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자전, 2010

김대우 감독

김주혁, 류승범, 조여정, 류현경, 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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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무엇을 말하려고 할까? 무엇보다도 '춘향전'이라는 기존의 우리가 가지고 있던 고정관념을 깨고 독창적인 접근으로 재해석 한다는데서 흥미와 주목을 끌기에는 충분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내 생각엔, 감독의 의도가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서 만연해 있는 소위 자유분방한 성문화를 느끼게 해줌과 동시에, 그 속에서 방자와 같이 오늘 날 이 시대에도, 이제는 구닥닥리가 되어 버린 ‘청순가련’ '지고지순'의 사랑이 회복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자 함이 아닐까 싶다.


다들 알다시피, 오늘 날엔 성이 단순히 놀이문화가 되어버린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성문화가 매우 난잡하고 문란해 진 것이 사실이다. 더 심각한 것은, 이미 그런 문화가 사회 의식에 깊숙이 침투해버려 이제는 그것이 더이상 문제가 아닌 당연한 흐름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에서 더 큰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되려, 오늘 날의 성문화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역행하는 무리들이 오히려 비주류가 되고, 소외받고, 힘이 없어 뵈고, 도태당하는 것 같고, 바보같다는 비아냥을 받기 일쑤다. 그러니 이런 성문화의 흐름이 더 가속화되고 일반화되어 가는게 아니겠는가. 하지만 실상은 그 문란한 성문화 속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거짓과 배신감, 허무함, 공허함 등으로 인해 영적으로 점점 더 메말라 가고 있는게 또한 현실이다. 섹스를 하면서 잠깐의 쾌락을 느끼지만, 이내 곧 마음에 허전함과 공허함 그리고 외로움으로 말라 비틀어져가는 사람이 주변에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그런 외로움을 다시 섹스로 채우려는, 즉 악순환을 연속하는 사람들이 또한 많은 것도 현실이다. 이는 알콜중독자와 다름 없다. 술로 인한 고통을 다시 술로 풀려는 행위. 알콜중독자의 미래가 암담하듯, 문란한 성문화의 늪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는 사람들의 미래 역시 동일하다.


오늘 날 실태를 조금 알아볼까? 미국의 경우, 대학생들은 말할 것도 없고, CDC(The Centers for Disease Control and Prevention)에 따르면, 2005년 기준, 9-12학년 중에 성경험이 있는 사람이 47%라고 한다. 이는 1997년도에 54%였던 거에 비하면 수치가 내려간 것이지만, 여전히 두 사람 중에 한 사람은 9-12학년 때에 성경험을 했다는 말이다. 더욱이 20살이 되기 전에 31% 즉, 750,000명이라는 어마어마한 숫자의 십대 여자 아이들이 임신 경험을 한다고 하니 현실태가 얼마나 심각한지 조금이나마 느낌이 온다.


이렇게 청소년 때부터 성이 문란해지는 것의 근본적인 원인은 삶의 중심 가치가 제대로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오늘 날, 소위 포스트 모더니즘 시대에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의 삶 속엔 뼈대라고 할 만한게 찾아보기 힘들 정도다. 과연, 우리 삶의 중심을 부자, 몸짱, 얼짱, 1등, 명문대학, 금메달, 혹은 섹스 등으로 삼을 수 있을까? (왜, 영화에서 보니, 변사또는 가능한한 많은 여자와 섹스를 하는게 자신의 삶의 분명한 목표라고 하지 않는가. 분명, 오늘 날에도 그런 생각을 지닌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얼마나 중심이 없으면, 복잡계 또는 카오스라는 이론이 생겨날 정도다. 이론을 쉽게 요약하면, 사회가 매우 혼란스럽고, 질서가 없어 보이지만, 그러한 무질서가 바로 질서라는 내용이다.

