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알지 못했던 예수, 필립 얀시

"나는 그리스어와 라틴어로 된 신화를 수십 편 읽었지만, 복음서는 그 어느 곳에서도 단순한 신화에 불과할 뿐이라는 느낌은 받지 못했다... 뭔가 진정한 '사건'이 그 뒤를 받쳐주지 않았다면 아무도 그처럼 유치하고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쓰지 않았을 테니까." - J.B. Phillips

*사전삽입: 미래 장면을 미리 보여주는 영화의 한 기법
내가 내린 결론에 의하면, 예수에 대한 우리들의 사고와 글 쓰기에서 드러나는 대부분의 문제는 바로 그와 같은 사전 삽입의 태도에 있다. 우리는 니케아, 칼케돈 회의라는 사전 삽입의 렌즈를 통해서, 혹은 예수를 이해하고자 교회에서 수없이 진행돼 온 학습이라는 사전 삽입의 렌즈를 통해서 복음서를 읽으려 한다.

"그(예수)는 유대인인었으나, 그의 추종자들은 유대인이 아니었다는 그 사실은 아무리 생각해도 대단한 모순이다." - 볼테르

"신은 누구를 낳지도, 누구에 의해서 태어나지도 않았다." - 이슬람교, 유대교 주장

"...그런데 그(예수님)는 하나님만이 경배받아야 한다는 이유로 그 제의를 일축해 버렸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히4:15; 2:18)

"예수는 다른 이들을 위한 사람이었다." - 본 훼퍼
예수는 어떤 문둥병자에게 돌연 연민을 보이는가 하면, 제자들의 성공에 과도한 감정을 표하고, 냉랭한 율법주의자들에게 불같이 화를 내는가 싶다가, 받아들이지 않는 성읍을 보고 탄식하며, 겟세마네나 십자가 위에서는 두려움으로 고통의 소리를 내지른다.
그는 자신의 두려움을 숨기지도, 남에게 도움을 요청하기를 주저하지도 않았다.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마26:38)
칭찬에 인색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기적을 행하고도 그 공덕을 종종 수혜자에게 돌렸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마9:22)
여자와 아이들을 향한 섬세한 감수성.
그는 스스로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주장했으면서도 여느 사람들과 다름없이 먹고 마셨을 뿐 아니라 피곤해 하고 외로워하기까지 했다. '편함' + '불편함'

<그는 아래 갈릴리의 한 작은 마을로 들어선다. 그 마을에는 아직 그의 존재가 알려지지 않았다. 어디가지가 가난이고 또 어디까지가 빈곤인지 정확히 알 만큼, 생존이라는 차원에서 충분히 오래 살아온 농부들이 차갑고 견고한 시선으로 그를 지켜 본다. 농부들이 보니 그는 영락없는 비렁뱅이 아니던가. 하나 여르 비렁뱅이라면 예외없이 가지고 있을 비굴한 눈빛도, 처량 맞은 음성도, 굼뜬 걸음걸이도 그에게는 보이지 않으니 어찜일까. 그는 하나님의 통치에 대해 말하고, 그들은 어떤 일이 있을 경우 늘 보여 오던 정도의 호기심을 갖고 경청한다. 그들은 모두 통치나 권력, 나라나 제국에 대해 알고 있지만, 정작 세금이나 빚, 영양부족이나 질병, 지주와의 소작분쟁이나 귀신들림 따위의 말들과 연관해서만 알 뿐이다. 이 하나님의 나라라는 것이 과연, 다리 저는 한 아이나 눈먼 부모, 마을 외곽의 무덤들 사이에 격리되어 고통스럽게 절규하는 광기 들린 영혼에게 무슨 소용이 있는지 그들은 정말 알고 싶은 것이다.> - 존 도미닉 크로산

예수는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기적을 사용하는 일에는 주저함이 없었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요14:11)

예수는 위대한 선생 - 시인 존 배리먼John Berryman '간명, 정확, 전율, 독창'

(평범하지만 비범한 사람)

J.B 필립스
약삭빠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이 세상에서 지위가 오를 것이요
무정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는 상처를 받지 않을 것이요
불평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는 마침내 제멋대로 갈 것이요
환락에 빠진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는 죄를 갖고 고민하지 않아도 좋을 것이요
노예를 가진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그 노예들이 수고한 대가를 누릴 것이요
유식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어떻게 처신하는지 알 것이요
말썽을 일으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를 사람들이 알아줄 것이다.

