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욱 목사, 두번째 표적

오늘 말씀을 보면은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베푸신 번째 표적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여러분 첫번째 표적은 요한복음 2장에서 있었죠.  요한복음 2장에 보면은 갈릴리 지역 가나에서 예수님이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는 모습을 통해 예수님은 우리의 삶에 들어 오셔서 우리에게 기쁨을 주시고 생명을 주시고 우리의 quality 자체를 바꾸시는 분이구나 그래서 정말 아무런 생명력이 없는 고여있는 발을 닦기 위해 손을 닦기 위해 고여있는 물이 생명력 있는 포도주로 변하는 첫번째 기적을 보여주셨고 오늘 갈릴리 지역에서 이루신 두번째 표적이 우리에게 설명이 되고 있습니다.

이제 여기에서 우리가 알아야 것이 하나가 있습니다.  요한복음을 쓰고 있는 요한 사도는 예수님이 이미 베푸신 여러가지 표적이 있었습니다.  오늘 45절에서도 갈릴리 지방에서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었던 사람들은 이미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베푸셨던 많은 표적과 기사를 보았던 사람들입니다.  여러가지 예수님의 기사가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요한은 모든 기사와 이적들을 기록하지 않고 있습니다.  설명하지 않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요한에게는 표적이라는 것은 표적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표적은 어디까지나 표적이 가리키고 있는 그것이 중요했지 표적 자체가 중요했던 것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영어로 표적이라는 것이 Sign이라고 합니다.  Sign이라고 하는 것은 Sign 가리키는 것을 중요시하는 것이지 Sign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잖아요.  마찬가지로 표적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예수님의 모든 표적과 기사를 기록할 마음은 전혀 없었습니다.  다만, 표적들 중에서도 표적이 가리키고 있는 , 예수님에 대해 설명해주는 표적을 특별히 골라서 복음서를 우리에게 소개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은 두번째 표적이 그렇게 중요한 것이었는가?  두번째 표적을 통해 표적이 가리키고 있는 예수님은 과연 어떠한 분이신가?  그것을 우리에게 소개하기 위하여서 요한이 지금 두번째로 기적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의 아이, 중병에 걸려서 죽어가고 있는 아이를 고쳐주신 예수님의 표적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에 대해 무엇을 수가 있는 것입니까?  가지로 생각을 해봅니다.

첫째로, 예수님의 헌신을 거기서 수가 있습니다.  43절을 보시면은 이렇게 말씀이 시작됩니다. 
이틀이 지나매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 갈릴리로 가시며 
거기를 떠났다는 거기는 어디를 말하는 것일까요?
지금까지 어디서 일어난 일을 4장에서 보았죠?  사마리아였습니다.  사마리아를 떠났다는 말씀인데 여러분 사라리아에는 엄청난 부흥의 역사가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지난 주에 보았지만 40절과 42절까지를 보면은 이런 말씀이 있죠? 
사마리아인들이 예수께 와서 자기들과 함께 유하시기를 청하니 거기서 이틀을 유하시매 예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믿는 자가 더욱 많아 여자에게 말하되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말로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앎이라 하였더라.” 

그러니까 사마리아에서 지금 엄청난 부흥의 역사가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여자가 이제 예수님을 만나서 변화받은 자신의 뜨거운 마음을 사마리아 도성에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알리니까 사람들이 예수님이 누구신가 하고 우르르 몰려나와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믿기 시작한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이에요.  , 이렇게 예수님을 믿기 시작한 사람들이 많이 있는 사마리아를 떠나셨다는 것입니다.  정말 신나게 사역이 펼쳐지고 있는 그곳에.  많은 열매가 보여지고 있는 그곳을 예수님이 떠나 갈릴리로 가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갈릴리 지역은요 예수님께서 어려서부터 자라나신 고향과 같은 곳입니다.  그리고 44절에 말씀하신 것처럼 선지자가 고향에서 인정을 못받는다.  예수님께서 이제 자신이 자라난 고향인 갈릴리로 돌아가면은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지 못할 것을 아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봐요.  어려서 예수님이 어리셨을 때부터 자라나는 것을 지켜본 사람들이 예수님이 갑자기 메시야가 되시어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권능으로 말씀을 가르치시고 표적과 기사를 베푸실 때에 이상하게도 어렸을 때부터 알았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메시야로 보기가 어려웠을 것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마태복음 13 55절부터 보면은 갈릴리 지방 사람들이 이렇게 비꼬아 얘기하는 내용이 나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 지역에서 사역을 한창 하고 있을 그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이는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어머니는 마리아,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 하지 않느냐? 누이들은 우리와 함께 있지 아니하냐 그런즉 사람의 모든 것이 어디서 났느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

