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번째, 9장은 내용 전체가 한 이야기를 담고 있기 때문에 끊어서 묵상하는 동안 늘 전체적인 이야기를 상기하면서 읽을 필요가 있어. 따라서 이번 부분을 생각하기 전에 이전 부분이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는지 그 흐름을 생각해야해. 이전 이야기는 간단히 말해 예수님께서 장님을 눈뜨게 하셨고, 눈뜬 장님을 이웃들이 보고는 놀라워하는 내용이었지. 그리고 사람들이 그를 치유해준 사람이 누구냐 그리고 그가 어디있느냐고 물어봤지만 예수님은 이미 떠나셨는지...찾을 수가 없었어.
이번 내용에서는 이웃들이 눈뜬 장님을 바리새인들 (유대교 지도자들)에게 데리고 왔어. 그 이유는 22절에도 나오지만 그 당시에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예'자만 들어도 치를 떨었거든. 왜냐면, 이미 8장에서도 다뤘지만(8.48) 예수님이 자신들의 상식적인 행동들에 반하는 행동을 하니까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지. 하지만 이번엔 눈뜬 장님이 또 예수님 얘기를 꺼내니까 (9.11) 이웃 유대인들이 그를 잡아다가 유대교 지도자들에게 데리고 온 것이야. 그리고는 이제 끝장토론이 벌어지는 거지... 또 14절에 보면 예수님이 그 기적을 안식일에 일으키신 것을 보게돼...이 사실은 안식일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야 한다고 강력하게 믿고 주장하는 유대인들에게는 예수님이 더더더 마음에 안들었을꺼야.
두번째, 그렇게 데리고 온 눈뜬 장님을 놓고 이제 유대교 지도자들이 본격적으로 의심을 하기 시작하지. 어떻게 안식일에 이런 기적을 베풀 수 있느냐? 분명코 예수란 자는 사탄의 자식이다. 하지만 이런 기적을 일으킨 걸 보면 뭔가 있는거 같기는 한데? 음....그러면 혹시 눈뜬 장님이라는 작자가 원래 장님이 아니었던거 아냐? 이런 말도 안되는 의심들까지 하게 되지. 그리고 심지어 쓸데없이 권력을 남용해서 눈뜬 장님의 부모님까지 그들에게로 데리고 와. 그리고는 물어보지. 당신 자식이 맞냐? 맞다. 이 자식이 원래 장님이었나? 맞다. 태어날때부터 장님이었다. 이렇게 어이없는 토론이 이 부분에서는 끝나.
한데, 부모라는 사람들이 제 살기 위해서 제 자식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하는 부분은 참 볼썽 사납긴 하다. 하지만 그것이 부모라는 혈연 관계도 역시 우리를 완전하게 사랑하고 품어줄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시사하는게 아닌가 싶어. 어머니의 사랑은 높고도 깊은 것이라지만 어쨌든 인간은 인간이잖아. 따라서 우리를 진정 이해하고 품어주실 수 있는 분은 하나님이라는 점도 기억했으면 좋겠어. 성경에서도 부모의 영향력은 잠시이며 하나님만이 지속적인 훈련을 하실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으니 말이야. (히12.10)
마지막으로 주목할 점은 17절에서 바리새인들이 눈뜬 장님에게 너는 너를 치료해준 그 사람을 뭐라고 생각하느냐 했을때 He is a prophet 예언자 라고 대답했다는 것을 기억했으면 좋겠어. 왜냐면, 나중에 가면 갈수록 대답이 점점 달라지거든...매우 흥미로운 사실이지...시사하는 점도 여러개 있고 말야...
적용은...
내가 체험한 하나님
내가 느낀 하나님
내가 깨달은 하나님
그 하나님을 세상에 누가 뭐라고 하든지
설령 나를 그들의 공동체에서 내 쫓아내고
나를 모함하고
겁주고
내 목에 칼을 들이밀어도
내가 가진 확신이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믿음의 소유자이길 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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