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 현실에 뿌리박은 영성

Eugene H. Peter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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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하나님 없이 인간다울 수 없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이 믿는 바이다. 우리는 삶이란 하나님이 주신 커다란 선물이며, 삶의 모든 부분이 하나님이 계획하신 것이기에 다 의미가 있으며, 모든 부분이 하나님의 복을 받았기에 우리가 다 즐길 수 있으며, 모든 부분에 하나님이 함께하시므로 우리가 수고를 들일 가치가 있다고 믿는다. 우리는 하나님을 피할 수 없다. 우리가 좋아하든 아니든, 알든 모르든 상관 없이 그분은 존재하신다. 우리는 하나님과 관계 맺기를 거부할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의 창조자요 공급자요 우리와 언약을 맺으신 분이 아닌 것처럼 행세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거부할 때 우리는 부족한 존재가 된다we're less. 근본적인 인간다움이 부족한 것이다. 우리의 삶은 그만큼 좁아지고 빈궁해진다. 바로 이 부족함lessness에 대한 의식이야말로 인간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해 준다. 인간은 자신에게 무언가 필요하고 무언가 부족한 것이 있다는 사실은 늘 인식한다. 우리는 완전하지 못하다. 우리는 충분히 인간답지 못하다. 누구나 갖고 있는 이러한 미완성 의식은 인간의 고유한 독특성의 많은 부분을 설명해 준다. 그래서 우리는 교육을 더 받거나 돈을 더 벌거나 다른 장소로 가거나 다른 옷을 사거나 새로운 체험을 추구함으로써 우리 자신을 완성시키고자 한다. 그러나 기독교의 복음은, 우리의 이러한 모든 불완전함의 중심과 저변과 사면에 바로 하나님이 자리잡고 계시다고 말해 준다. 우리에게는 바로 하나님이 필요하다. 하나님을 향한 갈망, 하나님을 향한 갈증은 인간 안에 있는 가장 강력한 욕구다. 이는 성, 권력, 안정, 명성을 향한 욕구를 전부 합친 것보다도 훨씬 더 강한 욕구다.

지금 우리는 각종 전문가들을 지나칠 정도로 중시하는 문화 속에 살고 있다. 그 결과, 전문가가 아닌 일반인은 거의 바보로 취급당하며, 전문가에게 조언을 구해서 마땅히 그에 따라야 할 사람으로만 여겨진다. 그 결과는 그리 고무적이지 않다. 우리는 우리 몸을 돌보는 일을 의료 전문가들에게 내맡겼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는가? 개인의 건강 수준은 계속해서 악화되어 왔을 뿐이다. 우리는 우리의 학습 책임을 교육 전문가들에게 내맡겼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는가? 스스로 사고할 줄 모르고, 인류의 문화 유산과 역사에 대해 무지하며, 고아고와 정치의 조롱 섞인 조작 행위에 대해 무방비 상태인 대중을 만들어 놓았다. 우리는 대인 관계를 개발하고 회복할 책임을 심리학 전문가들에게 내맡겼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는가? 친밀감을 경험하는 일은 여전히 저조하고, 정서적 건강은 놀라우리만치 좋지 않으며, 우정은 드물고, 결혼과 가족 생활은 황폐하다. 우리는 신앙에 대한 책임을 종교 전문가들에게 내맡겼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는가? 종교 메시지의 전달과 종교 상품 판매는 인류 역사상 과거 어느 때보다도 더 활발해졌다. 이로 인해 종교 전문가들은 돈을 많이 벌고 있지만, 어렸을 때부터 전문가에게 의존하도록 훈련받아 온 일반 평신도들은 여전히 믿음과 기도, 원수 사랑과 낯선 이를 환대하는 일에 무기력하고 무능력하다. 요한일서 4:8의 원칙 -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 을 가지고 시험해 본다면, 소위 기독교 국가라는 미국의 학점은 아마 C 마이너스 정도 나올 것이다.
다윗의 삶은 성경에서, 흔히들 말하는 '만인제사장주의'에 대한 제일가는 실례다. ... 모든 직분/직무의 취지는 사람들로 하여금 단순한 종교 문화 소비자 집단이 아닌 하나님의 백성이 되도록 돕고 격려하며 섬기기 위한 것이다.

