용기.

살아가면서 그것이 옳지 않은 것인지 알면서도 그것과 타협하며 살 때가 얼마나 많은지 느낀다. 때로는 그런 내 모습을 놓고, '아직 때가 아니야.'라고 타일르기도 하고, 또 때로는 '만약 내가 틀린 거면 어떡하지?'하며 자신의 용기 없음을 합리화 할 때가 많다.

간디가 용기와 관련해서 이런 말을 했다. 말할 수 있는 용기; 행동할 수 있는 용기; 고난을 감수할 수 있는 용기; 모든 것을 버리고 홀로 남을 수 있는 용기.

과연 나는 용기 있는 사람인가. Brave Heart의 소유자이고 싶다. 비난과 경계의 따가운 시선 속에서도 떨지 않는 담대함의 소유자이고 싶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반석과도 같은 믿음의 소유자이고 싶다. Brave heart. 참으로 매력적인 단어가 아닐 수 없다.

열의 성질이 그러하듯, 열정은 열정이 없는 곳으로 전이되기 마련이다. 다시 말하면, 열정이 없는 사람들은 열정을 가진 사람으로부터 영향을 받게 된다는 말이다. 그게 자연의 이치다. 그러나 누구나 그런 열정을 소유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열정을 가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자신의 마음을 단련시키지 않으면 안된다. 물론 개인적인 차이는 있을 것이다. 누구는 선천적으로 타고난 용기를 가지고 태어날 수도 있다. 그러나 거기에도 한계는 분명히 있다. 흔들리지 않는 확신과 믿음은 숱한 실패와 자기 반성, 그리고 말못할 마음의 상처와 그 상처가 아무는 과정이 수도 없이 연속되면서 단련되어진 결과물일 것이다. 마치 탄소덩어리가 오랜 시간동안 땅 속 깊은 곳에서 엄청나게 뜨거운 지열과 커다란 지압을 견디어 내어 결국 세상에서 가장 값비싼 보석, 다이아몬드가 생겨나는 것과 같이 말이다.

옛 말에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기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맹자가 했던 말로 그 뜻은 마음이 평온하고 너그러운 화기和氣를 뜻한다. 여기서 기氣는 매우 광대하고 강건하며 올바르고 솔직한 것으로서 이것을 해치지 않도록 기르면, 우주 자연과 합일하는 경지라고 표현했다. 즉, 호연지기를 다시 쉽게 정리하자면, 마음의 힘을 기르는 것이라고 보면 된다.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진흙에 더렵혀지지 않는 연꽃처럼,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불경, 숫타니파타

이 말 역시 심지가 굳은 마음 상태를 의미한다고 본다. 깊은 바다 속과 같은 상태라는 말도 같은 맥락이다. 거센 폭풍우로 인해 얕은 수면은 난리 부르스를 치더라도, 깊은 수면은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냥 고요할 뿐이다.

성경에서도 물론 마음에 대해 강조한다. 그 중 대표적인 말씀 구절이 바로 이것이다. "모든 지킬만한 것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언4:23

지금까지 마음에 대해 여러가지 비유로 말을 하긴 했지만 이것을 간단하게 정리해서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결국 마음의 힘을 기르라는 말이다.

여기서 잠깐 다른 얘기를 하고 넘어가겠다. 위에서 말한 깊은 바다 속에 대해 다른 견해가 있다. 깊은 바다 속과는 달리 수면이 얕은 곳에서는 바람과 파도의 영향을 많이 받는 다는 것, 아니 많이 정도가 아니고 바람 하나하나에 좌지우지 되는게 얕은 바다의 특징이다. 그것을 놓고 일반적으로는 안좋게 평가를 하지만, 또 다른 시각으로는 그런 파도가 있기 때문에 파도타기도 할 수 있고, 그런 바람이 있기에 배가 나아갈 수도 있고, 물도 순환한다는 점을 언급하고 싶다. 즉, 얕은 바다라고 해서 무조건 비난할 수만은 없다는 점을 지적한다. 마음이 흔들리기 때문에 갈등이 있고, 그 갈등이 있기 때문에 다이나믹한 역동적인 삶을 또한 살아갈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인생을 살아가는데 있어 조금의 스트레스도 없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정신병원에나 갈 소리다. 어느정도의 스트레스는 오히려 삶에 자극이 되고, 도움이 된다. 마치 소량의 독도 약으로 쓰듯이 말이다.

한데 위에서 얕은 바다에 대해 옹호하는 얘기를 했다고 내가 마음을 지키는 것에 있어 완전히 반론을 제기하는 건 아니다. 다만 그런 측면이 있다는 것을 제기할 뿐이지, 마음을 지켜야 한다는 것에는 이견이 없다. 다만, 마음을 지키지 못해서 문제일 뿐이다. 마음은 굴뚝 같지만. 내 마음 내 마음대로 안되는게 현실이다. 가시나무 노래 가사처럼 '내 속에 내가 너무도 많다.' 그 누가 자신의 마음을 완전히 지키겠는가. 인간의 몸으로 오신 하나님조차 마음이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시지 않았는가.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면서 육신의 고통이 너무 극심하자 이렇게 울부짖으셨다. "엘리 엘리 나마사막다니!(아버지여, 왜 나를 버리시나이까!)"

기독교적 신앙에서 흔들리지 않는 신념, 혹은 마음을 가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 비법은 바로 기도이다. '하나님의 대사'라는 책을 쓰신 김하중 전 주중대사가 말씀했듯이 리더는 반드시 기도해야 한다. 왜냐면, 기도하지 않으면 어디로 가야 할지를 모르고, 가야 할 방향을 모르면 담대할 수가 없기 때문에 그렇다. 사람은 겉으로는 강한 것 같지만 한치 앞도 내다 볼 수 없는 유한한 존재이기 때문에 도저히 기도하지 않고서는, 하나님 안에서 확신의 영으로 충만해지지 않고서는 분명코 용기없는 자로 전락해 버리고 만다.