그러니까 어려서부터 예수님이 자라신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이 하시는 모든 사역들을 색안경을 끼고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어려서 보았던 사람인데  색안경을 끼고 보았기 때문에 예수님이 하신 일에 대해 비꼬아서 말을 했던 것이고 그들은 예수를 배척했던 것입니다. 

주님이 이걸 아셨어요.  그래서 선지자가 고향에서 대우를 받는다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근데도 불구하고 오늘 예수님이 이렇게 신나게 사역이 이뤄지고 있는 사마리아를 떠나 배척받을 아는 갈릴리로 가셨다는 것에 대해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이 드세요?

저는 말씀을 읽으면서 주님의 헌신이 느껴집니다.  갈릴리 지역에서도 물론 사람들이 주님을 배척할 것이지만 곳에서도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을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곳에서도 예수님 떄문에 새로운 생명과 새로운 희망, 격려를 찾을 사람들이 있을 것임을 아시고 예수님은 헌신하여 곳으로 가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헌신이 무엇이냐? 

오늘 예수님을 배척하는 지역을 고르라고 하면은 아무래도 무슬림들이 살고 있는 이슬람 종교가 왕성한 곳이 가장 기독교가 배척당하고 있기 때문에 그곳을 우리가 가리킬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아시나요?  그렇게 예수님을 완전히 노골적으로 테러를 일으키면서도 배척하는 무슬림 지역에서도 예수님의 헌신은 여전하시다는 것을 아시나요? 

제가 아는 분을 소개해 드릴께요.  내외는 지금 터키에서 계시는 분인데 아내는 한국분이고 남편은 터키인 현지인입니다.  그들이 인제 주님을 믿는 분들인데 남편이 되는 Joshua 이분에게 어떻게 당신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는가 물어보고 대답을 들었을 얼마나 가슴이 뭉클했는지 모릅니다.  예수님의 헌신이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그렇게 얘기를 해요.  자기는 다른 사람들처럼 자기도 무슬림이었다.  대대 조상 때부터 무슬림이었고 예수님을 믿는 것에 대해 전혀 생각을 하지 않았다고 얘기를 합니다.  그러나 다만 그가 항상 출퇴근 때마다 이스탄불에서 항상 버스에서 지나는 길에 외국인들을 위한 교회를 지나쳤다고 합니다.  터키에서는 터키인들을 위해서는 교회를 세울 없지만 외국인들을 위해서는 교회가 세워질 있는데 외국인들을 위한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무심코 일을 가고 퇴근할 때마다 항상 지나치는 그곳에 외국인 교회를 그냥 버스에서 보고 무심코 지나갔는데요어느 크리스마스가 되어서 친구들과 함께 파티를 하였을 술을 마시고 파티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서 죽을 것만 같았더래요.   가슴이 너무나 터질 것만 같애가지고 진짜 자신이 죽을 것만 같애가지고 어쩔 줄을 모르고 있었는데 갑자기 자신의 마음에는 교회가 자꾸 보였대요.  그리고 교회를 빨리 가봐야 하겠다는 압박감이 생겼대요.  그래서 친구들에게 이제 나가봐야겠다면서 어디가냐?  교회간다.  친구들이 미쳤구나.  이게 마시더니 미쳤구나 했는데 갑자기 그는 수가 없어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가지고 그냥 항상 지나치면서 무심코 봤던 교회로 뛰어 들어갔다고 합니다.  크리스마스 예배가 진행되고 있었는데 목사님이 그날 요한복은 3 16절에서 말씀을 전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전하는 말씀을 들으면서 가슴이 갑자기 감동이 오는데 어쩔 줄을 몰랐대요.  Joshua 어려서부터 아버지의 사랑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항상 어른이 되어서도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날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아버지라는 것을 듣게 되었고 아버지가 나를 사랑하여서 세상을 사랑하여서 당신의 독생자를 아끼지 않고 보내주셨다는 아버지의 따뜻한 사랑을 듣고 순간 마음을 열고 하나님을 믿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순간부터 그는 예수님을 정말 믿고 제자로 자라면서 주님을 전하는 일에 자신의 삶을 드렸고, 한국에서 선교사로 가신 자매를 만나 같이 결혼을 하게 되었고.