* 간디 - 찰리 앤드류스 선교사 일화
두 사람이 남아프리카의 한 도시를 아야기 나누며 걷고 있는데 갑자기 깡패들이 나타나 이들을 둘러싸는 것이었다. 앤드류스 목사는 이 깡패들을 보자마자 자리를 피해 달아나려 했다. 그러자 간디가 그를 말렸다. "신약성경에 원수가 한쪽 뺨을 치면 다른 뺨도 대라고 하지 않던가요?" 앤드류스 목사는 그 구절은 은유일 뿐이라고 생각했노라며 "글쎄요"라고 했다. 그러자 간디가 다시 말했다. "제 생각엔 예수께서 우리더러 용기를 보이라는 말씀이신 것 같습니다. 한 대 맞고, 한 대 아니라 여러 대라도 맞고, 그러면서도 물러서지 않는 용기. 그러노라면 상대방 내부의 인간 본성, 증오는 가라앉고 존경심을 일으키게 하는 무언가가 깨어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이 점을 아셨던 게 아닌가 하고 생각합니다. 저 자신도 실제로 그렇게 된다는 것을 많이 보아 왔습니다."

"그리스도의 말씀대로 살아가는지의 여부는 우리가 온전함에 도달하기 위한 관정에서 우리 자신의 나약함을 우리가 알고 있는지에 달려 있다. 우리는 우리가 얼마나 온전한지 눈으로 확인할 수 없다. 다만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그 온전함으로부터 얼마만큼 비켜 서 있는지일 뿐이다." - 레오 톨스토이

* 톨스토이 일기
- 톨스토이는 완벽주의를 실현하고자 그렇게도 애써 노력했지만 마음의 평화와 평정은 얻지 못했다. 죽을 때 임박해서 쓴 그의 일기와 편지는 자신의 실패에 대한 비관적인 내용으로 가득차 있다. 그가 자신의 신앙에 대해 글을 쓰거나 그 신앙대로 살고자 했을 때, 느껴지는 이상과 현실과의 괴리는 그를 악령처럼 괴롭혀 댔다.

결국 나는 복음이 우리 삶에 더욱 무거운 짐을 더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복음이 세상의 문제들을 해결해 줄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돈문제, 인종문제, 정의 등에 관련해서 기독교의 복음은 오히려 우리를 힘겹게 만든다.

하지만 톨스토이는 '복음의 이상대로 살 수만 있었다면 ... 내가 그럴 수만 있다면' 하는 희망을 한순간도 놓지 못한 사람이었다.

신앙인의 삶 한가운데는 오히려 역설이 놓여 있다. 톨스토이를 통해 나는 내면을 들여다보게 되었고 하나님 나라가 그 안에 존재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고귀한 복음의 이상을 따르기에는 내가 얼마나 부족하며, 비참한 존재인지도 알게 되었다. 하지만 도스토예프스키를 통해서 나는 주의 인자하심을 깨달았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8:1) 이 메시지는 결코 톨스토이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5:48)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너희 주 하나님을 사랑하라"(마22:37)
하지만 그 누구도 이러한 가르침을 온전하게 따르지 못했다. 톨스토이도, 아사시의 프란시스도, 마더 테레사도 마찬가지. 하짐나 자비로운 예수는 한없는 은혜를 우리에게 베풀고 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

여러 해 동안 나는 산상수훈이 인간이 지켜야 할 지침을 제시하는 청사진이지만, 그것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말을 다시 읽으면서 나는 예수가 단지 우리에게 신앙의 빚을 지우려고 그런 말을 한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게 하려고 산상수훈을 전한 것임을 깨달았다. 산상수훈에는 하나님이 어떤 존재인지 그 원형이 나타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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