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개토론]한국교회 이대로 가다가는 망한다!























류상태 (새길기독사회문화원 연구원)
현재 한국 교회의 문제는 교회윤리/재정/체제 문제라기 보다는 교리적 배타성에 문제가 있다고 본다. 우리교회 나와야만 ~할 수 있다, 여기만 ~된다 등의 만만의 사고에 문제가 있다. 이때문에 교인들로 하여금 자유롭게 열린 사고를 할 수 없게끔 가두고 있다고 본다. 이성과 합리성을 박탈하면서 교인들을 세뇌시킨다. 또한, 교인들은 야합을 하고 있다.
교회가 수직 상승하던 70~80년대 동안, 경제성장이 함께 성장하면서 교회와 경제를 연결지으면서
한국 교회 내세라기 보다는 천국의 개념이 이 땅의 천국이고, 이 땅에서 행복하고 잘 되는 것이 중요하
대다수의 한국 교회 교인들은 하나님을 믿는다기 보다는 거래한다고 본다. 그런 거래를 주도하는 사람이 바로 현재 종교 지도자들이다.

구교형(교회개혁실천연대 사무국장)
교회의 문제 발생 원인
1. 자업자득
2. 사람들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을 싫어한다. 초월자, 만유의 하나님, 인간세계에 개입하려는 하나님, 인격적인 하나님을 마치 폭군과 같은 이미지가 드러나는 성경의 하나님을 싫어한다.
여기에 대해서 정서상 받아들이지만 내용상은 받아들이지 못한다. 내가 생각하기에 교리란 성경의 요약이고 단순하다. 성경의 내용 자체도 문제가 있고, 오류가 있는데 교리 자체가 어떻게 그것을 다 담을수 있겠는가. 교리는 다 담을 수 없는 영역이 있다. 교리를 교리이기 때문에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이해하는 성경과 내 학식과 내 생각과 크게 다르거나 모순되지 않기 때문에 따라간다.
기독교 비판의 시작은 크리스챤의 잘못된 행동이나 믿는 양식에서 비롯되었다고 보며, 그것을 따르는 사람들의 하나님의 신관이라고 보는 것은 지나치다고 본다.
내가 생각하는 교회 개혁은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다시 회복하는 것이다. 목사들은 자신의 위신을 침해받지 않는 대신, 교인들에게 복음보다는 달콤한 메시지로 전하고 있고, 교인들은 그 정도 수준의 메시지에 만족하고 머무르는 대신, 목회자의 질서에 따라주는 목회자-교인 간의 불가침 조약이 있다고 본다. 나는 모든 주권을 하나님께 돌려드려야 한다는 것을 핵심이라고 본다.
나는 도덕적이거나 윤리적인 것, 혹은 제도를 바꾼다고 해서 교회나 사람이 변화되는 것이 아닌 하나님에 대한 경외함과 두려움을 회복해야 한다고 본다. 실제로 하나님을 믿지 않는 마음을 회복해야 한다. 그래야만 교회와 사람들에게 진정한 변화가 일어날 것이라고 본다.

첫째, 성서를 어떻게 봐야 하는가?