제가 그분들을 터키에서 보았을 때는 진짜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더라구요.  저러다가 혹시 테러를 당하지 않을까 두려울 정도로 담대하게 예수님을 전하는 그러한 사람이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터키에 0.005% 기독교인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배척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배척하고 있는 지역에서도 예수님은 친히 들어가셔서 당신의 헌신으로 구원받아야 자들 주님께로 나와야 자들을 명씩 명씩 부르시고 있다는 것입니다. 

무슬림들이 살고 있는 지역에서 주님께로 나오는 많은 사람들 중에 꿈에서 예수님이 나를 불렀다는 간증을 많이 합니다.  여러분 아시다시피 이슬람이 왕성한 곳에서는 기독교 복음이 노골적으로 전파가 될수가 없습니다.  그럼 그들이 어떻게 복음을 들을 있을까요?  꿈에서.  꿈에서 예수님이 나타나 자신을 보여주시고 꿈에서 나타나 어느 책을 읽어보라고 하는데 어디서 책을 열어보면 성경이고 복음이 거기에 있고 꿈에서 예수님이 나타나 자신의 병든 몸을 이렇게 안수하시면서 고쳐주시고 꿈에서 예수님을 만나 믿기 시작한 사람들의 간증이 많이 들리고 있어요.  선교지역에서 많이 들려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죠?  사람들은 주님을 배척하고 있지만 당신을 배척하고 있는 갈릴리 지역에 마다하지 않고 들어가신 예수님의 헌신이 오늘도 똑같은 헌신으로 역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희 가정을 생각해 봤어요.  여러분 차례 말씀을 드렸지만, 저는 가정에서 처음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어렸을 .  그러면 저의 부모님, 할머니, 할아버지를 생각해 봤을 , 그분들에게 아마 많은 분들이 전도를 했을꺼 같애.  많은 분들이 찾아와서 우리 부모님께 할머니, 할아버지께 전도를 했을꺼 같지만 한번도 우리 할아버지, 부모님이 마음 문을 열고 예수님을 영접한 적이 없었습니다.  배척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가정을 주님이 포기하지 아니하시고 먼저 어린 , 14 저를 주님께로 불러 주시고, 제가 먼저 예수님을 믿고 할머니 구원받으셔야 되는데 우리 부모님 구원 받으셔야 되는데 어려서 어쩔 줄을 모르고 기도하고 있을 하나님께서 주신 위로의 말씀이 있습니다.  이사야 9 7 말씀을 보니까,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말씀이 얼마나 저에게 위로가 되었는지 몰라요.  어린 제가 어떻게 부모님, 할머니를 전도합니까?  근데, 저분들이 예수님을 믿어야 사랑하는 부모님, 사랑하는 할머니 가족이 구원받고 천국 가는데 하나님 어떡합니까, 저는 힘이 없습니다.  근데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주님께서 친히 열심을 가지고 그들을 구원하시겠다는 말씀이 얼마나 감사했는지요.  그리고 년이 걸렸지만 주님께로 인도해 주시는 역사를 체험할 있었습니다.  주님의 헌신이었어요.  주님의 헌신. 