오늘 날, 사회 흐름을 보라. 가장 존중받는 가치가 바로 변화와 혁신, 그리고 창의력이다. 기업에서도 학교에서도 심지어 가정에서도 이 세가지 키워드는 성공의 핵심요소라고 본다. 한데, 생각해보면 변화와 혁신, 그리고 창의력 모두 기존에 중심이 되는 것들을 모두 무너뜨리는데서 출발한다. 그러니 오늘 날엔 무조건 아무것이나 무너뜨리고 본다. 어느 대상이건 탈가치화해보려는 시도를 한다. 사실 이번 영화 역시, 우리에게 익숙한 소재인 ‘춘향전’을 바라보던 기존의 관점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관점으로 ‘방자전’이라는 영화로 만들지 않았는가. 물론, 많은 경우에는 이러한 변화와 개혁, 창의가 도움이 되고 발전의 원동력이 될 때가 있다. 하지만 오늘 날에 많은 경우, 어떠한 큰 틀 혹은 기준점도 없이 아무것이나 무너뜨리는데서 그 가치를 찾으려다 보니 사회적으로 혼란함만 더욱 더 가중시키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우리가 유지시켜나가야 할 전통, 규율, 가치들이 분명코 있는데, 탈가치화의 강력한 흐름이 이러한 영역에까지도 범람하여 이들을 무너뜨리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무너뜨리는 것을 통하여 때때로 성공을 얻기도 하고, 쾌감을 얻기도 하고, 남들로부터 주목과 인정을 사게 되면서 이러한 흐름이 멈출 기세가 없는듯 하다. (물론, 포스트-포스트 모더니즘이라고 하여 탈가치화를 역행하는 사조도 있긴 하지만 아직 미미한 수준에 불과하다. 더군다나 그것 역시 뚜렷한 기준점이 없고, 단순히 특별한 기준점 없이 포스트 모더니즘을 무너뜨리려는 시도를 한다는 데서 탈가치화의 연장선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

정리해보면, 르네상스 시대 이후부터 이어져온 탈신본주의와 인간존중사상(인본주의)이 오늘 날에 과도한 자기애로 나타난 것과 더불어, 근대에 들어, 제국주의와 제1,2차 세계대전, 그리고 극심한 경제 공황 등을 겪으면서 전세계에는 – 아니, 서양국가들에는 – 기존에 그들이 가지고 있던 물질문명, 과학기술, 자본주의, 자유시장 등 에 대한 관점이 바뀌게 된 것이다. 이전까지는 그것이 정답이고, 그 길만이 세상을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길이다라고 확신을 가지고 있다가 막상 문제가 생기고 나니까 그들의 방식과 확신에 대해 환멸을 느끼게 된 것이다. 그 두 가지의 흐름이 맞물리면서 오늘 날에 이렇게 강력한 포스트 모더니즘, 즉, 탈가치화 현상, 무기준사태가 생겨났다고 본다.

이에 대해 두 가지 관점이 있을 수 있다. 하나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보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이것이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인식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이러한 현상에 대해 찬사를 표하면서 계속 이렇게 흘러갈 것을 주장하겠지만, 적어는 나는 그렇지 않다. 나는 결단코 이러한 사회 흐름은 문제가 있다고 본다. 변화, 개혁, 창의에는 반드시 기준점이 필요하다는게 나의 생각이다. 좋은게 좋은 식으로 아무런 기준도 없이 무조건 무너뜨리는 것은 허용하면, 많은 사람들이 다치거나 죽게 될것이 분명하다. 그것이 육체든 영이든 아니면 둘 다. 다함께 살아가는 이 사회 공동체 속에서 사람을 죽이는 게 아닌 살려야 하는게 바람직 하지 않겠는가.