류 :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전제를 내려놓고 있는 그대로 볼 때, 그 때 당시 기록한 사람들의 관점이다. 하나님관이 그대로 베어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 민족의 출애굽 당시 사막에서 이방인들과 싸우면서 생존에 긴박한 위기가 있을 때에 그들이 인식한 하나님은 굉장히 무섭고 잔인하고 민족주의적 모습을 지닌다. 여자, 어린아이 없이 모두 죽여야 한다. 남자는 모두 죽여라. 굉장히 무자비한 하나님으로 나온다.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는 자는 성불구자, 장애인…(신명기) 누구는 그래서 여자가 강단에 서서 설교하는 것에 대해서 반대하는데 그것은 성경을 문자 그대로 보기 때문에 그렇다. 마찬가지로 반대론자들은 하나님은 사막의 잡신이고 하나님이 아니라고 얘기한다. 성경을 문자 그대로 볼 때 그렇다. 그 때 당시의 사람들의 의식수준이 그러했다. 우리나라로 따지면 임진왜란 때 사람들이 느끼는 하나님은 이스라엘 출애굽 당시와 사뭇 비슷할 것이다. 그런 과정에서 세월이 흘러서 예수님 시절로 왔다. 그 시절을 우리로 따지면 삼국시대이다. 새까만 옛날이다. 그 때는 또 상황이 달라졌다. 사회가 진화했으며 안정된 터전이 있었다. 예수님이 보실 때 사람들이 1,500년 전 신관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예수님은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이 아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관을 완전히 뒤집어 놓는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말을 너희가 들었지만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원수를 사랑하라. 모세는 이혼증서를 써서 이혼을 하라고 했으나, 그때 당시에는 사회가 불안정 해서 그랬다. 사막에 지나가면서 그 이혼 허락안하면 사람들이 그냥 서로를 죽이고 땅에 묻어버리면 끝났었다. 따라서 그 때 당시에는 엄격한 법이 필요했다. 정의가 먼저 필요한 시대였다. 하지만 지금은 정의만 가지면 안되고 사랑이 필요하다. 문자를 뒤집어 논 것이다. 그래서 그 당시 종교 지도자들이 눈이 뒤집힌 것이다. 예수님은 당시 여호와를 아빠 하나님으로도 부른다. 그전까지만 해도 하나님은 감히 부르기 조차 두려운 대상이었다. 사랑의 아버지로 소개한다. 따라서 나는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로서는 예수님께서 생각한 하나님의 이미지를 넘어서야 한다고 본다. 예수님도 2천년 전의 사람이지 않느냐. 이 모든 것을 볼 때,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이 주신 계시가 아니라, 진화되어가는 과정이다.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봐야 한다. 그래야 성경에서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들을 수 있고 생수를 마실수 있는 것이지 쓰여진 문자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 하나님은 교리 안에 갇힌다. 지금 21세기에 지금부터 3천년 4천년 원시시대 사람들이 인식했던 하나님을 그 하나님이라고 믿고 있으니까 기가막힌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성경은 고백의 언어라고 본다. 성경을 문자 그대로만 본다면 기독교는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한다.

구 : 기본적으로 공감한다. 성경을 문자대로 보는 것은 나도 폐기되어야 한다고 본다. 그리고 세상에 성경을 문자대로 보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한다. 내가 알고 내가 믿는 성경관은 이러하다. 성경 자체는 그 성격이 오류를 전제한 인간의 언어를 가지고 썼다. 그래서 의미상, 문법상, 시대 상황의 변화를 담을 수 없는 오류를 담고 있다. 왜냐하면, 말/글이라는 것은 쓰여진 그 당시에는 의미가 있다고 할지라도 던져지는 그 순간부터 시간이 지나면 그것은 무가치한 얘기처럼 되어 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언어는 항상 오류를 내포하지만 그래도 현재 쓰여지는 언어에 대해서는 현재 살고 있는 우리는 이해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서울 역전 앞이라는 말은 오류가 있지만 우리는 다 이해한다. 그 시대에는 통용될 수 있고 이해되는 내용이라 할지라도 오늘 날에는 이해되지 않거나 의미가 없는 내용이 성경에 많이 들어 있다. 그래서 존재와 차원 자체가 다른 하나님의 마음을 담은 것이 성경이라고 볼 때는 당연히 매 시대시대마다 재해석 되어야 한다. 그것이 오늘 날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 재해석해야 한다. 두번째는, 좀 다른데, 공문의 성격에 따라서 그 성격이 다르다. 모든 성경이 모두 고백의 언어는 아니라고 본다. 반면에 사실적, 현실적인 것들을 기록하고 있고, 또 그것을 기본적으로 토대로 한다. 성경은 기본적으로 역사다. 하나님 스스로가 한계, 제한, 오류를 담보하면서 성경을 취하셨다. 신문기사는 신문기사대로 연애편지는 연애편지대로 읽어야 되듯이 역사의 자료는 역사의 자료대로, 고백의 부분은 고백의 부분으로 읽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성경이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역사성을 함부로 폐기하는 것은 또하나의 오류라고 본다. 