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hn 9.24-34 "The Pharisees question the healed man a second time"

흔히들 아는 얘기지만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은 매우 종교적인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말씀에 대한 지식이 빼어났고 또한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서도 믿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철저히 예배와 절기를 지켰다. 그들의 모습은 신실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존재를 편협한 시각으로 바라봤다. 그리고 문제는 마치 그들의 이해가 모든 것인냥 착각했다는데 있다. 그들의 이해가 진리가 돼 버린 것이다. 장차 그들의 믿음은 율법주의로 발전했고 그렇게 인간의 인식의 틀에 갖혀버린 그 속에서는 하나님이 제대로 경험될 수 없었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그러져 버린 것이다. 마치 하수구가 막혀 물이 제대로 흘러내려가지 않듯이, 영혼의 물줄기가 막혀버렸다. 34절에 바리새인들이 눈뜬 장님에게 보여준 태도에서도 이러한 사실이 여실히 드러난다. To this they replied, "You were steeped in sin at birth; how dare you lecture us!" And they threw him out.  불행하게도 자신의 이성과 인식의 틀에 갖혀버린 그들은 자유로운 성령의 역사하심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가 아닌 것이다. 이것을 영적 둔감, 영적 어두움, spiritual blindness라고 부른다.

바로 이 상황에서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뚫어뻥" 같은 존재로 현현하셨다.  그리고는 본말이 전도된, 주객이 전도된 율법주의자들의 믿음에 대해서 질타하시고, 새롭고 파격적인 모습으로 믿음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라고 가르치셨다.

사실 바리새인들은 안타깝기 그지없다. 하나님 존재를 부정한 것도 아니고 누구보다도 열심히 믿으려고 했던 사람들이 아닌가. 그들의 노력과 열심이 안타깝게 느껴진다. 하지만 열심히 뛴다고 다가 아니잖는가. 뛰는 것도 매우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자신이 어디로 뛰고 있는가라는 방향이 더 중요하다. 따라서 올바른 믿음을 가지는 것이 열심을 가지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는 다소 이해하기 힘든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그 믿음이라는 것은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믿음의 경험들이 본인의 공로의 결과물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이요, 예수그리스도의 공로로 이뤄졌다는 가슴의 고백이 나와야 하는 것이다.

분명코 바리새인들도 열심이 있었지만 무언가 풀리지 않는 고민과 답답함이 있었을 것이다. 믿음 생활에 대한 회의가 있고 의문이 있었을 것이다. 다만, 그들의 삶이 그렇게 흘러왔고, 문화가 그렇게 자리잡았고, 다른 대부분의 주변 사람들도 그렇게 살고 있기 때문에 답답함을 억누른채 그것이 맞는 것인냥 인정하고 살아야만 했을 것이다.

그런 답답함을 오늘 말씀에서 찾아볼 수 있다.

심리학에서 방어기제 중에 "반동형성"이라는 것이 있다. 이것은 미성숙한 방어기제로 쉽게 말해 자신이 현실 속에서 하고 싶은 일을 여러가지 환경적, 상황적 이유 때문에 무의식적으로 억누르고 있다가 누군가가 현실에서 그 일을 하게 되는 볼 경우 그것에 대해 극심하게 부정적인 반응을 보인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무의식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에 본인은 진실로 자신이 그 일을 싫어한다고 착각하게 된다.

이런 관점에서 바리새인들이 예수의 말과 행적에 대해 그토록 히스테리적 부정적 반응을 보인 것은 바로 그들이 무의식적으로 영적인 자유함에 대한 갈망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바로 복음에 대한 갈망. 즉, 무언가 억눌린 듯한 그들의 영성에 대한 답답함에서 해방되고자 하는 간절한 내면적 욕구가 있었을 것이다.


복음이라는게 무엇인가?

복음에 대한 정의 역시 다양하겠지만 오늘 말씀에 비추어 보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30절에 보면 눈뜬 장님이 The man answered, ‘Here is an astonishing thing! You do not know where he comes from, and yet he opened my eyes. 라고 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이 아닐까.  어차피 하나님 그 분의 형태도 존재도 분명히 알 수 없는 우리 인간은 불충분한 인식의 단계를 넘어서 경험의 결과를 통해 하나님의 존재를 체험해 볼 수밖에 없지 않는가. 즉, 눈이 뜨이고, 죽었던 자가 살아나고, 가진자가 갖지 못한 자에게 나누어 주는 경험...그리고 그 경험을 자신의 공로로 인정하지 않고 전적으로 그 경험을 가능하게 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모든 영광을 돌리는 것. 마치 눈뜬 장님이 내가 눈을 뜬 것은 전적으로 예수라는 그 사람을 통해서 가능했다고 선포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것이 바로 복음이라고 생각한다.

그럼 그 경험은 언제 가능한가. 눈뜬 장님의 경우를 살펴보면 두 가지를 흥미로운 점을 찾아볼 수 있다.

첫째, 다른 경우와는 달리 이번 경우는 예수님께서 직접 눈뜬 장님에게 다가오셨다. 1절을 보면    As he went along, he saw a man blind from birth. 이라고 했다. 즉, 예수님께서 직접 그를 보시고 다가오신 것임을 알 수 있다.

둘째, 6-7절에서 드러났듯이 눈뜬 장님은 내 눈이 뜨이길 원하면 내가 뭐라도 하겠습니다라는 마음 상태임을 볼 수 있다. 그것이 본인을 치욕스럽게 만들더라도 말이다. 타인의 침saliva은 어느 누구에게나 불쾌감을 준다. (오늘 날의 관점에서는 그렇지만 그 당시에 침의 사회적 의미는 모르겠다) 따라서 타인의 침을 자신의 눈에 바를 정도면 그 사람의 자존감은 제로상태라고도 볼 수 있다. 예수님은 바로 이렇게 마음이 가난하고 갈급한 사람을 변화시킨다.

여담이지만 침의 성분은 99%가 물이고 나머지 성분들을 구강을 보호하고 보존하는 좋은 물질이라고 한다. 더군다나 침은 소화작용을 돕는 주요 분비물이라는 점에서 침으로 치유하시고 변화시키시는 예수님의 행동이 바로 물과 성령으로 세례를 배푸시는 것을 시사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오늘의 적용:
제게 영적인 민감함을 주옵소서. 그러기 위해서는 제 자신의 이기적인 교만함을 내려 놓고 주님의 겸손한 마음을 품어 세상과 다른 사람들 속에서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눈을 주소서.
나의 인식의 틀에 하나님을 가두지 않게 하시고 하나님의 인식의 틀에 나를 집어 넣을 수 있는 영적인 지혜를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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