얼마 전에, 조선일보에 기재된 ‘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 저자, 스펜서 존스와의 인터뷰 내용을 보면서 씁쓸한 생각이 들었다. 결국 그 분의 핵심 메시지를 요약하면 변화제일주의, 변화만능주의라고 볼 수 있겠다. 하지만 단순히 변화 그 자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떻게 변화될 것인가에 대한 목적이라고 본다. 현대 사회를 살펴보면 목적지 없는 배마냥 정처없이 이리저리 노젓기에만 바쁜듯 하다. 왜 내가 노를 젓고 있는지, 왜 내가 배를 타고 있는지, 내가 때로는 맞서 싸워야 하는 거친 파도는 왜 있는지,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가 현재 어디를 향해 노를 젓고 있는지 분명한 목적을 지니고 사는 사람을 찾아보기 힘들다. 단순히, 오늘은 내가 노를 천 번 저어야 겠다는 피상적이고 얕은 목표를 설정하고, 그것을 성취하느냐 하지 못하느냐에 따라 내가 만족감을 느끼면서 살지는 않는지, 혹은 하루에 노를 만 번 이상 저어도 지치지 않을 만큼의 체력을 기르기 위해서 노력하는 삶을 살고 있지는 않는지, 혹은 최첨단의 럭셔리한 배를 타기 위해 발버둥치고 있지 않는지, 혹은 나의 배에 탄 사람들이 어떻게 열심히, 효율적으로 노를 젓게 할 것인가 고민하지고 있지는 않은가 등의 질문들을 던져보며 우리 삶의 현주소에 대해 깊이 반성해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목적없는 변화는 제 아무리 화려하고 신속한 변화를 가져온다 할지라도 '무의미'와 '공허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렇기에 인생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그 무엇보다도 내 인생의 목적지가 어디인가부터 반드시 찾아야 하지 않겠는가? 기준이 없는 변화는 무의미한 노젓기에 불과한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기준이 되어야 하는가? 거기에 대해서는 나는 이견이 없다. 바로, 성경말씀이 그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전혀 어려운 것이 아님과 동시에 또 그렇게 되기가 또한 매우 어렵다. 어폐가 있는가? 달리 말하면, 머리로는 쉽지만, 막상 가슴으로, 행동으로 옮기기가 어렵다는 얘기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과 인간의 위치를 잘 아는 것이다. 마치, 군대에 있으면 상관과 부하의 위치를 알아야 하고, 교실이라면 선생과 학생의 위치를 잘 알아야 하듯이, 세상이라는 곳에서 하나님과 나(인간)의 위치를 잘 인식하게 되면 간단히 해결되는 문제다. 하나님이 살아계신 분이라는 것만 자각하면 된다. 하나님 자리에 내가 올라가지만 않으면 된다. 인간의 몸으로 오신 하나님, 즉 예수님께서는 이 땅의 모든 율법을 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완성하려고 오셨다고 하지 않으셨는가. 그 분을 믿으면, 그 분을 인식하고, 우리 삶 가운데 인정하면, 모든 것들은 질서가 잡힌다. 모든 율법이 완성된다. 무질서 속에 질서가 있다고 했는가? 그것은 아마도 지금도 제 목숨 아끼지 않으면서 생명의 복음의 열정을 가지고 뛰어다니는 하나님의 사람들에 의해 그나마 미세하게 찾아볼 수 있는 결과일 것이다.


성문화의 문란함과 난잡함으로 인해 어디서 부터 손을 봐야할지 모르겠는가? 몇 달 전에, 미국 아틀랜타 앞 바다에 BP 오일시추기가 파손되면서 엄청난 기름 유출 사고가 발생했었다. 수 만 명의 민, 관, 군의 인력과 수천 척의 배, 그리고 수많은 물자들이 투입되었지만 기름 유출을 막는데는 한계가 있었다. 망망 대해에서 여기로 흘러가고, 또 저기로 흘러가는 기름을 하나하나 어떻게 막겠는가. 그것을 한번에 막을 수 있는 방법은 그렇다. 바로 파손된 부분을 틀어막으면 된다. 물론, 틀어 막기 힘들다는건 안다. 여기서 그걸 얘기할 것은 아니고, 성문제도 이와 마찬가지라는 것을 언급하고 싶다. 감독이 영화를 통해 아무리 문제제기를 하고, ‘청순가련’ '지고지순'의 사랑이 회복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고 할찌라도 그것은 배 몇 척으로 기름 띠를 제거하는 것에 불과하다. 당연히 그러한 노력도 필요하지만, 그보다 더 근본적인 대책은 바로, 성문란을 초래하는 그 파손된 부분을 손봐야 하는 것이다. 즉, 무너진 기준을 바로잡지 않고서야 여기로 흘러가던 기름떼는 몇 시간 후에는 또 저기로 흘러가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기준이 필요하다. 정말로.


그리고 그 기준을 잡아 주는 사람들도, 그 기준을 일깨워 주는 사람들도 필요하다. 나 역시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준비하자!! 준비하자!! 준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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