언젠가 감옥에서 흉한 죄를 범하고 감옥에서 예수님을 영접하고 나중에 석방되어 간증하시던 분의 간증이 기억나는데요, 그분이 자신의 성경에는 창세기가 없다고 합니다.  창세기는 성경의 가장 처음 책이잖아요.  창세기가 없다 그러면서 간증을 하는데요, 그가 교도소에 있을 누가 전도를 하면서 성경책을 줬는데, 성경책을 읽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없었대요.  쪼금도.  콩알만큼도 없었대요.  그래서 성경책을 받아가지고 가만두기는 아깝고 종이가 너무 질이 좋아가지고 때만 해도 종이를 사용해야겠다면서 화장실을 들어갈 때마다 장씩 찢어 들어간 거에요.  한장씩.  그래서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고 사용하기 위한 종이로 장씩 찢었다는 거에요.  그래서 나중엔 창세기 50장까지 찢어진 겁니다.   그런데도 그는 말씀을 화장실에 배척하는 마음으로 갖고 갔지만 거기 앉아서 그래도 다른거 읽을 것이 없고 거기서 말씀을 읽으면서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었고 그가 나중에 나와서 성경책은 창세기가 없습니다 간증을 하는데 마음이 뭉클해 지더라구요.  저렇게 주님을 배척하고 선물 받은 성경책을 찢어서 저렇게 사용하던 사람도 주님이 포기하지 아니하시고 마침내 당신께로 인도하셨구나. 

여러분 여기서 오늘 예수님 믿으시는 분들 있잖아요.  여러분 우리가 어떻게 믿게 되었죠?  주님이 헌신하시어서 우리를 찾아 오셨기 때문에 우리가 믿게 사람이 믿습니다.  아직도 우리 가족들, 친구들 중에 주님 믿으시는 분들 포기하지 마세요.  주님이 포기 하셨습니다.  포기하지 마세요.  주님이 헌신을 가지고 그들을 찾아가신다는 말씀 붙잡을 있기를 부탁드립니다. 

예수님의 헌신이 보이고 두번째로 오늘 말씀에는 예수님의 사랑이 보입니다. 

주님의 정말 진한 사랑이 보여요.  여러분 오늘 말씀을 보시면은 여기 46절에 왕의 신하가 있었다.  그러니까 헤롯 궁전에 섬기고 있는 오늘 날로 말하면 장관쯤 되었을 것입니다.  그에게 엄청난 아픔이 있었습니다.  아이가 있는데 아이가 중병으로 인하여 죽어가고 있습니다.  사람이 소문을 듣고 예수께 달려와 아이가 이러이러 하오니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예수님께 간청을 합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48절에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

여러분 예수님이 여기서 말씀을 하신 것은 안타까움에서 하신 거에요.  거기에 왕의 신하, 사람을 비롯하여 그를 주목하고 있는 모든 갈릴리 사람들을 보면서 너희들은 원어로 보니까 복수입니다.  너희들은 도무지 표적과 기사를 보지 아니하면 도무지 믿지를 아니하는구나 주님이 안타까워 하시는 거에요. 

 
왜냐면, 사람들이 표적에 대한 호기심으로 것이고, 표적을 통해 기적을 베푸시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자신들이 받을 있는 어떠한 이익, 챙길 있는 이익을 간구했던 것이지 예수님 자신을 사모하며 예수님 자신을 믿으며 예수님이 하나님 아들이 되시고 예수님이 나의 주가 되신다는 것을 믿으며 따르고 있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다는 것입니다.  호기심 때문에 예수님의 표적을 통해 내가 챙길 있는 이익 정도로 보면서 그들이 예수님 앞에 나왔던 것입니다.  그들의 마음을 아셨던 예수님, 너희들은 표적과 기사가 없으면 믿지 아니하는구나.  안타까워서 말씀하십니다.  안타까워서.

