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hn 9.35-41 "Jesus seeks the outcast"

35절. 눈뜬 자가 사람들로부터 쫓겨나자 예수님을 그를 만나주셔. 참 놀라운 것은 그가 눈을 바로 떴을 때는 예수님을 보지 못했는데 (12절) 이제 사람들로부터 무시받고 버림받았을 때에야 비로소 자신을 고쳐주신 그분을 만나게 된다는 것이야. 왜 그가 눈을 뜨고는 바로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고 사람들로부터 버림 받았을 때에야 비로소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을까? 그 이유를 말씀을 그대로 직역해서 보자면 "1. 예수님께서 그를 '실로암'으로 보내시고는 자리를 옮기셨다가 2. 그가 힘들어한다는 말을 듣고는 위로해주기 위해서 그를 찾아오셨다." 라고 이해할 수도 있을꺼야. 이건 보편 상식적인 해석이라고 볼 수 있어. 

하지만 예수님과의 대화를 보다보니 '아...이건 단순히 상식적으로만 해석할 문제가 아니구나..' 싶더라고. 왜냐면, 상식적으로 눈뜬 자가 불과 얼마 전에 자신을 고쳐주었던 사람의 목소리를 분간하지 못하는게 말이 될까?  더군다나 장님의 경우, 시각이 없는 만큼 다른 감각들 즉, 청각, 후각, 촉각, 미각이 매우 발달해 있는데 말야. 따라서 눈뜬 자가 자신이 들은 목소리, 게다가 자신을 고쳐주었던 바로 그 사람의 목소리, 그것도 얼마 되지도 않은 시점에서 그 목소리를 알아채지 못한다는 것이 개인적으로는 상식에서 벗어나는 내용이라고 생각이 들었어. 

그럼 바로 이런 비상식적인 구문을 상식적 수준에서 벗어나 좀 더 입체적으로 어떻게 해석해 볼 수 있을까? 생각해 보던중에 이런 가능성들을 꼽아봤지.
1. 눈뜰 당시에는 너무 정신 없었고, 또 눈뜬 이후에도 너무나도 바쁜 스케줄과 정신적 압박 때문에 예수님 목소리에 대한 기억을 잃어버렸을 수도 있다. 
2. 혹은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자신을 고쳐준 예수님이라는 인물에 대한 상상과 기대가 너무나도 커지다 보니 그 목소리에 대한 인식도 왜곡되었을 수도 있다.
3. 막상 예수님의 생김새를 보니 목소리를 기억해 낼 수 없을 정도로 파격적(?)으로 생기셨다.
4. "예수님이 다시 찾아오셨을 때는 육체적으로 찾아오신 것이 아닌, 형이상학적으로 찾아오신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의 목소리가 귀로 들린 것이라기 보다는 마음으로 들린 목소리일 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4번에 대해 좀 더 생각해 보고 싶은데, 왜냐면 실제로 그리스도인들의 회심스토리를 듣다보면 이런 경우들이 많은 것을 보게 돼거든. 즉, 이전에는 교만하게 (자기 중심적으로) 살다가 어느 한 시점에 말씀(설교/성경/찬양)을 듣고/읽고/부르고 있는데 갑자기 한순간에 자신이 교만하다는 것을(혹은 죄인임을) 가슴으로 깨닫게 된 이야기. 이것을 사람들은 하나님/예수님을 만났다고들 표현하지. (나도 그러하고...) 그리고 그 순간에 다들 이런 결심들을 하게 돼. "이제는 교만한 삶(자신 중심의 삶)을 내려놓고 겸손한 삶(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테야!!" 즉, 영적인 눈을 뜨는 체험이지. 그리고 이 체험은 개인적으로 실제적으로 경험한 것이기 때문에 누가 뭐라고 하든 본인에게는 그것이 사실이고 진리로 받아들여져.

하지만 비록 그런 찰나적인 체험이 있었지만 다들 이런 고민에 빠져. 내가 경험했던 그 체험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그 체험을 가능케 한 하나님/예수님이라는 분이 과연 누굴까?  분명코 그것은 부인할 수 없는 감정적, 체험적, 실제적 사실인데 어떻게 그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가 잘 되지 않는거야. 대충 뭔지는 알겠는데 입으로는 설명이 잘 되지 않으니 얼마나 답답하겠어. 그러면서 사람들은 회의감과 혼란에 빠지게 되고 결국 영적인 눈은 떴음에도 불구하고 영적인 침체를 경험하게 되지. 

