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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이기적 욕심을 따라 사는 것은 인생의 진정한 성취와는 관계가 없다. 오히려 그런 야망만을 좇아 다니면 진정한 자아를 성취할 수 없다. 인생의 진정한 성취는 하나님 안에서 자신의 참 모습을 발견하고 그 동안 추구해 온 야망들을 포기할 때 시작된다.
하지만 현실은(주류는) 자신의 이기심을 따라 살고 있다는 것이다. 더 중요한 사실은 그러한 이기심에 의해 인간의 과학과 문명이 여기까지 발전해(?) 왔다는 것이며, 이러한 움직임은 앞으로도 계속 유지될 것임이 분명하다. 따라서 과연 자신의 야망이 포기된/배제된 인생이 현실적으로 가능한 것인가 질문을 던져본다. 더 나아가 자신의 야망을 포기하다는 것이 정확하게 어떤 의미인지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거룩한 야망만으로 이루어진 세상은 과연 어떻게 흘러갈 것인지? 그리고 만약 거룩한 야망만에 따라온 역사라만 과연 오늘 날 어떤 모습일지 궁금하다.
세상적인 기준으로 보면 우리는 점점 작아지지만 개의치 않는다. 하나님의 기준에서는 점점 커지고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맞다. 이것이 바로 핵심이자, 진리다! 다만, 자신의 세상적 기준이 높아질 수록 그것을 내려놓는게 더 힘들어 진다는 것에 안타까움이 있다.
얍복 강에서 드린 야곱 식의 기도로는 - 즉, 하나님과 대결해서 자신의 이기적 욕망을 얻고자 하는 기도 - 올바른 영성에 이를 수 없다.
하지만 단순히 야곱의 기도를 욕정에 의한 기도라고 치부해 버리는 것은 과일반화의 오류가 아닐까? 결과적으로, 하나님께서는 그런 야곱의 기도도 들으시고 응답하시지 않았는가? 또한,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어린아이와 같이 나의 소망을 - 그것이 지극히 개인의 이기심에서 나온 것이라 할지라도 -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나아가는 것 하나님은 들어주시지 않는가? 신앙에도 성장단계가 있기에 어린아이와 같은 기도를 하다가도 어느 순간엔가 신앙의 철이 들면, 좀 더 성숙한 기도를 할 수 있지 않겠는가? 기도의 내용 보다도 어떠한 기도라 할지라도 기도를 누구에게 하느냐 즉,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는지 하지 않는지가 더 본질적으로 중요한 문제가 아닐까?
제 1부 : 사귐의 기도에 이르기 위한 다섯 가지 질문
1.
기도의 초점은 선물이 아니라 영이신 하나님과의 만남이다.
기도를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먼저 마음을 한데 모아 '안 계시듯이 느껴지는' 하나님께 집중해야 한다. 하나님의 현존을 느끼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가까이 계시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영적 감각이 둔하고 마음이 산만해져 있기 때문이다.
모한다스 간디,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사람은 다른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으며,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다른 모든 것을 두려워한다."
2.
기도의 본질은 만사를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나'를 변화시키는 일이다.
타 종교의 자기 수양과 밀접
기도를 통해 우리의 삶이 변화하면 그 모습을 감출 수가 없고, 그 새로운 삶은 다른 사람들의 모습을 비추어 준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16)
3.
키에르케고르, "기도는 하나님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기도하는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는 이유는 우리의 믿음이나 기도가 부족해서가 아니다. 우리가 요청한 것보다 더 좋은 계획을 가지고 계시지 때문이거나, 우리가 잘못 알고 필요 없는 것을 구하기 때문이다.
아담 클라크, "기도에 필요한 것은 혀가 아니라 마음"
하나님 안에서 나를 찾고 진정한 나로서 살아가는 길을 찾는 것은 결코 한순간에 완성될 수 없다. 그것은 일생 동안 지속되어야 할 기도 제목이다.
4.
'기도의 삶'은 '삶의 기도'로 연결되어야 한다. 바람직한 기도는 충분한 시간을 내어 하나님과 깊은 사귐에 전념하는 습관을 유지하면서 그 기도의 힘으로 하나님과 깊은 사귐에 전념하는 습관을 유지하면서 그 기도의 힘으로 하루 종일 하나님과 동행하며 산 제물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씀은 '항상 하나님과 동행하라'는 말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생각하든, 그분께 말씀을 드리든, 그분을 위해 무슨 일을 하든, 무슨 고난을 받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밖에 다른 목적이 없고 그분을 기쁘게 하려는 것 외에 다른 소원이 없다면 그 모든 것이 기도다.