일은 그 기원이 하나님의 말씀과 행동에 있으며, 따라서 인간이 너무도 쉽사리 하나님처럼 될 수 있는 장이기 때문에, 인간에게 위험한 유혹의 장도 된다. 우리는 일을 잘 하거나 좋은 일을 할 때 정말 신과 같은 존재가 된다. 그래서 급기야 우리는 자신을 신이라고까지 생각하게 되기 쉽다. 자신을 신이라 생각하면 하나님이 필요 없게 된다. 적어도 하나님을 그다지 필요로 하지 않게 된다. 사울은 좋은 일을 하는 와중에 죄를 지었다. 사울은 하나니밍 맡기신 일을 수행하는 와중에 그만 하나님께 기름부음을 받은 왕의 신분에서 몰락하고 말았다. 일은 성보다 훨씬 많이 사람들을 유혹에 빠뜨린다. 다윗의 성과 관련된 죄보다도 일에 관련된 사울의 죄가 더 파괴적이었다.

물질의 기본은 공기와 물, 흙과 불이다. 영성의 기본은 신뢰와 사랑, 소망과 자비다. 정서의 기본은 두려움과 기쁨, 평화와 불안이다. 지능의 기본은 묻기와 말하기, 이름짓기와 숫자매기기다. 우리는 결코 그러한 기본에서 벗어날 수 없지만 그에 대한 감각은 잃어버릴 수 있다.

사울의 갑옷
다윗이 골리앗과 대적하기 전 사울은 자신의 칼과 방패, 갑옷을 입혀주었다. 사울 왕은 다윗을 사랑했고 최선을 다해 그를 도우려고 했다. 그러나 다윗은 거절했다. 전문가의 도움을 거절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가 하는 일만큼이나 그 일을 하는 방식도 중요하다. 나는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성령님이 기름부으시고 예수님이 구원하신 존재로서 살 것인가? 아니면 사실은 별 볼일 없는 전문가들에게나 기대고 의지하며 살 것인가? 사울을 올려다보며 살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을 바라보며 살 것인가?

* 좋은 일을 했는데도 비난을 받을 때, 최선을 다했는데도 느닷없이 심한 반대를 겪을 때 : 시편 7편

우리는 우리의 겉모습만 보는 사람을 수없이 많이 만난다. 그들은 우리를 보면서, 우리가 그들에게 어떤 이용 가치가 있을지 그리고 우리에게서 무엇을 얻어낼 수 있을지 계산하기 시작한다. 그들은 우리를 우리 이하의 존재로 대우한다. 그런 사람들과 계속해서 같이 있을수록 우리는 점점 우리 이하의 존재가 되어 간다. 그런데 우리 삶에 이와는 다르게 들어오는 사람이 있다. 그는 우리를 이용할 목적으로 바라보지 않고, 넉넉한 마음으로 우리 내면의 진실에 대해 관심을 가지며, 우리의 약점을 잡거나 우리에게 흠집을 내려 하지 않고, 우리의 속 생각을 알아주며, 내적 신념을 따르려는 삶의 어려움을 이해해주고, 우리의 내면 가장 깊은 것을 굳게 다져 준다. 그는 바로 친구다.

하나님은 타자이시기other 때문에 하나님은 신비이시다. 우리는 실험실에서 어떤 증거를 꼼꼼하게 조사하듯이 실험을 통해 하나님을 연구할 수 없다. 우리는 언어적 진술의 참과 거짓을 논리적으로 따지는 것처럼 하나님을 이해할 수도 없다. 하나님은 너무도 다른 분이시기에, 우리는 어떤 방법으로도 결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예측하거나 하나님을 통제할 수 없다. 하나님께 다가갈 수 있는 유일한 바른 방법은 삼가는 경외함과 겸손히 머리 숙이는 경배를 통해서 나아가는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다가가면서 또한 두렵고 떨리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왜냐면, 그 분은 우리의 모든 지식을 초월하는 분이자 동시에 우리를 심판하고 징벌하는 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히10:31; 12:25-29)

광야는 시험testing의 장소이며 유혹tempting의 장소이다. 광야는 야생의 땅이다. 길들여지거나 경작된 것은 전혀 없다. 거기에는 문명을 지탱해 주는 일상적인 것들이 존재하지 않는다. 거기서의 삶은 순전히 생존이다. 광야 체험은 하나님 앞에서 온전히 사는 삶을 준비하는 기간이었다.(모세, 다윗, 예수님 등등) 광야는 당신이 스스로를 시험해 보며 자신이 얼마나 강인하고 꼿꼿한지 알아보는 시험장이 아니다. 광야는 당신의 삶 속에서 그리고 당신의 삶을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능력을 발견하는 곳이다.

