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rected and acted by Clint Eastwo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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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는 삶과 죽음에 대한 일부분을 조명해 준다. 코월스키(월리)는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경험이 있고, 당시 열 세명이라는 이름 모르는 젊은이들을 죽였던 죄의식과 수많은 동료들을 잃었던 아픔으로 이후 그의 삶 속에서 참된 평안함을 맛보지 못한채 일평생을 살아간다. 마음 속에 자리 잡은 그림자는 점차 그를 더 폐쇄적으로 만들었고, 사람들 심지어 가족들과도 건강한 관계를 맺어나가지 못하게 한다. 영화 속에서 신부님이 월리를 모습을 안타까워 하며, 많은 사람들이 그런 아픔과 상처가 있지만 하나님을 통해 자신의 죄에서 자유함을 얻고 다시 평안함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고 그를 하나님께로 귀의시키려고 했지만, 월리에게는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았다. 월리에게는 신부님의 말이, 삶과 죽음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단지 신학 지식을 인용하는 풋내기의 어설픈 설교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런 월리를 회복시켜 준 것은 종교도 아니요 바로 옆집으로 이사온 흐몽인들(베트남 족)이었다. 특히, 손주뻘되는 손과 타오와의 인간적인 교류를 시작하게 되면서 그의 마음은 조금씩 열리게 되고, 삶 속에 기쁨이 생기며, 상처가 회복되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 기쁨도 잠시. 흐몽인 양아치들이 손과 타오를 괴롭히는 것을 보면서 그는 심한 적개감과 분노감에 타오른다. 한국전 참전 이후 수십년이 흐른 뒤에 이제서야 다시 마음이 열리고 손과 타오와 진실된 교감을 하기 시작했는데, 그런 귀중한 사람들을 괴롭히는 이들이 얼마나 밉고 싫겠는가. 그래서 월리는 손과 타오를 대신하여 그들을 복수하기에 이른다. 손과 타오를 보호하기 위해 자기 한 몸을 희생한 것이다. 손이 양아치들로부터 강간치사를 당하고 오자 타오는 당장 그들을 죽이러 가자고 월리에게 재촉한다. 하지만 타오의 손에 더러운 피를 묻히게 하기 싫은 월리는 타오를 집에 가두어 놓고는 홀로 복수를 감행한다. 결국 양아치들이 월리를 총으로 난사해서 죽이고, 그들은 모두 감옥으로 장기 수감되는 결말로 영화는 막을 내린다. 월리의 죽음이 무엇을 나타내는가? 간단하게 말하면 자신의 죄의식으로부터의 해방이라고 볼 수 있겠다. 첫째는, 자신이 사랑하는 손과 타오를 보호함(살려줌)으로써 이전 한국 전쟁에서 자신이 사랑하는 전우들을 모두 잃은채 혼자 살아 돌아온 것에 대한 자괴감으로부터 해방시킨 것이며, 둘째는, 전쟁에서 자신이 저질렀던 씻을 수 없는 과오, 즉 무고한? 사람들을 죽인 것에 대해 자신도 동일한 방법으로 죽임을 당함으로써 자신의 죄책감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다. 따라서 어떻게 보면 월리는 죽을 때까지 자신의 죄의식으로부터 자유함이 없었다고 볼 수 있다. 단지, 죽음으로서 자유함을 얻은 것이다. 그러니까 그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자유함도 평안함도 없었다. 참으로 불행한 삶이 아닐 수 없다. 그러면서 또한 이런 사람들이 세상에 얼마나 많을까 싶으면서 안타까움이 배가 된다.
이 영화를 통해 생각할 점이 몇 가지 있다. 키워드로 생각해보면, 삶과 죽음. 죄에서 해방. 평안함. 용서. 종교. 진실.
첫째, 하나님을 만나서 자신의 죄로부터 해방을 얻는 것처럼 큰 축복은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런 큰 축복을 누리도록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좀 더 심각하게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영화에서 월리처럼 아무리 설교를 들어도, 아무리 신부님이 자신을 도와주려고 해도, 일단 하나님에 대해 자신의 마음 문이 닫혀 있으니까 결국 축복의 문으로 들어가지 못함을 볼 수 있다. 따라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떻게 마음 문을 열 것인가가 가장 중요한 열쇠이다.
