쏟아지는 햇빛, 그 참혹한 응시의 그늘, 이신정


<영화, 밀양>

하나님은 신애를 일으키기 위해 싸움을 부추기신다. 가혹한 싸움을 통해 스스로 의미를 찾고 규명하고 규정하는, 어제와는 다른 인간이 되라고 요구하신다. 예측하지 못한 사랑의 방식이다.

어떻게 보일까에 목숨 거는 피사체가 아니라 스스로 어떻게 볼 것인가를 규정하는 시선의 주체가 되기 시작한 것이다. 사실, 싸우지 않는 한 용서도 없고 싸우지 않는한 치유도 없다. (야곱, 하나님과의 씨름, 창32.22-32)

신애의 오해와 달리 하나님은 보이는 햇빛의 그늘에, 보이지 않는 햇빛으로 존재하신다. 신애는 하늘을 보고 외치지만 하나님은 그 외침을 바닥에서 들으신다.

용서는 인간이 아닌 하나님의 영역이다.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인간이 결국 아무도 용서할 수 없는 존재임을 확인시키는 역설이다. (마태18.22)

확장된 맥락에서 보면 우리는 이미 신애처럼 고통의 와중에 있다. 아니, 고통받아 마땅하다. 환멸의 외부가 없는 세상, 칼이 펜보다 강하고 돈이 피보다 진한 세상, 시장의 법칙에 복종하지 않으면 누구나 패배자로 낙인찍히는 세상, 패배하고 쫓겨난 자에게는 온정은커녕 동정조차 없는 세상, 전면적으로든 부분적으로든 그런 세상의 공모자로 살면서 고통스러워하지 않는다는 건, 하나님이 보실 때, 죄악이다. 요한계시록의 저자가 일갈한 대로 우리는 "풍족하여 부족한 것이 조금도 없다고 하지만, 실상은 비참하고 불쌍하고 가난하고 눈이 멀고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할 뿐이다. (계3.17)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고통 받는 인간이 스스로 싸우는 주체가 되도록 도우시는 하나님을 돕는 일이다. 그래서 모두가 주체가 되도록 일으키는 일이다.

고통 받아 마땅한 현실의 와중에 있으면서도 고통에 대한 감수성이 무뎌지는 이유는, 신애처럼 이미 제 것이 된 고통조차 부인하거나 외면하려 들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실 다른 사람의 고통을 이해하거나 나눌 수 없다.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고 싶어 하지만 그럴 수 없다는 걸 확인하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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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Youth Pastor로서 해야 할 일도 결국 학생 한 명 한 명이 하나님의 소중함을 깨닫고 주체적으로 하나님을 붙잡도록 도와주는 일이다. 그들의 주체성과 독립심을 키워주는 것이 Youth Ministry의 핵심 사명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는가? 어떻게 하나님을 도와드릴 수 있는가?

직간접 경험 제공. 말씀, 체험, 훈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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