사무엘상 27장에 다윗이 블레셋 왕 아기스를 철저히 속이고 이용하는 장면을 보면서 혹자는 다윗이 세속적이라고 비난한다. 물론 다윗이 윤리적으로 칭찬받을 위인은 못 되지만 어떻게 보면 다윗은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다. 소위 '영적인 삶'에 전혀 적합하지 못한 환경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 남는 것 말이다. 다윗의 행위가 옳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바로 그러한 상황 속에서도 다윗을 향한 자신의 뜻을 이루신다. 하나님은 다윗이 언약을 배신하지 않도록 그를 지키신다. 하나님은 다윗이 자신의 기름부음에 충실하도록 그를 지키신다. 하나님은 자신의 구원을 이루신다. 영적인 삶의 가장 중요한 관심은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무엇을 하느냐가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무엇을 하고 계신가이다.
*Walter Brugmann, "지금 우리는, 겉으로 드러나진 않지만 그 밑에 하나님의 다스리심이라는 주제가 면면히 흐르고 있는, 지극히 의도성이 강한 작품을 대하고 있다. 다윗이 어디에 있든 여호와는 그와 함께하신다."

Compassion공동체적 열정 = Com 다른 이들과 함께하는 + passion 정. 즉, 사람들을 돌보아 주는 열정

지금 우리는 감상sentiment이 자비를 대신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감상은 실제 인간 관계로는 연결되지 않는 감정에 지나지 않는다. 감상이란 허울뿐인 자비심에 불과하다. 감상은 마치 남을 돌보는 마음처럼 보이고 또 자비심으로 발전될 수 있을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못하다. 국기의 행렬이 지나가는 모습을 볼 때 생겨나는 애국심 같은 것이 바로 감상이다. 결코 정직하게 세금을 내는 실제 애국으로는 연결되지 않는 단순한 감정 말이다. 감상은 슬픈 영화를 보며 눈물을 흘린다. 그러나 그것을 병든 친구를 찾아가 보는 일로는 연결되지 않는다. 우리는 동정을 느끼며, 세상의 고통과 아픔에 대해 비탄을 느낀다. 그러나 속으로 동정을 느끼고 눈물을 조금 흘리고 자선 단체에 만 원 정도 보내면 그것으로 끝이다. 그러면서 속으로 이렇게 생각한다. '이토록 삭막하고 살벌한 세상에서 나는 이 얼마나 온정 많은 사람이란 말인가!' 그러나 나서 우리는 집과 직장으로 돌아간다. 눈물만 흘렸을 뿐 그 불쌍한 사람들의 이름은 알려고도 하지 않은 채, 딱하다고만 여겼을 뿐 그 가련한 죄수들을 찾아가 볼 생각은 없이, 동정만 느꼈을 뿐 그 외로운 사람들에게 편지 한 통이라도 쓸 생각은 하지도 않은 채 말이다. 그러고는 이중 자물쇠로 잠긴 집에 들어가 낯선 사람은 들어오지도 못하게 한다.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속에서 흩어져 살아야 하는 이유 중 하나는 누구나 제사장이 되어 다른 사람을 위한 삶을 살기 위해서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유기적으로 발달한다는 것이다. 신앙 생활이란, 우리의 근육과 뇌 세포, 감정과 심기, 유전정보와 작업 일정, 우리 나라 기후와 우리의 가족사라는 실제 현실의 토양에 심겨진 씨앗으로부터 유기적으로 성장하는 것이다. 그것은 밖으로부터 인위적으로 부과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종교적 관료 제도에 의해 통제되거나 조절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은, 삶의 효과적인 경영 문제에 대해 전문가적 조언을 얻기 위해 찾는 컨설팅 회사가 아니다. 복음의 삶이란, 그것에 대해서 배운 후 제작 설명서를 가지고 조립할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다. 복음의 삶은,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창조와 구권의 역사를 행하실 때 그리고 순종하고 기도하는 삶이 우리 몸에 배어 갈 때 우리가 전 인격으로 되어 가는 무언가다.

*법궤는 길이가 1.2미터 조금 안되고 너비와 높이가 60센티미터가 조금 넘는 직사각형 모양이다. 재질은 나무인데 그 위에 금이 입혀져 있다. 위를 덮는 판은 순금으로 되어 있으며 속죄소로 불린다. 속죄소의 양 끝에는 두 그룹, 즉 천사 모양의 상이 각각 자리잡고 있으며, 날개를 앞으로 펴서 가운데 공간을 덮고 있다. 속죄소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곳이었다. 법궤에는 세 가지가 들어 있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백성들에게 가져온 십계명 돌판, 광야에서 방랑하던 시절 받은 만나가 담긴 항아리, 싹이 난 아론의 지팡이. 이 물건들은 하나님이 그들 사이에서 역사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계속해서 상기시켜 주는 증거였다. 즉, 그것들은 하나님은 그들에게 계명을 주시며(돌판)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시고(만나), 그들을 구원해 주신다(지팡이)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었다.