인류가 겪고 있는 문제들은 하나님이 계시지 않아서 생기는 것도, 하나님이 무력해서 생기는 것도 아니다. 그것들은 그분의 뜻을 위해 일어날 사람들이 없기 때문에 생겨난다.
5.
우리의 이기적 요청이 이루어지는 것은 좋아할 일이 아니라 긴장할 일이다.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두신"(롬1:26)
바른 기도를 하는 한 응답 없는 기도는 없다.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사귀는 것 자체가 응답이다.
제 2부 : 사귐의 기도를 위한 두 가지 준비
1.
기도 시간을 정하고 가능한 한 그 시간을 지키라. 하지만 시간에 집착하지는 말라. 기도를 대통령과의 면담에 비유하는 것을 옳지 않다. 예수님은 기도에 대한 가르침에서 늘 하나님을 자애로운 아버지로 비유했다.
# 새벽기도에 대한 성경적 근거
"내가 날이 밝기 전에 부를짖으며 주의 말씀은 바랐사오며 주의 말씀을 조용히 읊조리려고 내가 새벽녘에 눈을 떴나이다"(시119:147-148) 이것은 예수님의 습관이기도 했다.
하루에 얼마 동안 기도하는 것이 옳은가? 할수 있는 한 많이!
하루를 기도로 출발하라!
일상 생활의 자투리 시간을 기도로 채우라.
하루의 생활을 기도로 정리하고 하나님 안에서 진정한 안식을 취하라.
2.
집 안에 기도의 골방을 만들라.
기도를 위해 자주 찾아갈 수 있는 곳을 찾으라.
주변의 소음을 차단하고 집중할 수 있는 곳을 찾으라.
언제 어디서든 기도할 수 있도록 준비하라. (달팽이 기도실)
제 3부 : 사귐의 기도를 위한 다섯 가지 주제
1.
'감사와 찬양'은 하나님 앞에 가장 귀한 예물이다.
감사와 찬양은 여러 방식으로 표현될 수 있다. 춤, 탄성, 노래, 연주 등을 자연스럽게 사용하라.
감사와 찬양의 기도는 우리 마음을 치유하고 생명력을 준다.
2.
'회개'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슈브'는 180도 방향 전환을 뜻한다.
영성이 깊어질수록 회개를 더 많이, 더 깊이 하는 것을 본다. 계속된 기도와 영성 생활을 통해 그들의 마음이 '여려지고' 삶의 목표가 높아지기 때문이다.
3.
'청원 기도'에서 구하는 것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 무엇을 구하느냐가 문제다.
바르게 청원 기도를 드리는 사람에게는 응답 이전에도 감사가 넘친다.
4.
'치유 기도' 예수님은 기도로 많은 병자들을 치료하셨고 제자들에게도 그 능력을 주셨다.(롬15:18; 고후12:12; 약5:14-15) 이같은 전통에서 보면 병자 자신이 혹은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치유를 위해 기도하는 것은 마땅한 일이다. 한때 '과학적'이라고 자처하던 사람들이 그런 기도를 미신적이라고 비판했지만, 오늘 날에는 기도가 '대체 의학'으로 인정받고 있다. 과학과 종교는 겸손하게 서로를 인정하고 협력해야 한다.
부작용을 최소화하여 건강에 이롭도록 만들어진 약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하나님의 도우심에 의지해 인간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애쓰는 의료인들은 하나님의 선한 종이다. 그러므로 필요한 경우 감사하는 마음으로 병원 치료를 받을 필요가 있다. 병원 치료를 받으면 하나님이 도와주지 않으리라고 오해하면 안 된다. 기도와 의약은 양자택일의 대상이 아니다.
치유 기도는 적절한 의학적 치료와 병행해야 한다. 담당 의사를 위해 중보하는 것 역시 잊지 말아야 한다.
벤자민 플랭클린, '치료는 하나님이 하시고 치료비는 의사가 받는다.'