그렇게 심적으로 영적으로 끙끙 앓는 그들에게 다시 예수님이 다가오시는 경험을 하게 돼.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이 품고 있던 모든 고민과 갈등이 해소되어 버려. 왜냐면, 다시 만난 그 경험에서 예수그리스도의 의미를 발견하게 돼거든. 아, 예수님이라는 분이 이런 분이시구나. 그래서 이것을 가능하게 했구나. 우와우!! 예수님이라는 분이 실로 엄청난 분이구나!! 예수님이라는 분이 진리구나!!  그것을 깨닫는 순간 사람들은 예수님을 "주여!!"라고 부르고 그 분을 따라 살게 되는 것이지. 

한데, 사실 이 경험이 특히 믿음이 성장하는 초반기에는 무한 반복되는 것을 보게 돼. 왜냐면 비록 처음 하나님/예수님과의 만남에 대한 체험이 있었지만 (첫경험), 많은 순간 세상에 살면서 자꾸만 거짓증언과 유혹, 그리고 갖가지 혼잡한 얘기들에 노출되다 보면 그 첫사랑, 첫경험을 잊어버리게 되거든. 그래서 내가 영적으로 침체되고 내 마음이 힘들고 가난할 때, 다시금 예수님께서는 내 마음 속에 조용히 찾아와 나를 안아주시고, 일으켜 주시고, 그 분 안에서 다시금 삶의 의미와 용기를 찾게 해 주시지. 그리고 그분을 다시 따라 살겠다는 의지를 주시고 말야. (물론, 타이밍은 각각 다르겠지만 말야...하지만 말씀에서도 나왔듯이 내가 힘들 때 나를 찾으신다는found him 것을 주목해야 해.(35절) 

다시 말씀에 나온 눈뜬 자 이야기로 돌아가서... 눈뜬 자 역시 앞서 말한 그리스도인들과 동일한 경험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해. 즉, 본인은 누가 뭐래도 한 순간의 체험을 통해 눈을 떴는데 누가 자신을 고쳤는지 그 사람이 누군지 설명이 안되는 것이야. 눈뜬 후에 보지도 못했고 말야. 게다가 주변에 많은 사람들은 자신을 고쳐준 그 사람에 대해 자꾸만 딴소리를 하고 있고, 거기에 더해서 결국 그들의 입맛에 맞는 얘기를 안 해준다고 자신을 내쫓아 버렸으니 얼마나 마음이 답답하고 힘들었겠어? 그리고 자신을 고쳐준 그 사람에 대해 정말로 궁금증이 폭발하겠지. 도대체 누구냐 넌?!!!  

바로 이 때, 예수님께서 나타나셔!! 그리고는 눈뜬 그에게 내가 바로 너가 그토록 알고 싶었던 "그 사람"이라고 말씀하셔. 그러자 드디어 눈뜬 자의 입에서는 "주여 Lord"라는 말이 나오지. 앞절에서는 이 사람이 예수님에 대해서 단순히 "예언자 prophet"이라고 얘기했는데 이제는 그의 "주인"이 되어 버린 것이야. 주인이라는 말은 평생토록 그분을 따라 살며,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지. 

내용이 좀 산만해진 감이 있어서 다시 정리하자면,

내가 던진 질문이 눈뜬자가 두번째로 만난 예수님이 과연 실제적 육체적 만남인가 아닌가? 였는데 
대답이 "아니다" 일 가능성이 있었고 그것을 
그리스도인들의 회심 과정과의 유사성을 통해 이해해 보려고 했었어. 


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눈뜬 자에게 실재적, 실존적으로 나타나셨느냐 아니냐라고 따지는 것보다
눈뜬 자에게 예수님의 의미가 어떻게 변화되었는가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 

그리고 그 의미가 또한 눈뜬 자의 삶에 어떤 변화를 초래할지가 훨씬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


마지막 39-41절은 결국 9장의 핵심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지 않나 싶어.

그 말의 속 뜻은:

세상은 예수님으로 인해 둘로 나뉠 것이다. 예수님를 아는 사람과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
결국 예수님이 주인되심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사람이 비로소 죄에서 자유할 것이고, 예수님을 주인으로 삼지 않는 사람은 죄의 노예가 될 것이다, 



적용점:
예수님을 나의 주인되심을 고백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을 따라 살기 원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그분의 음성을 듣기 위해 귀를 기울이겠습니다.

No comments:

Post a Comment