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본문에서는 '예수님의 눈물'에 담긴 의미를 생각해 보려고 해. 아리스토텔레스는 눈물은 우리의 정신을 깨끗하게 하는 치료 능력이 있다고 했는데 왜냐면 눈물을 흘리는 행위를 통해 '카타르시스Katharsis'를 경험하게 되고, 이로 인해 우리의 영혼이 억압된 상태로부터 일시적이나마 자유로워지기 때문이라고 해. 카타르시스라는 말은 '밖으로 내보낸다,' '배설한다'는 뜻을 갖고 있는데, 즉, 눈물을 통해 우리 마음 속에 쌓여 있는 것을 내보낸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지. '실컷 울고 나니 속이 시원하다.'는 말도 같은 맥락이라고 봐. 그래서 이 당시에는 희극보다는 비극이 더 예술적 가치가 높았다고 그래. 한데, 얼핏 생각하기로는 오늘 날엔 희극이 비극보다 대중성이 높지않나 싶어. 그래도 영화나 드라마와 같은 경로로 대중들의 눈물을 쏙 빼놓는 잘 만들어진 비극들이 나오기도 하지.
그리고 또 한가지, 복음서 어디에도 예수님이 웃었다는 기록은 없어. 다만, 우셨다는 기록만 두 군데에서 나오는데 그 중 하나가 오늘 본문말씀이고 다른 하나는 누가복음 19장 41절에 예수님께서 영적으로 눈먼 예루살렘 도시를 안타까워하시면서 눈물을 흘리셨다고 나와. 그러면 왜 사복음서 기자들은 예수님께서 눈물만 기록했던 것일까? 예수님이 못 웃는 분은 아니실꺼 아냐? 그 이유로서 한 가지 생각이 든 것이 앞서 아리스토텔레스 당시에는 왜 희극보다 비극이 예술적 작품성 혹은 내용적 깊이가 더 크다는 얘기를 했잖아. 사복음서를 기록할 당시에도 그러한 시대적 정신 혹은 공감대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었고, 마찬가지로 성경을 기록하던 저자들도 그 영향을 받았던게 아닐까하는 생각이 해봤어. 성경은 물론 하나님의 영감으로 쓰여졌지만(딤후3.16; 베후1.20-21) 동시에 사람의 손으로 쓰여졌기 때문에 그 사람이 살고 있던 시대적 상황과 환경 그리고 본인의 주관이 깊이 관여되어 있다는 점을 놓쳐서는 안되지. 그래서 동일한 인물을 기록하는 사복음서도 제각각 그 내용과 설명방식이 다른 것 아니겠어?
곁다리 관찰은 여기까지 하고, 본문을 좀 더 살펴보자면, 33절에 마리아와 그의 유대인 친구들이 우는 것을 보고 왜 예수님이 he was greatly disturbed in spirit and deeply moved 되셨는지 잘 이해가 가지 않아. 메시지 성경 한국어 버젼을 보면 이 내용을, "깊은 분노가 북받쳐 올랐다." 라고 해석하고 있고, 개역개정에서는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현대인 성경에서는 "몹시 안타까워하시며," NIV에서는 "deeply moved in spirit and troubled"라고 표현하고 있어.
종합해보면, 한마디로 비극인거지. 안타까움, 연민, 긴장, 통분, 분노, 비통함을 경험하고 있는 상태.
그렇다면, 왜 이 상황에서 예수님은 비극을 경험하고 계신걸까?
상황을 정리해보면, 예수님은 나사로의 죽음을 예견하고 계셨고, 오히려 그의 죽음을 통하여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 되심을 보여줄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하고 계셨으며, 그렇기 때문에 나사로가 병들어 누워있을 때 마르다와 마리아가 예수님께 빨리 와서 오빠를 치료해 달라고 요청했음에도 불구하고 이틀이나 지체하시고 나사로가 결국 죽고나서 사흘이나 무덤에 안장되어 있은 후에 오셨고, 그것도 마을에 들어가지도 않고 마을 얹어리에서 머물러 계셨고, 더군다나 베다니라는 지역은 유대지방으로 자신을 죽이려는 세력이 있어서 제자들이 그렇게 만류했음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제발로 찾아 오셨던 어떻게 보면 잘 짜여진 각본과도 같이 모든 상황들이 예수님의 손바닥 안에 있었을텐데, 즉 마르다와 마리아가 오빠를 잃고 슬퍼하고 있을 것도 다 예상하고 계셨을 텐데...왜 그들이 우는 것을 보면서 예수님은 비극을 느끼셨던 것일까? 오히려, 모든 상황들이 본인의 예상대로 진행되고 있음을 보면서 속으로 흐뭇한 웃음을 짓고 계셨어야 할텐데 말이지.
감정은 남들도 전염시킨다고 남들이 우는 것을 보니까 예수님도 그냥 따라 우셨던 걸까? 설마...요한복음의 기자가 그걸 기록하려고 한 것 같지는 않아. 뭔가 더 크고 깊은 속뜻이 있지 않을까?
한 가지 떠오르는 생각은, 아직까지 사람들이 자신을 너무나도 모르고 있음에 대한 답답함과 서러움 그리고 안타까움에서 북받쳐 오른 눈물이 아니었을까 싶어. 생각을 해봐. 나사렛, 마르다, 마리아 셋 모두 믿음이 매우 신실하고 좋은 사람들이었어. 본문에 나온 마리아만 봐도, 언니가 예수님께서 오셨다고 귀뜸을 해주자마자 벌떡 일어나서 예수님께로 달려와서 무릎을 꿇으면서 이렇게 고백하지. "주님Lord!!"
하지만 그렇게 믿음이 있고 신실하다는 그네들이었지만서도 예수님 입장에서 보면 아직까지 그들이 자신에 대해서 너무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을수 있었을꺼 같애.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된 예수님, 또 그들의 친구되신 예수님은 그들의 간절한 요청에 분명히 오실 것인데, 예수님이 조금 늦었다고 이내 예수님의 역사하심을 포기해버리고 죽은 그들의 오빠 나사로를 벌써 무덤에 안장해버린 그 사실을 보면서...예수님은 아직 이들의 믿음이 이것밖에 안되구나...싶었을꺼 같애... 내가 누군지 잘 안다고 하지만 아직 나에 대해 너무도 모르고 있구나.. 싶으면서 터져나온 안타까움의 표출이 바로 눈물이 아닐까 싶어.
적용:
나 역시 예수님에 대해서 잘 안다고 하지만 실제 내 삶을 들여다보면 너무나도 모르는 것이 많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된 예수님, 그분의 전지전능하신 능력을 더욱 더 신뢰하고 믿고 따르는 제 자신이 되길 원합니다. 너무 믿음이 연약합니다. 담대하고 확고한 믿음을 주세요. 그 옛날 노아가 산꼭대기에다가 백여년에 걸쳐 방주를 만드는 동안 세상 사람들의 그 많은 질시와 비난과 조롱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신실하게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붙들었던 것처럼 저 역시 세상 사람들이 볼 땐 바보같다고 비난할 찌라도 하나님, 예수님을 붙들 수 있는 믿음이 눈을 허락하여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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