세번째는, 성경에 원본이 없고 사본과 번역본으로 옮겨지는 과정에서 수없이 많은 오류와 잘못이 있는데 그것을 붙들고 문자 그대로 옳다고 볼수는 없다. 초반에 성경을 문자 그대로 보는 사람이 없다는데 대한 부연 설명은, 예컨대 예수님이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 빼어 버릴 것이고, 그런 얘기를 본인이 문자 그대로 믿는다고 해도 불구자로 살아가는 사람은 없다. 아무리 예수님을 잘 믿는다고 해도 그것을 문자 그대로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은 없다. 그것은 위선일 뿐이지, 성경을 문자 그대로 자신은 믿고 있다고 주장할 뿐이지 실제로는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단, 거기에 대한 함정과 허점을 파나가는 것은 중요하다고 본다. 그러나 이런 것들을 인정한다는 말이 성경이 역사성을 기반으로 쓰여졌다. 역사성을 기초로 해석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성경의 역사성은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무시해도 좋다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은 잘못되었다고 본다. 성서비평에 대해서는 찬성이다. 그것을 통해 성서를 더 풍성하게 만든다. 그러나 성서비평은 성경을 더 바로 이해하기 위한 자료일 뿐이지 그 틀에 따라서 임의로 성경의 기본 구조를 재구성하는 것은 매우 조심해야 한다고 본다. 특별히 예수님에 관한한 다른 기록이 없다. 로마 당국이 생각할 때 예수가 대단하다고 생각하지 않다고 해서 그런지는 몰라도 예수에 대해서는 어떠한 공식/비공식의 자료가 없다. 따라서 적어도 당시의 정황이나 다른 2차 자료를 참고하는 것 보다는 성경을 가장 큰 근거자료로 삼아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역사적 예수를 복원한다는 이유로 성경보다는 2차 자료에 더 우위에 두는 것은 공감할 수 없다. 보수주의자에게나 진보주의자에게나 성경은 반드시 해석되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렇게 해석될 수 있지 않느냐 정도의 말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성서비평, 역사적 예수의 입장을 공식으로 만들어서 교리처럼 신봉하라고 하는 것은 또 다른 교리이기 떄문에 받아들일 수 없다.

류: 역사는 역사로 보고, 비유는 비유로 보는 것은 당연히 성서 해석의 기본이다. 물론 구약에 보면 부정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 있다. 가령, 기원전 722년에 북왕국 이스라엘이 앗수르에게 멸망당했다. 기원전 586년 남왕국 유다가 바빌론에 멸망당했다. 이런 사실들은 부정할 수 없는 역사다. 그런데 역사라는 것은 모든 역사가 절대 객관의 역사가 없다. 기록되는 그 순간. 똑같은 사건을 한국인이 기록하는 것과 일본인이 기록하는 것은 다르다. 이 사건이 어떻다, 어떤 의미를 준다라고 기록되는 그 순간, 기록자의 해석이 들어간다. 따라서 이것은 절대 객관의 역사일 수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북왕국 이스라엘이 앗수르에게 멸망당했다고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거기서 어떤 해석이 나왔을 때 그것은 절대 객관의 역사일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일단은 역사적인 기술이다, 고로 역사적인 관점에서 보는 것은 맞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이라고 하는 경전 자체를 고백으로 보는 것은, 성경 뿐만 아니라 모든 종교 경전은 고백의 언어로 봐야 한다. 예수님의 존재는 성경 외에는 어디에도 없다. 이렇게 되면 역사라고 말할 수 없다. 따라서 이것은 고백이지 역사라고 보기 어렵다. 역사적 예수는 개인이 아니라 다수일 수도 있고, 이것은 인물이 아니라 사건일 수도 있다고 누가 얘기했는데 그러할 수도 있다. 가능성이 있다. 역사적 예수도 도전받는 이론이다. 그러면 뭐가 남느냐. 그러나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하고 싶다. 진실이 중요하다. 기독교의 허구는 다 깨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확실하지 않은게 다 깨져도 남는것이 있다. 종교라는 것은 수단이다. 예수도 수단이라고 본다. 그러면서 얻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행복이다. 사람의 행복. 예수는 바로 그걸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다. 정말 중요한 것은 무엇이냐. 사람이다. 종교가 아니다. 자기도 아니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다고 했다. 조금 더 확대해보면 사람이 율법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율법이 사람을 위해서 있다. 조금 더 확대해보면 사람이 종교를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종교가 사람을 위해 있다. 종교라고 하는 것은 사람의 행복을 위한 철저한 수단이 되어야 한다. 그러니까 사람을 더이상 행복하게 해주지 않는다. 이것은 문제있다. 종교가 허깨비가 되어가지고 사람을 힘들게 한다면 그 종교는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만약에 기독교가 시한이 다됐다면 없어져야 한다. 예수님이 진정으로 우리에게 가르쳐 준것이 나는 그것이라고 생각한다.