오늘 날 인본주의 학문들은 하나님이 아닌 인간의 교만함 위에 세워지는 학문이라고 비판하는 시각이 있다. 그리고 하나님 중심의 신본주의의 학문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 관점에서라면 지금까지 인본주의적 노력에 의해 발전되어온 오늘 날의 의학에 대해서 배타성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지금 그러한 주장을 펼치는 사람들 역시 병에 걸리면, 기도와 의학적 치료는 병행해야 한다고 하면서, 현대 의학에 의존하면서 살지 않는가. 그런 식의 논리라면, 오늘 날 교회에서 비판하고 있는 인간복제라든지 생명유전공학 역시도, 미래의 기독교인들이 먼 훗날에 널리 사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보기 힘들다. 그러면서 기도는 여전히 대체 의학으로, 혹은 그보다 더 비중이 작은 영역을 차지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즉, 기독교는 시간의 역사의 흐름 속에서 원인과 과정은 반대하지만, 결과는 수용하는 앞뒤가 맞지 않는 심각한 오류를 나타낸다고 이해된다.
5.
'중보 기도' 는 그 사람에 대한 '사랑'과 하나님께 대한 '믿음'에서 우러나온다.
우리는 세상을 위한 중보자로 부름받았다.
중보 기도는 모든 생명이 연결되어 있음을 전제로 한다.
프랜시스 톰슨Francis Thompson, "가까이 있는 것이나 멀리 있는 것이나 세상의 모든 것은 영원 불멸한 힘에 의해 보이지 않는 끈으로 묶여 있으며, 땅에서 꽃 한 송이만 꺾어도 하늘에서는 별 하나가 말할 수 없는 고통에 몸부림친다."고 말한바 있다.
'카오스 이론' 과 상당한 관련이 있어 보인다.
제 4부 : 사귐의 기도를 위한 여섯 가지 도구
1. 침묵기도
수많은 영성가들이 말하듯, 침묵은 인간성이 출발하는 근거이며 하나님의 현존을 경험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영역이다. 침묵을 거부하고는 하나님을 만날 수 없고, 참된 인간성을 실현할 수 없다. 침묵은 현대인들이 회복해야 할 보물 창고다.
테레사 수녀, "하나님과 홀로 있기 위해, 그분에게 여쭙고 그분의 말씀을 듣기 위해, 들은 것을 마음 속에 깊이 새기기 위해, 우리에게는 침묵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새로워지거나 변화되기 위해서도 우리에게는 그분과 홀로 있는 침묵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침묵은 우리가 새로운 시야로 삶을 바라보게 해줍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은총으로 충만해져서 모든 것을 기쁨으로 행하게 해줍니다."
이 경험은 결코 일부 수도사들에게만 주어진 특권이 아니다. 꾸준히 노력하면 누구나 침묵으로 열리는 광활한 세계를 조금씩 탐험해 들어갈 수 있다. 그 탐험이 주는 영적 행복감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다.
극단적으로 얘기해서 모든 사람들이 수도원 생활처럼 영적인 경험에만 치중하면 오늘 날과 같은 문명의 발달이 없었을 것이라고 본다.
또한, 앞으로 시대는 그런 행복감도 약이나 뇌자극을 통한 것으로 대체되지 않을까 싶다. 시간을 아까기 위해.
그리고 다른 한가지 생각은, 모든 사람이 제 마음에 들지 않듯, 인류 역사도 하나의 무리로만 구성되어 흘러가지 않은 듯하다. 특히, '선'이라고 외치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도 함께 '선'에 거하기를 소망하며 노력하지만, 정녕 그렇게 되지 않는게 현실 아닌가. 즉, 제 각기 분량대로 각자의 삶에 수긍하며 사는게 어찌보면 합리적이라 생각된다. 모든 사람의 마음에 들려고 아둥바둥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더 자신에게 유익하듯 모든 사람이 한 마음을 품도록 아둥바둥하지 않는게 오히려 더 낫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2. 묵상기도
침묵기도가 정신의 활동을 정지시키는 것이라면, 묵상 기도는 정신 활동을 극대화시키는 것이다.
렉시오 디비나lectio divina : 거룩한 읽기; 성독; 영적 읽기
- 렉시오lectio 읽기 단계
- 메디타시오meditatio 묵상 단계
- 오라시오oratio 말하기 단계
- 콘템플라시오contemplatio 관상 단계
휴Hugh, 렉시오 디비나를 적용할 수 있는 세 가지 책 : 자연; 경험; 성경
성경을 무작정 많이 읽기만 하면 안된다.