둘째, 그러면 마음 문을 어떻게 열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하게 된다. 이 질문에 답을 하기 위해서는 월리가 어떻게 해서 흐몽족들, 그 중에서도 손과 타오와 인간적인 교감을 하게 되었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처음에는 역시 손과 타오에 대해서도 월리의 마음의 문이 닫혀 있었다. 하지만 어느순간엔가 열려져 있었고, 나중에는 그들을 통해 삶의 기쁨도 얻고, 자신이 아끼던 그랜드 토리노라는 자동차를 타오에게 상속했으며, 심지어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희생하기까지 한다. 마음의 문이 열리게 된 원인을 찾자면 다음과 같다.
1. 바로 옆집에 살았다는 점이 가장 크다. Out of sight, out of mind라는 말도 있듯이, 자주 보고, 자주 마주치면 쉽게 정이 들기 마련이다. 어느 대학 연구에서도 발표했듯, 결혼하는 사람들의 70%가 같은 동네 혹은 비슷한 지역에 사는 경우라고 한다. 특히, CC(campus couple; church couple; company couple 등)가 많은 것 역시도 같은 이유이다. 이처럼, 자주 마주치게 되면 그만큼 마음 문이 열리게 되기 쉽다. 그러면, 가장 큰 축복, 하나님을 만나게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자꾸만 복음을 전해야 하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전해야 한다. 하나님을 만나도록 도와주지 않고서는 하나님에 대해 마음이 열리기 힘들다. 그런 역할을 누가 할 것인가? 바로 나와 같은 믿는 사람들이 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성경말씀에도 행하지 않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했다.
2. 진실됨이 필요하다. 어떻게 보면, 자식들 역시 월리와 자주 마주친 경우라고 볼 수도 있다. 전화통화도 하고, 또 휴일이나 월리가 생일을 맞이할 때면 꼭 찾아와서 얼굴을 보곤 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여전히 자신의 유익과 관련된 것들이 관여되어 있었다. 하도 그러니까 아들의 전화를 받자 마자 대뜸 월리가 이렇게 말한다. "What do you want this time?" 그러자 아들이 그냥 안부차 전화했다고 했지만, 전화 통화 말미에 가서는, 아버지 친구 중에 야구 시즌 티켓 가진 사람이 누구냐고 물어봤다. 이에 대해 역시 실망한 월리는 그 즉시, 전화를 끊어버린다. 자신의 생일 때에도 아들 부부가 찾아와서 생일 케잌이며 몇 가지 선물을 준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집을 자신에게 팔라는 경제적 이득이 숨겨져 있었던 것을 알고는, 선물을 고스란히 아들 부부와 함께 내쫓아 버린다. 하지만 이들과는 달리, 손과 타오는 월리에게서 아무런 이득을 노리고 접근하지 않았다. 다만, 인간대 인간으로서 접근한 것이고 교류한 것이었다. 그 속에는 서로를 향한 배려와 관심, 그리고 사랑이 깃들여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바로 그 속에 마음의 문을 여는 열쇠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데 있어서 나 역시 어떠한 마음 자세를 가지고 안타까운 영혼들에게 다가갈 것인가. 여기에 대해 답은 명료하다. 사랑. 진심. 지금도 많은 기독교인들이 전도를 하지만 그 이면에는 여러가지 개인적 이득관계가 숨어 있는 경우를 많이 보게 된다. 정말 그 영혼이 안타까운 마음에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축복, 즉 하나님을 만나게 하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단순히 자신이 다니는 교회의 숫자를 늘리기 위해서, 또는 전도를 얼마만큼 많이 한 것에 대한 개인의 명예와 영광을 위해서, 또는 단순히 교회 직분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체면과 책임감으로 인해, 또는 목사님이 하라고 하니까 어쩔 수 없이 등등 수많은 거짓된? 동기에 의해 전도를 한다. 그러면 오히려 더 역효과가 난다. 월리가 아들부부를 선물과 함께 내어 쫓은 것처럼, 많은 영혼들도 겉으로는 그렇게 하지 못할지라도 마음 속으로는 내어쫓아 버릴 것이다.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는 사람은 오히려 교회 안에 더 많다는 사실을 주목하자. 그렇기에 전도를 하더라도, 정말 그 영혼을 안타까워 여기는 마음, 사랑하는 마음, 세상에서 가장 큰 축복인 복음을 알게 하기 위한 진실된 마음, 한 마디로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사랑처럼 큰 선물과 감동은 없다.