구 : 성경이 해석된 역사다. 그렇다. 어떤 사람도 객관성은 없다. 모든 사람은 다 자기 관점에서 바라본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전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류 목사님에 대해 공감할 수 없는 부분은 모든 전제를 내려놓으라는 것인데 어떤 사람도 전제를 내려놓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모든 사람은 전제를 통해서 생각한다. 전제를 통해서 발견하고 해석한다. 모든 판단 근거는 전제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어떤 전제를 가지고 있느냐 밝히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그런데 기본적으로 성경이 변해가고 있고 발전해 가고 있는 진화의 과정이라는 주장에 대해서는 나도 동의한다. 성경은 처음부터 완제품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아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바라보는 관점이 변해왔다는 것을 하나님이 허용하셨다고 본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은 인간의 잘못된 경험이나 시각을 제한적으로 허용한다는 전제하에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전혀 차별이 없다고 생각한다. 예컨대, 사울 왕을 세우기 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왕을 원했지만 하나님이 사무엘을 통해서 말씀 한 것은 왕을 세우고자 하는 것은 왕을 세웠다기 보다는 하나님의 지도권이나 주도하심을 반역하는 그런 심정이다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원치않으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에 왕을 허락하신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현재 수준이 그런 상황이기 때문이다. 과거부터 있었던 하나님의 신관이 변해왔다. 그리고 그것을 이해하고 수용하는 사람들의 모습들은 당연히 틀려왔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과거는 잘못된 하나님이었는데 나중에는 정상적인 하나님으로 돌아왔다는 것이 아니라 5살짜리에게 말하는 언어 수준과 20살 30살 된 사람에게 하는 언어 수준이 다른 것처럼 하나님께서 그렇게 눈높이에 맞춰 다르게 대하셨다고 본다. 또 한가지는, 제도에 관한 것은 나도 마찬가지로, 나는 교회 개혁을 위해 여러가지로 떠들고 다니지만 여기에 대해서는 나 자신조차 굉장히 회의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개혁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면서 한다. 내 생각에 하나님이 하시는 교회개혁의 방법은 이것이 아닌가 본다. 그것은 한국 교회가 무너질대로 다 무너지고 망신당할때로 다 망신당해서 거품은 다 빠지고 남을 것만 그대로 남아서 새로 시작하는 형태로 교회 개혁이 시작되지 않을까 생각된다. 목회자 정화에 대해서는 이렇게 생각한다. 한편으로는 목사가 되어봐야 이득이 생길게 없기 때문에 목사되는 사람이 없어지고, 또 한편으로는 목사되기가 하도 창피해서 그만두는 목사가 생기면서 목회자 정화가 생기지 않을까 한다. 나는 제도로서의 교회, 기독교에 대해 집착함은 없다. 종교개혁 때에도 프로테스탄트 교회를 만들려고 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하다보니까 그렇게 된 것처럼 우리도 먼저 한계를 정하려고 하지는 않는다. 나는 문자주의를 받아들이지는 않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은 분명히 계시다고 믿고 있고, 그 하나님이 이 세상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라고 믿고 있다. 그리고 그런 하나님의 신관을 가장 잘 수용하고 있는 형태가 기독교라고 생각하고 나는 교회를 떠나지 않고 있다. 만약에 그것이 그 틀을 수용하기 어려운 상태가 된다면 당연히 교회는 없어져야 되겠죠. 예수 그리스도의 핵심과 내용을 전혀 수용할 수 없고 오히려 그 역기능만 더 커진다고 한다면 말이죠. 중세시대 때에도 양심적이고 훌륭한 사제가 없었을까요. 당연히 있었겠죠. 면죄부 안파는 사제가 있었겠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생각할 때 이 틀로는 도저히 담을 수 없다고 생각해서 거기까지 간 것처럼, 나는 현재로서는 조금 확신이 떨어지기는 하지만 여전히 틀을 버리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한다. 현재의 기독교처럼 교리라는 이름으로 자신들의 욕심을 추구하는 것들을 다 배제하고 액기스로만 남아 있는 형태로는 하나님을 가장 잘 담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떄문에 나는 기독교를 계속해서 버리지 않아야 한다고 본다.