연약함 가운데서 역사하신다는 겁니다. 
주님을 진정 사랑하고 주님을 위하여 십자가 지는 그러한 믿음이 보인다는 거에요.  안타까워하십니다.  오늘도 과연 주님이 우리의 마음을 보신다면 주님이 진정 믿음을 보실 있을까.  모르겠어요 진정한 믿음을 있을까.  하여튼 날은 주님께서 안타까우셔서 어떻게 너희들은 표적과 기사만 찾고 있느냐.

그런데 신기한게 그렇게 안타까워 말씀을 하시는 주님께서 50절에 보니까 가라 아이가 살겠노라 말씀을 하십니다.  그건 뭐냐하면은 부족함을 보시면서 부족함 가운데 역사하신다는 거에요.  그쵸?  우리의 부족함을 보시고 아유, 이렇게 부족하냐.  어떻게 이렇게 믿음이 없는 백성들이냐. 어떻게 이렇게 표적과 기사만 찾는, 나를 찾는게 아니라, 표적과 기사만 찾는 세대냐 하면서 그들을 그냥 저버리시는게 아니라 그러한 연약함을 아시면서 

여러분 마가복음 9장에 보면은요, 어느 아비가 때도 아들을 데리고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먼저 나옵니다.  아들에게 악한 영이 들어가서 아들이 거품을 내고, 나쁜 영이 작동을 하면 자신의 몸을 헤치면서, 이런 일이 계속 되었으니까 아버지가 얼마나 애탔겠어요.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아들을 데리고 가서 고쳐달라고 하는데 제자들이 아무리 기도해도 아무런 역사가 없습니다.  그래서 산에서 내려오는 예수님을 만났을 , 아들이 여차여차 이러하오니 고쳐주세요! 하고 예수님께 간구를 하는데 예수님과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 아버지는 가지를 깨닫게 됩니다.  자신에 대해.  나에게 믿음이 없구나.  나에게 믿음이 없구나. 

주님께서 내게 지금 믿음을 요구하시는데, 내게 지금 믿음이 없구나.  그래서 그는 예수님께 이렇게 고백을 합니다.  예수님, 나의 믿음이 없음을 도와주세요.  영어로 보니까, “help my unbelief!”  “help my unbelief!” 내가 믿지 못하는 것을 주님 도와주세요!  믿음이 없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어떻게 하십니까?  믿음이 없이 주님 앞에 나온 사람을 주님이 배척하지 않습니다.  믿음 없음을 도와주시면서 그에게 믿음을 주십니다.  그리고 아들을 주님께서 고쳐주십니다. 

, 주님을 보면은요, 이러한 사랑이 있으세요.  우리의 연약함과 부족한 모습, 망가진 모습을 그대로 품고 안에서, 위에서 사역을 펼치시더라구요.  너무나 감사해요. 

여러분 그림을 그릴 있잖아요, 동양식은 이렇게 모방하는 이렇게 미술을 그려 가지고 애들한테 이렇게 한번 너희들도 그려봐라 하면서 모방하는 그러한 그리는 방법이 있지만, 서양의 철학은 조금 다릅니다.  아무리 그려도 아이들의 창조력을, 모방하는 그림이 아니라, 아이의 창조력을 끌어내기 위하여서 아이들한테 마음대로 그리게 합니다.  모방하는게 아니고.

제가 이제 미국에 초등학교 4학년 갔는데, 가기 전에 제가 초등학교 우리나라에서 미술에 양을 받았습니다.  양을.  수우미양.  여러분 초등학교에서 받는거 쉽지 않습니다.  절대로 쉽지 않은데, 제가 양을 받았어요.  상처가 아직까지 있습니다.  아직까지.  .  그래서 제가 결혼할 때는 제가 미술 잘하는 사람과 반드시 결혼한다 해서 지금 아내를 만났는데, 하여튼, 여러분, 양을 받았어요.  양을.  . 