웃사의 죽음
웃사는 하나님을 상자에 넣어 가두고, 세상 오물이 묻지 않도록 하나님을 지킬 책임이 자기에게 있는 양 나서는 사람이다. 종교는 이런 일의 온상이다. 이렇게 하나님을 책임 관리하려 드는 사람들이 지도자 위치까지 오르는 일이 적지 않다. 웃사는 하나의 경고다. 만일 웃사처럼 생각하고 행동한다면, 우리는 머지않아 죽은사람이 될 것이다. 영혼이 죽은 사람, 살아 계신 하나님을 마치 죽은 물건인 양 대하는 죽은 사람이 될 것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라." "주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다." "조심하라!" 등등의 경고들은 하나님을 우리의 취급 물품으로 전락시키지 않도록 지켜 준다. 종교 활동을 하다가 죽음을 당하는 일이 없도록 예방해 주는 것이다.

때로는 하나님을 위해 무언가 '하는 것'보다 '하지 않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 하나님은 세계와 인간 실존의 시작이요 중심이요 끝이시다. 그런데도 우리는 세계와 인간 실존 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활동을 희미하고 어렴풋하게만 인식할 때가 많다. 특히 우리가 자신 만만할 때는 즉 아는 것이 많고 하는 일이 잘 풀리고 사람들이 우리를 추켜세울 때는 마치 우리가 세계 - 최소한 자신의 실존 세계 - 의 시작이요 중심이요 끝인양 상상하기 쉽다. 이럴 때 우리에게는 선지자의 간섭이 필요하다. 나단이 필요하다. 무엇을 하던 중이건 우리는 그것을 그만두고 자리에 가만히 앉을 필요가 있다. 그렇게 앉을 때 우리가 그간 달려가느라 일으켰던 먼지가 가라앉는다. 일을 벌이느라 일으켰던 소음이 사라진다. 우리는 비로소 진짜 세계, 즉 하나님의 세계를 알아보게 된다.

범죄 이야기들은 서로 비슷비슷하다. 사실 모든 죄란 결국 같은 주제 - 스스로 신이 되려는 것, 자신의 삶을 제멋대로 하려는 것, 다른 사람의 삶을 지배하려 드는 것 - 를 여러 가지 방법으로 되풀이해서 말하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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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 피터슨. 많이 들어본 이름이다. 이번에 그의 책을 처음 읽으면서 성경을 이렇게 풍부하게 읽을 수 있다는 사실에 실로 놀라웠다. 하나님의 깊고도 높음에 한이 없다는 말이 새롭게 다가온 시간이었다. 다윗이라는 인물, 결코 성자가 아닌, 우리와 같이 허물 많고, 근심 많던 사람이 성경의 인물이 되고 오늘에까지 후손들의 입에 오르내릴 수 있는 사람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하나님 앞에 자신이 그렇게 허물많고 부족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유진 피터슨의 입장을 크게 두 가지로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았다. 첫째, 인간은 살아계시고 지금도 역동하시는 하나님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 둘째, 따라서 그런 하나님을 위해 우리가 무엇을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런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무엇을 하고 계신지 아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즉, 인간으로서의 위치를 파악하면 간단히 해결되는 문제다. 죄라는 것도 저자가 언급했듯이, 그리고 창세기에 사탄이 하와에게 선악과를 먹도록 유혹할 때 했던 말과 같이, 인간이 하나님과 같아 지려는데서 출발한다. 자신의 존재를 그리고 자신의 위치를 잘 이해하고 숙지하고 삶 가운데서 인지하고 살아간다면 모든 것은 정상적으로 돌아갈 것임이 분명하다. 다만, 교만의 늪에 빠진 인간들을, 허영심과 자랑에 눈이 멀어버린 인간들을 어떻게 건져올릴 것인가, 어떻게 눈을 뜨이게 할 것인가 그 방법이 문제라고 볼 수 있겠다. 다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 때로는 무식하다고 할지라도 행동으로 옮기는 자세가 오늘 날 더 필요하다는 점에서 나 자신부터 감성에 물든 자비심이 되지 않도록 구체적 행동에 더욱 더 집중하고 노력해야 하리라.
아무튼, 한 번으로 족하지 않은 책인 것 같다. 좋은 책을 읽게 해주신 주님께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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