하지만 무작정이라도 많이 읽다보면 비록 말씀은 깊이 이해하지 못했더라도 하나님과 가까이 살 수 있지 않을까? 위의 주장을 하는 배경에는 오늘 날 시대적 의식 혹은 통념에 의한 것 아닌가?
3. 금식기도
금식기도는 단식 투쟁이 아니다.
금식기도는 하나님을 강압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영적 각성을 위한 것이다.
인간이 금식으로써 하나님을 굴복시켜 원치 않는 행동을 하시도록 만든 예는 성경에서 찾아볼 수 없다.
인간의 금식 기도는 자신의 의지와 결단을 하나님께 표현하는 수단일 뿐이다. 하나님은 그 진실성을 보시고 그분이 원하는 일을 하신다.
하나님의 뜻을 바꾸기 위해 금식하는 것은 큰 잘못이다. 그렇게 하여 하나님의 뜻을 돌이킬 수도 없고 그런 생각 자체가 매우 불경스러운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겸손히 하나님의 뜻을 따라야 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복된 삶을 선택하는 길이요, 우리 인생을 가장 충만하게 실현하는 길이다.
하지만 금식의 이유가 하나님의 일을 위함이라면 정당하지 않은가? 그런 이유라면 하나님의 뜻도 바꿀 수 있지 않나? 더욱이 자신의 잘못을 진심으로 뉘우치고 용서해달라는 기도(다윗의 금식 이야기, 삼하12장)가 왜 잘못인가?
금식기도는 기도에 전념하기 위한 한 가지 방법이다. 공복 상태에서 정신은 훨씬 맑아진다. 공복 상태에서는 모든 에너지를 정신적인 활동에 쏟을 수 있다. 위장이 음식물로 가득차 있으면 소화에 에너지를 대부분 사용하기 때문에 영적 활동에 사용할 에너지가 남지 않는다.
할 수 있는 한 정기적으로 금식하며 기도하되, 그것을 율법으로 만들지는 말라.
금식으로 충분하다는 생각은 잘못이다. 금식으로 현실을 외면해서는 안된다. 금식 기도를 제대로 했다면 그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더욱 분명하게 깨닫고 그 뜻을 실천할 수 있는 힘을 얻었을 것이다.
4. 기도문 기도
유익
- 영적 시야가 넓어진다.
- 기도하기 힘든 상황에서도 기도할 수 있다.
모범 기도문 종류
- 주기도문
- 시편
- 영적 대가들의 기도문
5. 단문기도
예수님도 기도할 때 "중언부언하지 말라"(마6:7)고 가르치셨다.
방언현상은 다른 종교나 원시 종교에서도 나타난다. 물론 깊이 분석해 보면 성령이 주시는 방언과 다른 종교의 방언에는 뭔가 다른 점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외면적인 현상은 유사하다. 이것은 방언이 성령의 강력한 임재로 인해 터져 나오는 것일 수도 있지만 단순히 심리적 현상일 수도 있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말이 아닌 그 말에 담긴 마음을 보신다.
6. 기도일기
기도 일기는 영적 여정에서 얻은 깨달음과 질문을 기록하는 것이다.
기도 일기는 깨달음을 명료하게 정리하도록 도와주며, 영감을 잊지 않도록 해준다.
기도 일기는 글로 드리는 기도다.
헨리 나우웬, 영혼의 양식
글을 쓰는 것은 영적인 훈련입니다. 글을 씀으로써 우리는 주의를 집중할 수 있으며, 용솟음치는 우리의 마음과 접할 수 있으며, 우리의 생각을 정화할 수 있으며, 혼란스런 감정을 정리할 수 있으며, 과거의 경험을 되새길 수 있으며,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을 정교하게 표현할 수 있으며, 주요한 일들을 우리의 기억 속에 간직할 수 있습니다.
제 5부 : 사귐의 기도가 맺는 여섯 가지 열매
1. 내적 안정감
기독교는 자신의 정복욕과 소유욕을 합리화하는 수단으로 하나님을 끌어들이는 잘못을 수없이 반복해 왔다. 그러나 하나님이 자신을 지지하신다고 믿으려면 그만한 근거가 있어야 한다.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고 언제나 진리 편에 서려는 진지한 삶을 살 때에만 그런 믿음을 가질 수 있다.