성경에서도 이렇게 말하지 않은가?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놋쇠와 울리는 꽹과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내가 예언하는 능력을 가졌고 온갖 신비한 것과 모든 지식을 이해하고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을 가졌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 주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준다고 해도 사랑이 없으면 그것이 나에게 아무 유익이 되지 않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친절하며 질투하지 않고 자랑하지 않으며 잘난 체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버릇없이 행동하지 않고 이기적이거나 성내지 않으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고 진리와 함께 기뻐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딥니다.
사랑은 결코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언도 없어지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사라질 것입니다."(고전13:1-7)
3. 그렇게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면, 자연히 그 대상에 대해 열심과 성실과 관심을 표하게 된다. 그것이 이치다. 이를 쉽게 다른 말로 말하면, 그 사람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고, 그 사람의 입장에서 더 서볼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관심과 사랑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는게 또한 사실이다. 물론, 거부할 수도 있고, 거절할 수도 있지만, 아무런 이해득실없이 단지 그 사람을 생각하는 마음에 표현하는 관심과 사랑은 결코 그 사람의 마음을 다치게 하지 않는다. 영화에서도 월터의 도움?에 대해 감사를 표하기 위해 많은 흐몽인들이 월터에게 꽃과 음식을 가져다준다. 처음에는 적극적으로 거절하고 받지 않으려고 했지만, 나중에는 "오, 그거 혹시 치킨인가요?" 이러면서 집으로까지 데리고 가서 받는 모습을 보게 된다.
지금까지 사람의 마음 문을 어떻게 열수 있는가를 살펴보았다.
세번째로 생각할 것은, 그러한 관심과 표현의 표현의 목적이 그 사람을 위해서가 아닌 자신을 위한 행위라면 몇 번은 통할지는 모르지만 결국에 가서는 상처가 되고, 메마름으로 간다는 것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는 것이다. 겉으로는 그 사람을 위해서 하는 것 같지만 자세히 들여다 보면, 자신의 만족을 위해, 혹은 표현암으로써 자신의 마음이 편해지려고 행하는 관심이 많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결코 사랑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인으로서 늘 자신의 마음을 지키고, 반성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가장 훌륭한 방법이 바로 기도와 말씀 생활이다. 기도와 말씀생활을 매일 깊이있게 하지 않고는 사랑의 원천이 끊기는 것과 마찬가지다. 기도와 말씀생활의 저수지가 없다면 결국 자신의 마음으로 해야 하는데 사람 마음이란게 한계가 있다. 밑바닥을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사랑을 전하는 나 자신도 힘들어지고, 더 나아가 내 삶이 피폐해지고, 내 영성이 메말라버림을 경험하게 된다. 늘 끊임없이 기도와 말씀 생활로 영적 호흡을 하는 것. 그것이 또한 매우 중요하다.
넷째, 이제는 다른 주제로 넘어가서, 위와 같이 사랑을 통해 마음 문을 열고 하나님을 만나게 되면, 삶과 죽음에 대한 나의 시각에 변화가 된다. 하나님을 믿는 다는 것은 이제는 더 이상 인간의 눈으로 삶과 우주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우주를 바라보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만난 사람들, 그리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사고관념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과 매우 다름을 볼 수 있다. 감사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도 감사하고, 사랑할 수 없는 대상을 품고 사랑하며, 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믿음으로 도전하고 그것을 이루어내는 놀라운 열매들을 보게 된다. 또한 절대 치유할 수 없을 것만 같은 마음의 상처들도 하나님을 만남을 통해 치유가 되고 회복이 되고 전혀 다른 사람처럼 평안함과 행복함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도 목격하게 된다. 이처럼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생기면 삶과 죽음에 대해서도 전혀 다른 시각을 지니고 살아간다.