류: 전제를 다 내려놓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말은 맞는 말이다. 그러나 그걸 내려 놓을 수 있다면, 어렵지만, 이것만은 내가 옳다는 그것을 내려놔야 한층 더 올라갈 수 있다. 종교가 계속해서 껍질 벗기를 하는데 그러나 여기 제일 둔감한 종교 중에 하나가 유일신 종교다. 나는 기독교가 영성의 측면에서는 죽었다 깨어나도 불교나 도교와 같은 동양 종교를 못쫓아 간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바로 전제를 못 내려놓기 때문이다. 불교는 새로 살자고 한다. 즉, 부처도 죽일 수 있고, 조상도 죽일 수 있다. 그런데 구 목사님의 경우 성경은 찢을 수 있을지는 몰라도 예수는 못 놓을꺼 같다. 나도 비슷할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적어도 교리적인 예수, 성경에서 말하는 모든 것에 대해서 내려놓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완전히 기독교를 떠나고 싶지만 떠나지 못하는데에는 여러가지 매인게 있다. 탁 터놓고 돈 문제도 있다. 그러나 내려놓을 수 있고 다시 재해석하고 비운 상태에서 보면, 또 뚜렷이 볼 수 있다. 그게 기독교에 굉장히 부족하다고 본다. 나는 목사들에게 진정으로 개혁을 하고 싶다면, 예수를 내려 놓으라고 말하고 싶다. 아까도 얘기했지만 교리의 중심, 교리의 모든 것, 예수까지도 - 예수도 교리일 수 있다 – 내려놔야, 기독교에게 살 길이 있다고 본다. 그러나 지금 현재는 예수는 못 건드린다. 어떤 개혁주의 목사님 중에는 성경을 있는 그대로 절대 진리라고 믿는다고 하는데, 그거 어쩌겠는가. 자기가 진실되게 믿고 있는데. 그러나 솔직하게 얘기하면 밥 먹고 못살기 때문에 그렇다. 위선자들 때문에 개혁이 안된다. 한국 교회 중심에 배타적이고 독선적인 교리가 있다. 여기서 모든게 파생된다. 조용기, 김홍도 목사와 같은 무리들이 배타적이고 독선적인 교리를 믿지 않으면 지옥간다는 주장을 계속해서 써먹고 있지 않나. 목사들이 성적으로 방탕하고 엉뚱한짓 하고도 버티는게 뭡니까. 내가 실수했다고 솔직하게 말하기는 하나, 목사가 잘못하면 하나님이 징계한다, 사람이 징계할 수 없다고 말하는게 말이 되나. 이러한 도덕적인 탈선, 돈에 대한 문제 그 깊은 중심에 바로 배타적이고 독선적인 교리가 있는 것이다. 이걸 던져야 한다. 예수까지도 죽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도 부활한 예수를 믿는다. 그러나 그 예수가 어떤 예수인가. 교리의 예수가 부활한 거다. 사람이 만든 허깨비 예수가 부활한 것이다. 실존적으로 보자. 어떤 예수가 부활했는가. 정말 사람들을 종교로부터 자유케 하고, 하늘 아버지 품안에서 모든 전제 없이 행복하게 살아가게 하는 그 예수가 부활했나. 나는 지금 부활한 예수에게서 그런 모습을 찾을수 없다. 이건 완전 허깨비가 부활한 거다. 그러니까 나도 못하지만 모든 전제를 내려놓자는 거다. 기독교가 예수를 죽이지 않으면 거듭나지 못한다고 본다. 역사적 예수가 어떤 예수인가. 다 해석된 예수다. 요즘 역사적 예수를 연구하던 사람들이 해석한 예수가 지금의 예수 아닌가. 보수적인 사람들이 믿는 예수, 자기들이 교리로 만든 그 예수. 내가 말하는 예수도 내가 지금까지 연구하고 뭐 믿어왔다고 하는 그 예수. 즉 내가 만든 예수지 2천년 전의 예수일수는 없다. 그러니까 매이지 말자는 거다. 예수까지 비판하고 죽이고 들어갈때 기독교는 진정으로 살 수 있다. 그런데 그렇게 할 수 있나.

