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ligulous, 2008



신은 없다Religulous

Bill Maher 의 작품. 이 사람은 처음 보고, 처음 들어본 사람엔데, 미국에서는 꽤 인지도가 있는 사람인 듯하다. 실제로 종교분야에 지식도 많이 갖춘 지성인, 하지만 어떻게 해서든 종교를 해체하고 부정해보려고 시도하는 극진 무신론자. 그의 이야기는 앞으로 기독교 목사가 되려는 나로서 반드시 이해하고 준비되어야 할 내용들을 다루고 있다.

생각나는대로 정리해보자. ,
예수님이 부활하신다고 기록되어있는데, 막상 다시 오실 것이라고 예언한 장소 – 메기도 – 는 보잘것없고 허름하기 짝이 없음. 주변에 아무도 살지 않는 황량한 장소.
목사나, imma나 유대교 랍비들 중 어느 누구도 화자의 질문에 제대로 답을 하지 못함. 안타까움. 자신이 무엇을 믿는지에 대한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성찰이 없음. 그냥 믿으니까 믿는 것. (물론, 그것이 믿음의 입장에서는 축복. Cf.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
폭력과 종교의 상관관계 – 종교와 정치는 뗄 수 없는 관계 – 신앙이 과해지면 폭력적으로 빠지기 쉬움 – 종교의 위험성
종교는 허구의 산물 – 산타클로스를 믿는 믿음과 별반 다를 게 없다는 논리.
예수님 생애 기록과 비슷한 기록들을 가진 신화적 인물들은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게다가 예수님 기록보다 더 이전에 기록된 내용들. (ex. 성령으로 잉태. 기적들을 베풀고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함.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지만 삼일만에 다시 부활하시는 이야기.) 정말 너무나도 비슷함. 이것들에 대해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예수님에 관한 기록들이 단순히 신화에 불과하다면? 그리고 어쩌다보니 단지 사람들의 상상과 지식과 이성들이 한데 어우러져버린 하나의 소산물이라면? (Cf. 영국에 한 마을 산자락에 언젠가 어떤 남자형상의 아웃라인을 커다랗게 그려놓았는데 (커다란 성기도 포함하여) 그것이 그 곳 마을 사람들에게 점점 더 익숙하게 되어 정확히 누군가가 그곳에 그것을 그렸는지는 모르지만 이제는 그곳 마을 사람들에게 많은 의미를 주고, 실제로 그것을 계속해서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게 된다는 실제 일화)
의심은 신앙인seekers들은 당연히 품게되는 것? 의심많은 도마. 의심하지 않고 믿는 사람이 복되다.
자신이 믿고 있는 것을 침해 받는 것에 대해 상당히 혐오하거나 극도로 방어적으로 되는 모습을 보게 됨. 믿음의 매카니즘. 사람은 자신이 마음 속으로 yes라고 한 것은(받아들인것은) 그것이 객관적으로 틀리든 맞든 계속해서 그것이 맞다고 생각하려는 경향이 있음. 반대로 마음 속으로 no라고 했을 경우, 설령 그것이 정말 맞다고 할지라도 계속해서 틀린 것이 맞다고 생각하려는 경향을 보게됨. 자존심 문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문제. 또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기적들의 실체. 기독교인 중에 혹은 기독교인이 되는데 결정적으로 계기가 된 소위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느니, 환상을 보았다느니, 아니면 기적들을 체험하였다는 것 등의 실체가 무엇일까. 결코 증명할 수 없는 문제. 개인적인 문제. 개인적인 믿음의 문제. 자신이 하나님 음성을 들었다면, 혹은 하나님을 직접 만나서 대면했다면, 혹은 그 어떠한 것이든 제 3자가 객관적으로 증명하거나 이해할 수 없음. 만약에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모세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강을 두 갈래로 가른다거나, 정말로 물 위를 걸어다닌다든지, 보리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여명을 먹이고 열두 광주리가 남는다던지,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된다던지, 혹은 죽은 사람을 살리거나,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것과 같은 기적을 제 3자가 보지 않는 이상, 결코 믿기 힘든 부분. 다만, 성경에 나온 기록들을 사실로 이해하고, 2천년 전에 우리와 똑 같은 오감을 지닌 사람들이 실제로 보고 듣고 체험한 바를 가지고 사실 그대로 기록했다고 이해하고 믿는다면, 그 사람들의 간증?이 결국 우리의 믿음의 바탕이 되는 것임. 하지만 오늘날에도 그와 같은 동일한 능력이 임하지 않음. 오늘 날에 기독교들이 말하는 기적이란, 영화에서도 짚었듯이, 자신이 비오게 해달라고 했는데 말한지 10초도 되지 않아 실제로 비가 내린다든지 하는 맥락. 그것이 정말 하나님께서 나의 기도를 응답하신 기적인지, 아니면 단순히 우연의 산물인지. 이 역시도 믿음의 영역. 단순히 우연의 산물로 볼 수 도 있고, 실제로 하나님이 하셨다고 볼 수 있음.
이런 맥락이라면, 아무튼, 기독교는 어찌저찌하든 결국 히브리서 11:1절 말씀처럼,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임.
따라서 종교를 인간의 상상의 (허구의) 산물이라고 볼 수 있고, 또 한편으로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숭상하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믿음을 통하여서 실제로 생명을 얻고, 삶의 의미를 찾고, 어둠에서 빛을 경험하는 능력이 임함. 그 믿음이 잘못된 방향으로 빠지면 과격해지고 폭력을 일으키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믿음의 문제라기 보다는 그 믿음을 가지는 인간들의 (특히 소위 리더들이라는 사람들의) 잘못된 인도로 인한 것이라고 봄.

또한, 개인적인 기적 체험을 통해 소위 자신이 예수님 다음의 예언자라는 등의 말씀을 하나님께서 하시고, 또 무슨 증거까지 보여주셨다고 주창하며 새로운 종교를 만드는 경우도 종종 보게됨. (cf. 몰몬교. 신천지 등) 이에 대해 한 마디 할 수 있는 것은 요한 1서에 거짓 선생들을 구별할 수 있는 방법은 그 선생의 가르침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가 있느냐 없느냐. 즉,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서만 구원을 받느냐 못받느냐 문제를 다루는 것이 핵심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뜻.
자신이 예수님 다음이라느니, 그래서 자신의 말이 곧 예수님 말씀처럼 진리라느니, 혹은 자신이 다시 오신 예수님이라느니 라는 식의 주장은 결코 넘어가서는 안되는 논리. 그런 기적이나 환상체엄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사탄의 장난? 유혹? 예수님께서도 공생의 삶 전에 광야에서 사탄으로부터 시험을 받으실 적에 자신에게 절하면 세상 모든 것을 주겠다는 유혹을 받으셨지만 넘어가지 않으셨음. 결국, 예수님으로부터 배울 수 있는 것은 전적인 자기 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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