그런데 제가 어렸을 미국에 갔기 때문에 가지 아는 것은, 만약에 제가 미국에서 초등학교 후에 제가 상처가 있어가지고 다시는 그리지 않았거든요, 근데, 미국에서 만약에 공부를 했으면 조금 달랐을 같아요.  왜냐면은 창조력을 키우시기 위해 어떻게 하냐 하면은 미국의 보통 선생님들은 아무렇게나 그리게 해요.  그리게 다음에 우와, 아이의 독특한 점을 이렇게 말해 주면서 독특한 점을 살려갖고 선생님이 자기가 아이가 그린 형편없는 그림에다가 자기가 색깔을 이렇게 칠해 주시고 거기에다 나무도 그려주시고 호수도 그려주시고 하면서 작품을 만들어요.  그래서 아이의 엉터리 그림에다 선생님의 그림을 이렇게 덧붙여 갖고 작품을 만들어 갖고 아이한테 자긍심을 갖게 합니다.  그리고 나의 스타일대로 나중에 그릴 있도록 유도를 합니다.  이게 항상 좋은 방법이라고 말할 없지만 저에게는 만약에 제가 미국에서 공부했다면 양은 맞았을꺼 같애.  양은. 

여러분 제가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주님이 그렇게 역사하시더라구요.  우리가 있잖아요 때때로 주님 앞에 나와서 보이는 믿음 정말 볼일 없어요.  주님 앞에서 내가 보이는 나의 신앙 정말 어쩔 엉터립니다 엉터리.  근데 엉터리 모습을 주님이 나무라지 아니하시고 그대로 받아주시네요.  받아주시고 위에다 당신의 아름다운 그림으로 작품을 만들어 주시는 믿습니다.  성경은 그러한 주님을 가르치세요.  그리고 저도 그러한 주님을 믿습니다.  나의 연약한 모습을 갖고 연약함 가운데서 사역 하시는 주님. 

그래서 교회가 부족한 사람들, 죄인들이 모인 곳이 사실 교회입니다.  여러분 매스컴에 교회 문제 여기저기서 터뜨리고 있는데 사실 교회에서 좋은 많이해요.  많이 하고 훌륭한 많이 하지만 매스컴은 하여튼간 좋은 일만 꼬집어서 이렇게 터뜨리는데 하여튼간 그래도 안타까운 모습이 터질 때마다 굉장히 마음이 아파요.  마음이 아파요.  여러분들도 그렇죠?  교회들에게 이런 어려움이 터질 때에.

그런데 여러분 이것 때문에 놀랠 필요는 없습니다.  교회는 항상 어려움이 있었어요.  초대교회도 어려움 많았습니다.  문제가 많았습니다.  문제가 교회에 많은 아세요?  거울 보시면 압니다.  거울 보세요.  거울 보시면 누가 있죠?  내가 있습니다.  내가.  오늘 아침에도 제가 거울 보니까 문제가 많더라구요.  여러분 거울 보면은 교회가 문제가 있나?  나에요 .  내가 문제니까 교회가 문제가 많은 거에요.  같은 사람이 모였습니다.  그래서 문제가 있는 것은 당연한 것이에요.  놀라워할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것은 이거에요.  문제가 많아요.  우리 문제가 많은데 죄인들이 모인 곳인데 우리 문제 위에 주님께서 당신의 그림을 펼쳐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가 교회되는 요소는 사람이 아니에요.  교회가 교회되는 요소는 하나님이 되십니다.  하나님이 교회를 교회답게 만드시는 것이고 예수님이 예배를 예배답게 만드시는 것이고 성령님께서 하나님의 영이 우리의 사역을 사역답게 만드시는 것이에요.  그래요 그래서 이러한 문제가 터질 때에, 모순이 보일 때에, 낙심하지 마세요.  주님은 그러한 모순 가운데서 당신의 아름다운 그림을 그리시고 있는 분이십니다.  이게 예수님의 사랑이에요.  예수님의 사랑.

예수님의 헌신이 보이고 오늘도 우리와 같은 부족한 사람들을 통해 당신의 사역을 펼쳐 가시는 예수님의 사랑이 보이고 있구요 한가지 보이는 것은 예수님의 권세입니다.