구: 기독교가 전제를 제일 내려놓지 못하고 있는게 사실이다. 그런데 그런 모습을 취하고 있는 모습이 잘못된 것이긴 하지만 내가 처음에 문제제기 한 것처럼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내용 자체가 그렇기 때문에 그럴수도 있다. 어떻게 보면 전제는 누구도 못 내려놓는다. 전제 자체가 없을 수는 없다. 바꿀수는 있다. 그러나 내려놓을 수는 없다. 불교에서는 부처를 죽여라는 말을 하는데 기독교에서는 예수를 죽여라고 못한다. 당연한 말이다. 왜냐하면, 종교관이 그리고 신관이 다르기 때문이다. 불교는 부처를 따르는 것이지 신봉하거나 존중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그가 한 이야기, 그의 삶을 통해서 자신이 깨우쳐서 자신이 다른 사람을 구도하면 된다. 그러니까 당연히 부처가 또다른 따라야될 대상이 아니다. 처음부터 아니기에 쉽게 내려놓을 수 있다. 그러나 내가 이해하는 예수는 따라야할 대상이다. 우리가 그분의 행동을 존경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 분의 삶에 존재 그 자체를 따라야 한다. 그렇기에 우리가 예수를 죽여라, 내려놔라 할 수 없는 것이다. 마치 이런 것이다. 우리가 종교간의 대화를 할 때, 가장 기본적인 전제는 초월적인 신관이 아닌 내재적인 신관에 대한 기본을 가지고 얘기한다. 거기에서는 불교가 제일 우세하다. 기독교에서는 내재적인 신관을 받아들이기 힘들다. 그러나 반대로 초월적인 신관에 대해서 얘기를 하자면 기독교가 아마 제일 강력하게 할 얘기가 많을 것이다. 따라서 어떤 전제를 두느냐가 중요하지 전제 자체를 없애라고 하는 것은 그 자체로서 전제이기 때문에 심각한 오류라고 본다. 또 한가지는, 목사가 잘못을 해도 하나님이 관여하신다는 얘기는 교리적 문제가 아닌 잘못된 상식에서 붉어지는 문제다. 교리적 잘못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분별하지 않으면 정말 필요한 부분까지 없애는 불상사가 생길 수 있으므로 조심해야 한다. 또 한가지는, 하나님에 대한 하나님의 진리,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 하나님이 계시다면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총체적인 그림이 있을것 아닌가. 예를들어 진리의 총체가 있다면, 우리가 액면 그대로 이해할 수 있는가. 당연히 이해할 수 없다. 존재가 다르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인간의 언어로 설명하시고 말씀을 하시기 때문에 오류의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이해하기에는 하나님이 직설적인 언어로 설명을 하다보면 오해가 더 많기 때문에 하나님이 비유로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예컨대, 천국에 대해서 성경은 직설적인 용어로 사용하지 않는다. 대신, 비유를 통해 말하고 있다. 잔치집, 누룩, 겨자씨.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비유로 설명한다. 주인과 종의 관계, 왕과 백성의 관계. 탕자의 비유. 부부간의 관계. 친구간의 관계. 이것은 하나님과 사람은 아무리 가까워지려고 해도 격자체가 다르다는 것을 보여준다. 문제는 여기서 멈추는 것이 문제다. 하나님에게 우리는 복종해야 하는 것으로 오해되는 부분때문에 기독교가 인기가 없어지고, 사람들이 멀리하는 이유라고 본다. 하나님과 피조물의 관계는 분명히 넘을 수 없는 한계가 있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친구와 같이 친근함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이런 부분을 찾아내서 하나님의 본심을 찾아내는데 노력해야 한다. 예수를 죽일때 죽이더라도 그 전에 내가 예수를 바로 알고는 있는가라는 것에 대해서 우리가 먼저 심각하게 고민했으면 좋겠다.


