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rtle: The Incredible Journey, 2009

바로 정리를 했어야 하는데, 시간이 조금 지났다. 그래서 영화를 보면서 쓰고 싶었던 내용이 있어는데 기억이 불투명해졌다. 그렇다고 영화를 다시 보는 것은 무리일 것 같다는 생각이고, 그냥 최대한 기억을 더듬어서 쓰는게 좋겠다.

자연 관련 영화 또는 다큐멘터리는 언제 보아도 흥미진진할 뿐더러 감동까지 있다. 동물이나 자연의 자연스런 광경만 보아도 그 속에 수많은 배울점과 느낄점이 있기 때문이라고 본다. 거짓이 없고 진실된 그들의 모습을 보면 나 또한 진실해지지 않을 수 없음을 느낀다.

이번 영화의 경우 '바다거북'이라는 하나의 객체를 놓고 집중적으로 다뤄준다. 영화는 바다거북의 출생, 성장, 출산, 죽음 등의 과정을 순차적으로 조명해 주고 있다.

먼저 생각해 보고 싶은 부분은, 거북이가 탄생한 후에 누가 알려준 것도 아닌데 바로 바다로 뛰어들어가는 장면이다. 태어난 곳에서 바다까지의 거리는 불과 수십미터. 하지만 그 짧은 시간 동안 수많은 새끼 거북이들이 갈매기나 게와 같은 무리로부터 사냥을 당해 죽음을 당하는 것을 보게 된다. 하지만 그렇게 허무하게 죽어도 어느 거북이도 그 죽음에 대해 통곡하는 모습을 찾아 볼 수 없다. 그냥 '죽으면 죽는가보다.'하는게 거북이들의 모습이다. 물론 살기 위해서 발버둥 치기는 한다. 열심히 도망다니고 필사적으로 바다로 뛰어들어간다. 하지만 채 꽃도 피워보기 전에 허무한 죽음을 맞게 되더라도 어느 거북이 하나 거기에 대해 일체 반항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그냥 모든게 자연스럽게 흘러만 간다.

이 모습을 생각하면서 동시에 어제 봤던 드라마 '나쁜남자'가 떠올랐다. 자신의 부모와 자신이 아끼던 한 여자의 죽음에 대해 분노심과 적개심이 불타올라, 그들을 죽음으로 몰고 갔던 장본인들을 향해 계란으로 바위치는 격이 되더라도 무조건 복수를 하겠다는 즉, '와신상담'하는 내용이었다. 비록 극중 주인공이 자신이 지금 하고 있는 행위가 나쁜 것임을 알지만 복수심에 사로잡혀 있다보니 벌을 받더라도 복수는 하고 벌을 받겠다고 말하는 지경에 이르게 됨을 볼 수 있었다.

형사가 복수를 하려는 그를 막기 위해 이런 말을 했다. "부모님이나 누나가 당신이 복수해 주기를 원할까요?" 그러자 그는 이렇게 대답한다. "무슨 상관이에요. 어차피 그들은 다 죽었는걸요." (정확한 대사는 아니다.) 즉, 다 죽었기 때문에 자신이 복수를 해 주길 원하거나 원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 논리라면 사실 그가 복수를 하려는 것은 부모나 누나를 위해서라기 보다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라는 것이 맞다. 자신의 자존심을 살리기 위한 몸부림인 것이다.

또한, 어제 본(어제 영상을 좀 많이 봤다) '모범시민'이라는 영화 스토리 라인도 이와 비슷하다. 자신의 아내와 딸이 강도로부터 허무하게 살해당하자 10년이라는 긴 시간동안 철저하고도 치밀하게 계획하여 세상에 반항하며 복수하는 내용이었다.

정리하면, 사람은 죽음에 대해 그리고 특히나 허무한 죽음에 대해서는 통분하기 마련이다. 거부반응을 일으키고, 화를 내고 분노를 표출하는게 자연스럽고 인간적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이것이 바다거북이와 극명하게 대조되는 부분이다.

하지만 적어도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있다면 거북이와 같아야 하지 않느냐는게 내 생각이다. 왜냐하면, 주신자도 하나님이시고 다시 취하신 자도 하나님이신데, 왜 인간인 우리는 하나님이 다시 취해 가실 때마다 이렇게까지 심한 격분에 잠겨야 하는가 말이다. 원인이 어떻게 되었든, 어떤 죽음이 되었든 거북이와 같이 초연한 자세로 살 수는 없는가? 그것은 비인간적인 것인가? 인간적이라는 것은 무언가 도대체? 너무 추상적인가? 그럼 적어도 기독교적 관점에서 본 인간적이라는 것은 무언가?

거북이도 인간도 똑같은 피조물 아닌가? 물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받은 특별한 존재이긴하다. 그럼에도, 하나님이 창조주라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 하나님과 인간 과의 관계가 틀어진 장본인인 선악과 사건에서 보아도 모든 인류의 죄악은 인간이 하나님과 같아지려는 욕망에서 나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창조주와 피조물과의 관계 혹은 질서가 흐트러진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과연 인간이 자신의 교만함, 자기중심적 사고, 자존심을 뿌리 뽑을 수 있겠는가 말이다. 물이 엎질러지면 다시 되담을 수 없는 것 아닌가. 선악과를 먹었으면 이미 먹은 것 아닌가. 물론, 이 때문에 예수님이 오셔서 그러한 잘못된 관계를 바로잡을 수 있는 길을 제시하고 가셨지만 지금의 생각 같아서는 과연 그것이 가능한지 의문이다.

그래도 기독교인으로서 인간의 몸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그것을 가능하게 하셨으니, 나 역시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믿고, 또 그대로 따라 살도록 해야할 것임을 재강조한다. 나 자신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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