예수님의 권세.  예수님의 authority.  여러분 여기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아이가, 아들이 살았다.  말씀을 하시는 순간 아이가 삽니다.  50절부터 한번 볼까요?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아들이 살아 있다 하시니 사람이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 내려가는 길에서 종들이 오다가 만나서 아이가 살아 있다 하거늘그 낫기 시작한 때를 물은즉 어제 일곱 시에 열기가 떨어졌나이다 하는지라그의 아버지가 예수께서 아들이 살아 있다 말씀하신 때인 알고 자기와 집안이 믿으니라이것은 예수께서 유대에서 갈릴리로 오신 후에 행하신 번째 표적이니라

여기 보시면은 예수님의 권세가 말씀으로 나타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세요.  사람들 생각에는 예수님이, 아버지의 생각에도 예수님이, 그와 함께 친히 집에 오시어서 아이에게 손을 대시고 터치하셔서 살려주셔야만 있다는 연약한 믿음을 갖고 있었지만 예수님 말씀 하나입니다.  말씀 하나.  아들이 살았다! 말씀 하나로 아들이 살더라구요. 

여러분 예수님의 권세는 말씀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폭풍을 향해 잠잠하라 하니까 파도와 바람이 잠잠해 집니다.  죽은지 이미 나흘이 송장 나사로를 향해 거기서 나오라고 하니까 송장이 걸어 나옵니다.  살아서 다시 나옵니다.  주님의 말씀에 위력이 있어요.  권세가 있어요.  여러분 창세기 1장을 보면은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무에서 유를 창조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위력이 되어서 아무것도 없는 곳에 하늘이 생기고, 빛이 생기고, 세상이 생기고, 우주가 생기고, 동물이 생기고, 사람이 생깁니다.  말씀이 위력이 되어서. 

요한복음 1장을 보니까 말씀이 육신을 입고 우리에게 나타나셨다.  우리에게 오셨다.  그분이 예수님이라는 겁니다.  그니까 예수님이 이제 무에서 유를 창조한 하나님의 말씀의 위력이 이제 육신의 몸을 입고 우리 가운데 오셨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에는 권세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말이라는 것은 사실 권세가, 말이라는 , 우리 자신을 봐도 이게 힘이 있다는 것을, 말에는 에너지가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여기서 기쁜 말을 하면 여러분들이 같이 웃고 기뻐합니다.  에너지에요.  여기서 슬픈 말을 하면 여러분들이 같이 슬퍼해요.  에너지에요.  히틀러 같은 사람이 말을 하니까 국가가 일어나서 파괴의 나라가 되더라구요.  마틴 루터 주니어 같은 목사님이 미국에서 일어나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랑으로 연설을 하니까 국민이 하나가 되어서 새로운 역사, 인권의, 인권 운동을 펼치는 새로운 운동이 시작되더라구요. 