두번째, 종교 다원주의는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류: 종교 다원주의로 가기 위해서는 전제를 내려놔야 한다는 것이다. 구 목사가 불교와 기독교는 종교 자체가 다르다라고 얘기 했지만, 아까도 얘기했지만 내가 말하는 예수는 내가 인식한 예수일수밖에 없다. 그걸 우리가 알아야 한다. 그리고 나는 유한한 존재다. 나는 하나님이 아니다. 즉, 목사들이 제일 크게 착각하는게 뭐냐면, 하나님이 절대자인데 이것도 다 설정이다. 전제다. 절대자인 하나님을 절대적인 성경을 통해서 내가 인식했다. 그러므로 이런 인식도 절대적이다. 하나님이 절대적이고, 성경도 절대적이라고 치자. 그렇게 되면 인간의 논리를 절대화하는 우상숭배가 되지만 그렇다고 치자. 그다음에 거기에 대한 내 해석, 내 인식, 이것도 절대적이어야 한다. 그래야 가능하다. 그런데 자기 이성을 절대화 하는 것이다. 내가 절대자가 되는 것이다. 기독교적으로 볼 때 이것보다 더 큰 우상숭배가 어디있나. 그러면 기독교 논리체계를 누가 만들었나. 하나님이 만들었다고 치자. 어떻게 우리에게 인식되었나. 우리의 이성의 체계를 통해서 인식되었고, 그게 우리의 언어 논리를 통해서 구체화 되지 않았나. 아까 얘기한 것처럼 인간의 논리를 절대화 한 것. 그것은 우상숭배다. 하나님 이외의 것을 절대화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우상아닌가. 이러니까 결코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인식할 수 없는 것이고, 우리 자신도 상대적일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게 다원주의다. 그러니까 다원주의는 상식이다. 이러한 상식을 기독교 논리에 세뇌되지 않은 일반인들은 누구나 다 안다. 어린애들도 안다. 사람이 종교를 가짐으로해서 받을수 있는 피해중에 가장 큰 것은 자주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박탈당하는 것이다. 한 번 그 논리 속에 들어가서 세뇌당하면 어린애가 된다. 내가 하나님을 결코 다 알수 없다. 기독교 공동체가 어떻게 하나님을 다 아느냐. 말도 안된다. 온 우주만물을 다 창조하신 하나님을 유한한 기독교 공동체가 다 알수 있는가 말이다. 유한하니까 유한하게 발견할 수밖에 없는 것이고, 다른 공동체가 또 다르게 하나님의 다양한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고, 그래서 서로서로 간에 배우면서 결과적으로 이런 것들이 공유되면서 하나님을 온전히 알게 되는 것이다. 내가 답답한 것은 이런 얘기들을 정직하게 학자든 목사든 자기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사람은 했으면 좋겠다. 정직해야 한다.

구: 종교다원주의의 해석을 그런식으로 하면 나도 종교다원주의다. 나 역시 기독교가 하나님의 진리를 다 담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어떻게 한 사람이, 한 종파가 차원이 다른 의미들을 다 담아낼 수 있겠는가. 단지 나는 그것을 담아낼 수 있는 더 좋은 그릇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내가 문제로 삼는 것은 거기에서 더 나아가서 모든 종교는 같다고 보기 때문이다. 종교를 통해서 얻고자 하는 것은 같은 것이기 때문에 서로 싸울 것이 없다고 본다. 그것은 마치 자신이 정상에 올라가보고 얘기하는냥 판단하고 얘기하는데 나는 그 자리까지는 가지 말자는 것이다. 내가 이해하기로는 존중해야 하겠지만, 서로 너무 다르다는 것이다. 단순히 표현이 아니라 주장하는 방향이 다른 것으로 느껴진다. 우리가 서둘러 같다고 말하면 안된다. 종교간의 평화에 도달하는 방식이 너와 나는 같다고 해야만 가능하다고 보는가. 그것은 획일주의이다. 파시즘이다. 그게 아니라 너와 내가 다르지만 우리는 함께 살수 있다고 가야 한다고 본다.

류: 종교다원주의를 표현하는데 있어서 산 정상으로 비유하기는 한다. 그러나 그것이 모든 종교가 같다는 얘기가 결코 아니다. 획일을 바라는 순간 그것은 다원주의가 아니다. 다원주의의 중요한 개념은 뭐냐면, 기독교도 종교로서 상대적인 위치에 서야한다는 것이다. 이런 문제와 관련해서 얼마만큼 다른 종교를 이해하는가에는 크게 세가지 논리가 있다. 배타주의exclusive, 포용주의, 그리고 다원주의. 배타주의는 내치는 것. 너희들은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 포용주의는 inclusive. 예수님의 보혈의 은총이 너무나도 커서 부처까지 씻어줄 수 있다는 것. 기독교라고 하는 것을 절대적으로 보는 것이다. 만약 하나님을 절대자라고 본다면 기독교 또한 절대적일 수 없다. 기독교는 하나의 시스템일 뿐이다. 종교라는 것은 손가락일 뿐이다. 궁극적인 것은 무엇인가. 그건 모르다. 하나님을 인격이라고 말하는 것은 결례다. 만약 개가 우리를 보면서 우리가 개격을 가지고 있다고 하면 모독이다. 이것은 다 하나님을 우리의 인식 구조 속으로 끌어 당기고 있는 것이다. 신비주의에서의 깊은 영성을 통해 궁극자와의 만남을 추구하는 신비주의의 영성가들은 교리나 모든 개념을 다 내려놓는다. 그곳에는 종교가 없다. 데카르트도 삼위일체를 해체해 버렸다. 우리가 이렇게 얘기하는 것도 다 개념 장난일 수도 있다. 다원주의는 나는 절대적이고 나머지는 상대적이라는 건방진 생각에서 벗어나자는 것이다. 모든 종교가 같다는 것이 아니고 궁극자를 찾아가는 길벗으로 삼자는 것이다. 다원주의는 절대적인 것을 내려놓자는 것이다. 나는 전제가 많으면 많을수록 그게 다 한계라고 생각한다. 인격도 넘어서야 한다. 그래야 궁극자를 도라고 말하는 세계에 대해서도 들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인격으로 한계를 지어 놓으면 다른 세계에 대해 들을 수가 없게 된다. 나도 내가 인식하는 다원주의가 그렇다. 그러니까 우리는 유한자라는 것이고, 기독교는 유한한 것이다. 유한한 것임을 모르니까 열등한 종교가 되고 있다.