확신의 찬 목소리로 사람들에게 다가설 때 비로소 사람들은 그 말을 따라갈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영화에서도 얘기했듯이, 단지 사회적 연결고리(신분)에 얽메여서 혹은 이해관계(가족과 재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따라가게 된다. 그것은 매우 가변적일 뿐더러 양측 모두 가슴에 뜨거움이 생기기 힘들다. 마치 벌레가 불빛에 자연적으로 몰려들듯이, 모든 사람들 또한 열정을 소망하고 있다고 믿는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은 열정고픈이들인 셈이다.

따라서 나는 나 자신이 확신의 찬 목소리를 소유한, Brave heart를 소유한, 그리고 기도하는 자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Planet Earth BBC, 2007



Disc 1 : From Pole to Pole; Mountains; Fresh Wa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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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alm 104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는 심히 위대하시며 존귀와 권위로 옷 입으셨나이다
주께서 옷을 입음 같이 빛을 입으시며 하늘을 휘장 같이 치시며
물에 자기 누각의 들보를 얹으시며 구름으로 자기 수레를 삼으시고 바람 날개로 다니시며
바람을 자기 사신으로 삼으시고 불꽃으로 자기 사역자를 삼으시며
땅에 기초를 놓으사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하게 하셨나이다

옷으로 덮음 같이 주께서 땅을 깊은 바다로 덮으시매 물이 산들 위로 솟아올랐으나
주께서 꾸짖으시니 물은 도망하며 주의 우렛소리로 말미암아 빨리 가며
주께서 그들을 위하여 정하여 주신 곳으로 흘러갔고 산은 오르고 골짜기는 내려갔나이다
주께서 물의 경계를 정하여 넘치지 못하게 하시며 다시 돌아와 땅을 덮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여호와께서 샘을 골짜기에서 솟아나게 하시고 산 사이에 흐르게 하사

각종 들짐승에게 마시게 하시니 들나귀들도 해갈하며
공중의 새들도 그 가에서 깃들이며 나뭇가지 사이에서 지저귀는도다
그가 그의 누각에서부터 산에 물을 부어 주시니 주께서 하시는 일의 결실이 땅을 만족시켜 주는도다
그가 가축을 위한 풀과 사람을 위한 채소를 자라게 하시며 땅에서 먹을 것이 나게 하셔서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포도주와 사람의 얼굴을 윤택하게 하는 기름과 사람의 마음을 힘있게 하는 양식을 주셨도다

여호와의 나무에는 물이 흡족함이여 곧 그가 심으신 레바논 백향목들이로다
새들이 그 속에 깃들임이여 학은 잣나무로 집을 삼는도다
높은 산들은 산양을 위함이여 바위는 너구리의 피난처로다
여호와께서 달로 절기를 정하심이여 해는 그 지는 때를 알도다
주께서 흑암을 지어 밤이 되게 하시니 삼림의 모든 짐승이 기어나오나이다

젊은 사자들은 그들의 먹이를 쫓아 부르짖으며 그들의 먹이를 하나님께 구하다가
해가 돋으면 물러가서 그들의 굴 속에 눕고
사람은 나와서 일하며 저녁까지 수고하는도다
여호와여 주께서 하신 일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주께서 지혜로 그들을 다 지으셨으니 주께서 지으신 것들이 땅에 가득하니이다
거기에는 크고 넓은 바다가 있고 그 속에는 생물 곧 크고 작은 동물들이 무수하니이다

그 곳에는 배들이 다니며 주께서 지으신 리워야단이 그 속에서 노나이다
이것들은 다 주께서 때를 따라 먹을 것을 주시기를 바라나이다
주께서 주신즉 그들이 받으며 주께서 손을 펴신즉 그들이 좋은 것으로 만족하다가
주께서 낯을 숨기신즉 그들이 떨고 주께서 그들의 호흡을 거두신즉 그들은 죽어 먼지로 돌아가나이다
주의 영을 보내어 그들을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

여호와의 영광이 영원히 계속할지며 여호와는 자신께서 행하시는 일들로 말미암아 즐거워하시리로다
그가 땅을 보신즉 땅이 진동하며 산들을 만지신즉 연기가 나는도다
내가 평생토록 여호와께 노래하며 내가 살아 있는 동안 내 하나님을 찬양하리로다
나의 기도를 기쁘게 여기시기를 바라나니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리로다
죄인들을 땅에서 소멸하시며 악인들을 다시 있지 못하게 하시리로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할렐루야

그 해 여름, 2006



조근식 감독

이병헌, 수애 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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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엔 이손 절대 놓지 말아요.

나 잘 있어요, 내 걱정 말아요, 나 행복해요.

그러면 안 되는데 내가 기다려서 석영씨가 돌아왔나봐요.

그게 가장 걱정이돼. 그녀가 외롭게 살았을까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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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찐한 감동이 있는 영화였다. 민주화항쟁 시대에 이념적 차이로 이뤄질 수 없었던 그들의 안타까운 사랑을 보면서, 정말 사람이 살만한 사회가 어떤 사회인가, 그리고 앞으로 어떤 사회를 만들어 나가야 하는가 느낄점을 시사해준다. 짧게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눈에 보이지 않는 이념으로 인해 사람 간에 자유로이 사랑을 할 수 없게 하는 사회는 결단코 용납될 수 없다는 것이다.

Oceans, 2010



Before we ask, "What is ocean?", we should ask, "Who we a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