골리앗을 이긴 다윗은 하나님과 깊이 교제하며 살았고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행13:22) 생활을 했다. 그런 삶이 있었기에 그는 하나님이 자신을 지지하시리라고 믿었다.
2. 전인적 건강
영-혼-육 상호관계
매우 정신적인 사람인 듯하면서 육체적으로 늘 병이 있다면 어딘가 잘못이 있는 것이다.
인간의 악한 본능은 꾸준히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려고 하고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려 한다. 이 본능을 방치해 두면 인간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외면한 채 죄 안에서 멸망하고 만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부름을 삶 속에 이루려면 본능적인 욕구를 통제해야 한다. 이렇게 본다면 기독교 신앙은 기본적으로 금욕주의적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근본적으로 그리고 전체적으로 본능적인 욕망을 제어하여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
육신을 가장 건강한 상태로 유지하는 길은 본능적인 욕구를 무한정 채우는 데 있지도 않고, 최대한 억압하고 학대하는 데 있지도 않다. 절제에 그 열쇠가 있다.
노자가 도덕경에서 말한 대로 미각을 만족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몸을 위해서 먹어야 한다. 성욕을 무한정 채우려 하면 인생은 파괴되고 말 것이다. 성적 활동을 하되 감각을 위해서가 아니라 몸을 위해서 그리고 사랑을 위해서 해야 한다.
진정한 건강은 영적으로 깨어나고 정신적으로 정화되고 생활이 통제됨으로써 이루어져야 한다. 참된 생명력은 이 같은 전인적인 조화에서 온다.
3. 영적 충만
회심하면서 우리가 성령을 받으면 하나님의 완전성이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감염이 시작된다.
진정한 믿음은 성령 없이 불가능하고, 진정한 삶은 은사 없이 불가능하다.
4. 존재의 변화
하나님의 영과 마주치면 죽어 있던 우리 영은 깨어나 진리를 깨닫기 시작한다. 그 깨달음은 진리를 위해 헌신하도록 우리를 이끈다.
예수님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8:32)고 말씀하셨다. 영성이 약하여 곤고한 상태에 있는 사람들은 이 말씀을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속박하리라로 받아들여 진다.
기도 중에 무엇을 깨달았다고 해서 너무 성급하게 행동해서는 안 된다. 그 깨달음을 성경 말씀에 비추어 점검하고, 이성으로 점검해야 한다.
오스 기니스의 지적대로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선하게 사는 것으로 만족하고 의롭게 사는 것을 피하려고 한다. 선하게 살면 사회에서 칭찬과 인정을 받을 수 있다. 반면 진리를 따라 이룁게 살면 사회로부터 미음과 박해를 받게 된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선한 삶 뿐만 아니라 의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
Martin Luther King, 자신의 목숨을 바칠 수 있을 만큼 귀중한 것을 찾지 못한 사람은 대단히 고달픈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5. 사랑의 능력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 - 그와 같으니로 동격
공생애 동안 예수님은 오직 기도와 섬김에 전념하셨다고 볼 수 있다. 낮 동안 그분은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설교, 치유, 위로하는 봉사에 전념하셨다. 그분은 의무감 때문이 아니라 잃어버린 인간에 대한 뜨거운 사랑으로 인해 사역에 전념하셨다.
나는 Christ-follower로서 바로 그러한 인생을 살아야 하지 않겠냐는 생각이 든다. 교단과 교회 등을 떠나서 바로 그러한 삶을 살 수 있는 곳이야 말로 내 교단이되며, 내 교회가 된다고 생각이 든다.
6. 새로운 의식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6-17)
처음에는 나의 생각과 하나님의 뜻이 달라 갈등을 빚지만, 기도가 깊어지면 이 둘은 일치된다. 이 상태에서는 내가 생각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의 뜻이 곧 나의 생각이 된다. 요한복음을 보면, 예수님은 빈번하게 "아버지가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고 말씀하신다. 자신을 알면 하나님을 아는 것이요(14:7), 자신을 보는 사람은 곧 하나님을 본 것이라(14:9)고 말씀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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