세번째, 질문 / 답변
인간의 행복에만 초점을 맞출수는 없지 않은가. 왜냐하면, 현재 교회에 문제가 많다고는 하지만 그 교회를 통해 행복을 느끼는 사람도 많지 않은가.
류 : 문제는 기독교인이 추구하는 행복도 기독교 공동체에만 적용하는 이기적인 측면이 매우 많다. 예를 들어, 행복이라고 했을때 한정적인 개념이 아니다. 오히려, 기독교, 자본주의, 공산주의는 수단가치다. 그런 수단가치에는 얻고자 하는 본질 가치가 있다. 그것은 행복, 자유와 같은 것이다. 수단을 통해서 본질을 이루도록 해야 하는데 수단이 본질의 자리에 올라가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이다. 이데올로기가 그렇기 때문에 문제다. 그러나 기독교는 종교 자체가 본질가치의 자리에 올라가 있다. 기독교여야만 행복할 수 있다고 말하는데 큰 문제가 있다고 본다. 전도도 하지 말아야 한다. 예를들어, 내가 얼굴에 똥칠을 해보니 행복하니까 너도 똥칠해봐라고 말하는 것은 기가막힌 것 아닌가. 기독교 논리에는 자기안의 논리가 많다. 자기들한테는 행복일 수 있는데 입장 바꿔놓고 보면 남한테는 폭력과 강요인게 많다. 왜냐면, 수단가치를 절대화해서 그렇다. 기독교는 사람을 행복하게 하기 위한 수단일 뿐인데 절대화 시켜서 그렇다. 낮은 단계의 행복도 인정해야 한다. 그런 부분에서 대승불교를 기독교가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대승불교는 불상 만들어 놓고 나무아비타불이라고 하면 구원받는다는 것이다. 기독교와 매우 흡사하다. 의타적인 종교다. 그러나 대승불교가 의미있는 것은 깨달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깨달음을 아무나 하나. 눈에 보이는거 없고 구체적인 시스템이 없으면 하나님을 못 느끼는 사람이 많다. 그런 사람도 존중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기독교가 힘이 있고 의미가 있다. 그러니까 잘해야 한다. 목회자들이 잘 해야 한다. 겸손하게 종놈이 되어가지고, 예수님이 하셨던 것처럼 삶으로 보여줘야 한다. 똑똑한 사람은 안 그렇게 해도 알지만,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서 가시적으로 행동으로 보여줘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목사들이 그렇게 하느냐 말이다. 종교가 엘리트화되면 안된다. 낮아되야 한다. 목사들이 종놈이 되어야지 종님이 되느냐 말이다.

네번째, 논찬발언
김준우 (감리교신학대학교 교수, 한국기독교연구소 소장)
교회 개혁은 여유를 가져야 한다고 본다. 왜냐면, 교회사를 살펴보면 언제나 부패하고 타락했음을 본다. 그렇게 교회가 부패할 때 평신도들의 영성 운동이 일어났었다. 교회가 탁류가 흐러가는 듯한 느낌을 받을때가 있는데, 한국 교회라는 거대한 물길이 탁류처럼 흘러간다는 절망감이 있지만, 그러나 역사적으로 볼 때 항상 교회가 그래 왔다는 것. 그러나 그 속에서 계속해서 영성운동이 있었다는 것. 두 사람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은, 힘을 모을 것에는 힘을 모아야 하지 않겠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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