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 아픈 영화였다. 그리고 오늘 날에도 여전히 이런 일들이 자행되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더 가슴을 치게 만든다. 이런 현실 속에서 과연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영화는 1994년 르완다에서 일어난 후투족과 투치족간의 민족혈쟁을 다루었다. 벨기에 식민지 당시, 투치족이 벨기에로부터 단순히 그들과 조금 더 닮았다는 이유로 - 콧구멍의 크기(그래서 콧구멍의 크기도 자로 쟀다고 한다) 등 - 특혜를 입었고, - 실제로는, 벨기에가 문화식민정치의 일환으로 특수 계층을 선별하여 정치적으로 이용한 것이었다 - 그런 특혜를 입은 투치족은 같은 민족인 후투족을 탄압하는데 일조하고, 경제적으로 이익을 착복했었다. 후에 후투족이 정치적인 힘을 가지게 되자, 과거에 있었던 원한을 갚기 위해 투치족을 대량으로 인종살상하는 대비극이 벌어진 것이다. 이 때 당시, 목숨을 잃은 사람이 약 백만명 - 르완다 전체 인구의 20% - 에 달한다고 하니, 실로 통탄하지 않을 수 없다.
원한이 무엇인지, 정치적 힘이 무엇인지, 인간의 더럽고 추잡한 모습을 다시금 상기시켜주는 영화였다. 그리고 여전히 이러한 인간의 죄된 속성이 세계 곳곳에서 - 수단, 북한 등 - 자행되어지고 있다는 점이 내 심장을 부끄럽게 한다.
영화에서 인상적인 대목은 이것이었다. 종군기자가 대량학살하는 장면을 촬영하고 전세계로 방송을 내보내자 주인공 폴 루세사바기나Paul Rusesabagina는 그 기자에게 희망에 찬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이제 전세계 사람들이 우리의 비극을 보고는 도와주러 오겠군요." 그러자 종군기자는 안타까워 하는 목소리로, "음... 아마 그들은 TV를 보면서 눈살을 찌푸리며 이렇게들 말하겠죠. "It's horrible." 그리고는 먹던 저녁을 마저 먹고 있을껍니다."
이것이 바로 현실이 아닌가 싶다. 머리로는 알아도 실제 행동으로 옮기는 경우가 적다. 진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진리가 무엇인지 머리로는 알아도 실제 행동으로 그렇게 살지 않는다. Leonard Sweet 교수가 지적했듯, 오늘 날의 크리스찬은 thought experience는 너무나도 많은데 lived experience는 없다는 말이 다시금 와 닿는다. 세계 곳곳에, 그리고 가까이 내 주변에도 부정과 비리가 난무하지만서도 거기에 대해 담대하게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실정, 제 편하고, 먹고살기 바쁜 모습이 바로 내 모습이 아닌가 싶다.
진리 앞에 목숨이 무엇이 아까울쏘냐. 하나님보다 세상에 그 무엇이 아까울쏘냐 말이다.
영화를 보면서 다른 무엇보다 내 자신을 많이 반성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물론, 바른 생각을 가지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열심과 열정만 있는 것도 매우 위험하기 때문이다. 다만, 오늘 날에는 진리에 목숨을 바칠 수 있는 열성이 절실하다고 확신한다. 구체적으로 당장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다만, 지금 내 심장이 뛰고 있으면, 즉 생명력이 있으면 일이 생겼을 때 언제든 뛰쳐 나갈수 있을 것이다.
마가복음 13:9-13,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사람들이 너희를 공회에 넘겨 주겠고 너희를 회당에서 매질하겠으며 나로 말미암아 너희가 권력자들과 임금들 앞에 서리니 이는 그들에게 증거가 되려 함이라. 또 복음이 먼저 만국에 전파되어야 할 것이니라 사람들이 너희를 끌어다가 넘겨 줄 때에 무슨 말을 할까 미리 염려하지 말고 무엇이든지 그 때에 너희에게 주시는 그 말을 하라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요 성령이시니라. 형제가 형제를, 아버지가 자식을 죽는 데에 내주며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하리라.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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