인간은 누구나 죽음에 대해 두려워한다. 평상시에 우리는 그것을 인식하며 살지 못할 뿐이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우리들의 무의식에 본능과도 같이 내재되어 있다. 인간은 언젠가는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지만, 하지만 마치 영원히 죽지 않을 것처럼 착각하고 살아가기 때문에 평소에는 죽음에 대해 별로 크게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막상 죽음이 코 앞으로 다가오거나, 아니면 나와 밀접한 사람이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을 때, 사람은 대부분 혼란과 두려움에 빠지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인간적인 것, 그리고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심지어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조차도 죽음에 대해 동일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사고관념이다. 그것을 이해는 하지만 그것을 옹호하거나 관철해서는 안된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의 입장에서 죽음이란 무엇인가? 죽음은 또 하나의 생명의 탄생을 의미한다. 예수님도 죽으셨지만 부활하신 것처럼, 우리 역시 하나님의 심판의 때에 부활이라는 새로운 탄생을 맞이하게 된다. 그래서 죽음은 불행이나 두려움의 대상이 아닌 오히려 축복과 감사의 조건인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가져야 할 마음이요, 눈이다.
또한 그렇게 죽음에 초월할 때 우리는 이 세상에서의 많은 부분에서 담대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도전하지 못하는 것, 용기를 잃는 것들은 많은 부분에서 죽음과 관련한다. 어차피 소멸해 버릴 세상 것들에 의지해서 그렇다. 물론 세상 것들이 전부 다 정죄의 대상이고 버려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말하고자 함은 그것들은 이용해야 할 대상이지 의지하거나 심지어 신봉해야 할 대상이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오늘 날 기계문명의 세상 속에서 많이들 그러하지만 말이다. 따라서 세상의 빛의 역할을 감당하는 신앙인들은 바로 세상 사람들에게 죽음의 초연한 모습, 죽음에 대해 새로운 시각의 지평을 열어 주어야 할 책임이 있다. 그래서 세상의 빛이라고 표현하지 않은가. 빛은 곧 따라야 할 대상을 지칭하거나, 혼란스러운 부분을 명쾌하게 알려주는 역할을 담당하지 않은가? 소위 빛의 자녀들이라는 우리들이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시각을 가지고 살아간다면 도대체 우리를 빛의 자녀라고 할 수 있겠는가? 사도 바울이 베드로에게 질타했던 말이 생각난다. "유대인인 당신이 이방인처럼 살면서 어떻게 이방인에게는 유대인답게 살라고 할 수 있습니까?"(갈2:14)
내가 너무 터무니 없는 소리를 하는가? 내가 이런 말을 하면서도 내가 터무니 소리 하는게 아닌가 생각이 든다면 나 역시 아직 진리에 영에, 하나님의 영에 충만하지 못해서일 것이다. 나는 세상 것들을 다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무엇을 섬기고 의존해야 할 지, 무엇이 이용해야 하는 대상인지 분명히 하자는 것이다. 나는 세상 것들을 섬기고 의존하면서 하나님을 이용하지는 않는지, 아니면 정말 하나님을 섬기면서 세상 것들을 이용하지는 않는지 스스로에게 진실되게 물어보라.
세상에는 방황하는 영혼들이 정말 많다. 영화를 보면서도 사실 제일 안타까웠던 부분은 흐몽인 양아치들이었다. 그들의 영혼들은 어떻게 되느냐 말이다. 그들이 잘못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그들을 빛으로 인도하지 못한 책임도 있다. 양아치와 같은 인간들을 손 놓고,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방관하는 마음 자세는, 수십 년 전 인종청소라는 명목으로 유태인 600만명, 소수민족 400만명을 죽인 히틀러의 사고와 크게 다를바 없다. 그 뿌리는 같다고 본다. 하지만 들을 귀 없는 그들을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가 그것은 위에서도 한참동안 얘기했음에도 불구하고, 정말 쉽지 않은 것임이 분명하다.
그래서 더 믿음 위에 굳게 서야 하지 않겠는가. 울만 박사가 얘기했듯, 성령충만이야말로 사역의 핵심인 것이다. 이 땅의 기독교인들이여!! 성령충만을 받으라!! 나 역시 성령충만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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