말은, 언어는 파워입니다.  그래서 , 헬라 철학, 고전 철학가들도 언어가 파워라는 것을 그들은 알았어요.  이건 사실 성경에서 이미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것인데 그것을 몰랐던 철학가들도 언어가 파워구나.  언어가 질서이구나 이것을 알아갖고 언어를 로고스라고 그들이 단어를 쓰는데 철학가들이 로고스라고 단어는 언어라는 말도 되지만 질서, 우주의 질서라는 말도 됩니다.  왜냐면, 언어가 질서에요.  여기저기서 소리가 있지만 소리에 의미를 주는 것은 언어입니다.  그쵸?  여러 그냥 소란이 있지만 소란 가운데 의미와 하모니를 주는 것은 언어에요 언어.  무질서한 세상에 질서를 잡게 하는 것은 언어입니다.  언어로 법이 세워지잖아요.  서로 마음이 맞지 않았을 협상에 이르게 하는 것도 언어입니다.  언어로 협상이 이루어 지잖아요.  그러니까 말이라는 것은 힘입니다.  이것은 원래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에 이미 우주에 보여진 파워에요.  이것을 희미하게 철학가들은 , 로고스구나 하면서 언어는 질서이다 이정도로만 알았지만 성경에서는 원래 말을 가지고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이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셨기 때문에 말씀이 우리에게 치유가 되고, 말씀이 우리에게 구원이 되고, 말씀이 우리를 사망에서 건지는 하나님의 권능이 되는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들어야 돼요.  예수님의 말씀을 우리가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여기 나온 왕의 신하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었습니다.  50절을 다시 보면은,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아들이 살아 있다 하시니 사람이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  말씀을 믿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여기 key에요.  여기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말씀에 위력이 있고 권능이 있는 것을 깨닫고 말씀을 붙잡기로 합니다.  말씀을 믿고 나서 아들이 것을 보게 됩니다.  여러분 이거에요.  믿어야 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꺼꾸로 생각해요.  보아야 믿겠다.  Seeing is believing하는데 no!  성경에서는 believing is seeing!  우리가 믿어야 본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 1절을 보니깐,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라  바라는 것들의 실상,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  그러니까 믿음이라는 것은 이거에요.  주님이 말씀하셨기 때문에,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기 때문에 말씀을 내가 붙잡고 믿으면은 보게 되는 거에요.  그쵸?

지금 여기서 그걸 있습니다.  예수님의 권세를 말씀에서 찾았고, 말씀을 붙잡는 가운데 믿는 가운데, 정말 인간이 없는 엄청난 주님의 표적과 능력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야 되는 이유는 우리도 , 여기 나오는 왕의 신하와 같아요.  우리 모두에게도 어두움이 있습니다.  아픔이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 우리, 우리 가운데 아픔 없는 사람이 누가 있어요.  문제 있는(없는) 사람 누가 있어요?  망가지지 않은 사람 누가 있겠어요?  여기 왕의 신하였습니다.  부귀영화를 누리는 사람이었어요.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런 부족함이 없는 사람같지만 뚜껑을 열고 보니까 심각한 아픔이 있습니다.  아무리 부귀영화 많아도 뭐해요?  결정적인 순간에 아들 하나 고치지 못합니다.  이게 우리의 현주소에요.  우리의 현주소.  결정적인 순간에 아무것도 못하는 인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구세주가 필요해요.  우리는 주님 없이 사실 살수가 없습니다.  왕의 신하가 사실 그것을 깨닫고 주님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오늘 주님을 믿어야 되는 것은 우리가 마음 속에 우리의 속에 아픔이 있고, 망가짐이 있고, 어려움이 있고, 사연이 있고, 그림자가 있고, 누구도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이 필요하고 구세주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분께 나오세요.  그분께 나오면 여러분 배척하지 않고 여러분의 주가 되실줄로 믿습니다.  저는 말씀을 묵상하면서 가지 아이로()니를 외면할 수가 없었습니다.  여기 보면은 아비가 자기의 아들, 자기의 아들이 죽어가는 것을 보고, 예수님께 간절히 간구하여 아들이 살려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근데 우리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죽으라고 세상에 보내십니다.  아비에게는 자식 살려주고 싶어하는 마음 있어요.  있어요.  아무리 못난 아비래도 자식 생명은 중요합니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십니다.  그래야 우리가 구속받기 때문에.  그래야 우리의 죄가 씻어지기 때문에.  그래야 우리의 죄로 말로 말미암은 패널티가 십자가에서 충족되기 떄문에.  아이로()니를 보며, 하나님의 위대하신 사랑, 다시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주실줄로 믿습니다.

지금은 우리의 참된 구세주가 되시고, 치료자가 되시는 우리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독생자 예수를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죄의 대속물로 보내주신 하나님 아버지의 이해할 없는 사랑과 오늘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확실한 믿음과 확실한 은혜와 확실한 힘을 받고 돌아가게 하시는 성령님의 교통하심이 여기 나와 예배 나와 예배 드리는 모든 주의 백성들 위에 이제로부터 영원토록 함께 하여 주시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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